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52화 (252/324)

252화

그들의 분위기는 좀 더 험악했다. 그들의 원래 방침대로라면 이건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영천후는 몰라도 이그네스는 더더욱.

그렇지만 핵심 일리미네이터 전원이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여기엔 단순히 자기 클랜 마스터가 지지하기로 했으니까 붙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그 기저에는 이후 무슨 큰일이 터졌을 때 그에게밖에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 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를 적대하고 유그드라실 측에 서느니,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좀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이미 우리의 의견 따윈 무의미한 것 같네만."

더는 그들의 대변자가 유그드라실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유그드라실의 간부들은 지금 이 순간 세계의, 마법사들의 중심이 자신들이 아닌 영천후란 인간으로 재편되어가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등한시해온 신용이. 사회적인 교류가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버렸다. 그에게 수상쩍은 힘이 있다지만, 유그드라실보다야 낫지 하는 논리가 성립된 것이다.

물론. 그의 힘은 아직 부족했고, 그들은 순순히 그의 아래에 들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돌아들 가시오. 이 일에 관해선…. 이후에 또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오겠지. 레이드 성공은 축하하오."

불쾌한 듯이 그렇게 내뱉은 간부들은 그 자리에서 몸을 휙 돌려서는 안으로 들어갔다.

"후…."

그 뒷모습을 보며 천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든 시간은 벌었다. 그들의 말마따나 다시금 이야기가 나오긴 하겠지만, 당장은 아니리라. 지금 그들의 처지는 유그드라실이 생긴 이래로 가장 불안정한 상황이었으니까.

한편. 그들이 사라지자 지금까지 무거운 분위기를 벗어던지기 위해 설까? 일리미네이터 중 누군가가 물었다.

"그런데…. 처음 구조해왔을 때는 나이스 바디 아가씨였는데, 왜 지금은 어린애가 되어있는 거지?"

"아…. 그건."

그 질문에 뒷머리를 긁적거린 천후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음. 조금 복잡한데 간단하게 말해서, 이그네스는 이제 어른 모습과 아이 모습을 원하는 대로 취할 수 있습니다. 제가 조절을 해주면요. 그래서 본인의 의사를 물어봤는데. 어린 모습이 좋다고 해서."

"그, 그건 말하지 않기로 했지 않느냐!"

화들짝 놀란 이그네스가 그를 올려보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었잖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이거대로 사람 아닌 티가 팍팍 나서 떨떠름한 이야기라 다들 다시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입을 여는 사람은 있었다.

귀와 혀에 피어싱을 한 DS의 B 랭크 일리미네이터, 주광현이었다.

"음…. 그러니까 어른부터 어린애까지 전 방위 플레이를 할 수 있단 건가?"

굉장히 작은 혼잣말이었는데, 워낙 조용하다 보니 그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귀에 죄다 들어갔다.

홀은 이제 다른 의미로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쓰레기."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우와…."

기겁한 여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이그네스 쪽으로 다가가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식겁해서 그에게서 물러났다.

갑자기 홀 한가운데에 뻥 뚫린 구멍이 생겼다. 그 중간엔 주광현 혼자 남았다.

"아니…. 말이 그렇단 거잖아. 응? 이봐. 성준이."

"가까이 오지 마. 난 너 같은 거 모른다."

"이 사람들이…."

그가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이 상어에게 쫓기는 물고기 떼처럼 물러섰다. 그때마다 주광현의 표정은 썩어들어갔다.

그렇게 유그드라실에서의 정리는 마무리가 끝났다.

*

"우오~."

"이그네스. 컴백! 웰컴!"

집…. 이 아닌 호텔로 돌아오자 이브와 에바가 환호하며 맞이했다. 목을 끌어안고 체중을 실어 붕붕 돌아대는 터라 이그네스는 버티지 못하고 넘어져 버렸다.

"으윽. 작작하거라. 이 왈가닥 같은 녀석들."

"헤헤헤."

"심심했단 말야."

테러 사건 이후로 엔체스터 호텔 경비는 더없이 삼엄해졌고, 이그네스가 그렇게 된 이후론 어른들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던 둘은 덕분에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는데, 그녀가 돌아왔다니 이렇게 기쁜 일도 없었다.

"그럼 오빠. 우리는 우리 방에서 놀게!"

"앗, 이 녀석들!"

둘은 그렇게 순식간에 희생양 1호를 끌고 가버렸다. 그녀가 방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된 건 둘이 잠든 10시가 넘어서였다.

"수고했어."

"하아…."

온갖 꽃단장을 당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이그네스를 보며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심심했던 모양이다.

"정말 좀 어떻게 좀 하거라. 저대로 크면 어찌 될지 상상도 안 가는구나."

"뭐 어때. 어릴 때 좀 활발할 수도 있지. 너도 그래서 그 몸을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

이그네스는 대답하지 않고 복도의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사고를 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엘리베이터는 복구되어있었다.

"옥상까지 전부 고친 거냐?"

"응. 보러 갈래?"

"갈 수 있는 거냐?"

"못 갈 것도 없지."

천후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프레지덴셜 스위트 룸에 바로 통하는 이곳에서 계단을 조금 오르니 옥상에 도착했다.

헬리포트이기도 한 이곳에는 높이가 높이인지라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이그네스의 머릿결이 마치 불의 파도처럼 나부꼈다.

"음. 제법 춥구나."

"이젠 추위도 느껴?"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기존 리미터로 억누를 땐 기후 변화나 열 변화에 둔감했는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확인해보니 체온도 이전보다 많이 낮아졌다.

"그래도 아주 꽁꽁 얼 정돈 아니다. 아마 보통 사람보단 여전히 둔하겠지."

"어디 어디."

천후는 확인차 차가워진 자기 손을 그녀의 목덜미에 대보았다.

"음. 인간 난로론 아직 쓸만한데."

"…사람을 난로 취급하지 마라."

뾰족하게 쏘아붙인 이그네스는 그러다가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이 높은 곳에서 둘러보는데, 여전히 지평선 끝까지 건물이 가득하다. 그녀에겐 생소한 광경이었다. 같은 높은 곳이라도, 그녀는 본래 볼 수 있는 곳이 아주 좁은-

"이그네스. 네 과거를 알아냈어."

"……."

어느새 옆에 다가서서 해오는 목소리에 이그네스는 눈을 감았다. 과거. 과거라.

"들을래?"

화염 정령이 되어서 보았던 희미한 비전들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 이야기이리라. 혹은 그것보다 조금 더 자세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죽 생각해왔다.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에 대해서."

"……."

"영국에서 너에게 구해진 이후론…. 보답만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떻게 너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어질까부터 생각했지."

그건 본능적으로 일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에 불이 붙어있는 폭탄 신세인 게 당시의 이그네스였으니까.

그에 대한 고마움이 사무치기에 더더욱 가까이해선 안 된다. 아이들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지. 그저 마지막에 너의 허락에 어리광을 부리고 말았으니까."

그런 몸으로도 세상을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맡은 느낌에 그녀는 마음을 조금 편히 좋고 말았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지만…. 이번에 다시 구해지고 나선.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었지.”

눈을 떴을 때. 옆 침대에서 그가 누워있는 것을 보았을 때.

싸늘하게 굳어있는 주제에 손을 계속 잡아주고 있던 것을 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떨쳐낼 수 없다. 이 녀석은 마지막까지 나를 구원하려 하리라. 그로 인해 자신이 상처 입고, 죽음의 위기를 겪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런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의 기대에 응하는 것이 맞으리라. 체념과 달관으로 살아가는 것은 지혜로워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은 결국 도피다. 그녀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세상과 사람이 두려워, 그것이 낯설어 손을 쳐내는 것과 같았다.

이제는…. 그런 건 그만하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은.

"과거 따위….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70년, 80년 전의 나를 기억하는 건 이제 아무도 없을 터인데."

"……."

"그런 건 이제 되었다. 없어도 충분해. 나는… 너에게 거둬진 이그네스, 세상을 멸할 뻔한 악마면 충분하다."

이제는 그것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앞으로도.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닌가.

천후는 말없이 그녀를 뒤에서 품어 안았다. 그 온기에 눈을 감았다. 아아. 이 품 안은 도저히 벗어나기 싫은 마력이 있었다. 어른의 모습을 한다면…. 이 마력에 좀 더 심취할 수 있을지도 모를 터인데.

그렇지만 그녀는 이 작은 모습을 택하고 말았다.

어떤 모습을 취하고 싶냐는 그의 질문에. 그렇게 답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별것 아니었다.

"아이들과 잘 지내줘."

"응."

"봄이 되면 학교도 같이 가는 거야."

"그래."

짧은 시간…. 그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이 어른거렸다. 그 시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렇게 어울릴 때가 가장 즐거웠다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어리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마 몸은 자연스럽게 성장할 거야."

"그건 다행이구나."

"응. 딱히 내가 조절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이렇게 죽 가면 자연적으로 어른 형상이 되었을 땐 내가 필요 없을지도 몰라."

그땐 그녀가 스스로 힘을 통제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천후는 누가 말해주지도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 대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이그네스는 그러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뺨에 작은 입을 가져다 댔다.

"그럼…. 10년만 기다려다오. 오라비."

"……."

잠깐 멍해진 천후는 그게 무슨 뜻인지 깨닫곤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진정해. 넣어둬, 넣어둬. 아청법 노우. 경찰청 노우."

"…흥."

싫은 남자다. 뾰로통해져서 그를 살짝 밀쳐내는 척을 하던 이그네스는 그러다 빙긋이 웃었다.

그것은 그녀와 함께한 이후로 본 가장 밝은 웃음이었다.

그렇게 웃던 소녀는 그러다 쇽하고 그의 바로 아래에 서더니, 스스로 몸을 붙여서 등 뒤로 안겼다. 정수리만 간신히 보이게 딱 붙어버린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헀다.

“……‘엘리’에겐 고마웠다고…나중에 대신 말해다오.”

천후의 눈이 약간 커졌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

스륵. 큰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는 가만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가만히 그 온기에 몸을 맡겼다.

*

어둠의 영역.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 말고는.

"아아. 복잡하네. 역시 너무 조건을 낮게 잡았나?"

'그것'. 영천후가 '소년'이라고 느끼는 녀석은 거래의 대가를 훑어보며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 홀로 있다 보니, 녀석은 자연스럽게 혼잣말이 늘었다. 허나 그렇다고 외로움을 타거나 그러지 않았다.

그는 본디 홀로 살아가는 게 당연한 존재였으니까….

오히려 이렇게 대화나 거래가 필요한 대상이 생겨난 것 자체가 그에겐 더 성가신 일이었다.

그 성가심을 날려버리려니 속박해대는 이 시스템 역시.

그래도 성과 자체는 있었다. 이제 이렇게 들쑤시고 다니는데도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말이다. 문젠 이게 그리 의미가 없단 거지만.

"메이거스는 역시 대단하네. 결국 밖에서 이것저것 해대길 바라는 수밖에 없나?"

사건을 스스로 일으킬 수 없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게다가….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더 늘어났다.

"스스로 정신이 나간 거에서 돌아온 건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모르게 힘을 쓴 적이 있네?"

레코드를 보지 않았으면 영영 몰랐으리라.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까? 그것은 알아낼 수 없었지만, 그 시전자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녀석의 입에서 낮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 이 녀석인가. 이건… 꽤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그러던 그는 갑자기 시스템이 활발하게 구동하는 걸 느꼈다. '꿈'을 꿀 시간이다.

아아. 별수 없지. 지금은 잠들도록 하자.

어차피… 때는 머지않았으니까.

============================ 작품 후기 ============================

이그네스 쪽 마무리는 이런저런 후보가 있었습니다만, 일단은 이런 방향으로 마무리를 짓기로 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