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유그드라실은 세상에 치명적인 결점을 보이고 말았다. 공식적으론 그들은 세계에 하는 일이 그렇게 많진 않았다.
물론 매일같이 일어나는 전 세계 디제스터 퇴치 중계, 그 숫자 파악을 자기들만 하고 있는 비공개 마법사들의 보호만 해도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건 사실 티가 안 나는 일이다.
디제스터 퇴치 중계는 큐브 엘리베이터의 사용 여부만 제외하면 각 국가에서 완벽하게 대신할 수 있는 일이었고, 마법사 보호의 경우엔 그 규모나 행동을 어떻게 하는지 워낙에 비밀리에 운영되니 얼마나 바쁜지 알 바 아니다.
그 상태에서 정규 공격대와 연합해 난민 보호소 방어를 맡게 된 상황. 외부에서 보기엔 이놈들이 하는 일이라곤 이것밖에 없는 수준인데, 이것마저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수틀리면 언제든지 튀어나올 것처럼 심심하면 입에 올리던 SA 랭크 마법사는 5,300명의 난민이 기관총에 갈려 나갈 때까지 나오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 존재가 엄연히 외부에 공개되어 있는 몇몇 S 랭크 마법사들조차 나서지 않았다.
그들의 신용도는 단번에 바닥을 쳤다. 비난이 쇄도했고, 버텨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 결과…. 턴이 넘어와 버렸다.
미국 백악관 앞.
수많은 경찰과 환영인파들이 입구 한가운데를 일부러 텅 비우고 서 있었다. 조금 지나. 그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서 갑자기 문 같은 것이 열리더니… 사람이 튀어나왔다.
거기서 내린 것은 다섯 명이었다.
가장 앞서 나온 것은 미국의 제2 군사력이라고 불리는 이들. 안소니와 패트릭.
그 뒤로는 검은 실크 드레스를 입은 머니 크래프트의 마스터, 제이나와 차분한 인상의 금발 남자, 컨퀘스터의 마스터 스컬린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장 차림의 동양인이 거기에서 걸어 나왔다.
천급 디제스터 이그네스 엠프레스를 쓰러뜨린 주역. 드래곤 슬레이어이자… 미국에선 월드 챔피언. 피플스 가디언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남자.
영천후였다.
"오. 어서 오시오."
미국 역사상 두 번째 흑인 대통령 발터는 그런 천후에게 다가와 이미 오래전부터 친숙한 사이였다는 듯이 어깨동무를 하며 그를 맞이했다.
천후 역시 밝게 웃으며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쉬에 화답했다.
'….죽겠네.'
속으로 하는 생각은 전혀 달랐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럴 필요가 있었다. 반드시 말이다.
*
이그네스 엠프레스 레이드가 끝난 후…. 그 퇴치 영상은 크게 '가공'되었다. 본래 이런 강력한 디제스터를 퇴치한 경우엔 선진국 정상들에겐 원본 영상을 쉽게 공개하곤 했지만, 레이드 다음날 바로 일어난 보호소 테러로 인해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원본 영상 그대로를 본다면 영천후는 이그네스 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 또 다른 괴물에 지나지 않았다. 일리미네이터들이야 동업자들이고, 앞으로 계속 이 업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줬지만, 보통 사람들까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네버. 절대 그럴 수 있을 리가.
그래도 원랜 그대로 제공할 생각이었지만, 사건이 일어나고 더는 자신들의 영향력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방침을 바꿨다.
SA 랭크 마법사가 없는 이상. 그들은 입장을 반영해줄 다른 대리인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영천후였다.
물론 그걸 그가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얼마 전까지 이그네스의 처분을 두고서 있는 대로 갈등한 놈들이 이제 와서 꼬리 좀 내린다고 어울려 줄 정도로 어수룩한 그는 이제 예전에 사라졌다.
"이그네스 전용 리미터는 이미 만들었고, 텔레포테이션 시스템은 이제 대한민국 한정이라면 유그드라실의 허가 따윈 필요도 없어. 큐브 엘리베이터야 지들이 아쉬워지면 써달라고 알아서 부르겠지. 내가 유그드라실에게 불리할 구석이 정말 단 하나도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유그드라실의 도움 요청을 받은 천후는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솔직히 직업상 그들과 어쩔 수 없이 엮이는 부분을 제외하면 이제 더는 상종도 하고 싶지 않은 게 그의 본심이었다.
그렇지만 친란의 생각은 달랐다.
"너무 그러지 말게. 자네의 마음은 알겠지만. 이번 제안은 받아들이는 게 좋겠군."
"왜 내가 그래야 하지? 이제 지긋지긋해. 저것들과 얽히고 싶지 않아."
"하지만 자네가 아직 그들만큼 마법사 활용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
"……."
"안타깝지만 지금 그대가 상대해야 할 적은 초자연적인 능력이 없이는 대응할 수 없네. 적이 같은 이 시점에서만큼은 손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네. …그대가 사람을 막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말이지."
"그건…. 맞아."
여기서 사람이 누굴 말하는지는 분명했다.
라즈베리.
아니…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엘모세와트와 알자드가 저지른 만행에 얽힌 수많은 어린아이가 생각조차 없는 마법 폭탄이 되어버린 모습을 그는 보았다그걸 더는 봐줄 수는 없다. 결코.
그가 만인을 구할 성인군자가 될 순 없었다.
하지만….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도구가 되어 버린 마법사들에게서 눈을 돌린다면, 누가 그를 같은 마법사로. 인간으로 봐줄 터인가?
아니. 아니다. 누가 어떻게 봐주느냐가 아니야. 그냥….
"그딴 건. 도저히 더 봐줄 수 없어! 내가!"
그래. 내가 봐줄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어쩌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희생되는 아이들을 내가 그냥 놔둘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이걸 홀로 해결할 수 없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손을 잡아야 했다. 알자드를 상대하기 위해 손을 더럽힐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유로…. 부족한 부분을 못마땅한 곳에서밖에 채울 수 없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질이 나고 화가 나지만 현실은 엄중하고 무겁다. 천후가 유그드라실과 비슷한 수준의 마법사 통제 시스템을 만들려면 그것만으로도 수년에서 수십 년은 걸릴 터였다. 그때까지 기다릴 순 없는 것이다.
약간 흥분 상태에 접어든 그의 모습을 본 친란은 가볍게 그의 볼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후후. 그래. 자네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거네. 하지만… 그래도 이번엔 그렇게 속이 뒤틀리진 않을 거네."
"음?"
무슨 뜻이지? 눈으로 그렇게 물으니 그녀는 부채를 치우고 밝게 웃었다.
"갑을 관계가 역전되어있을 테니까 말이네."
*
얼마 전까지 유그드라실은 영천후의 해외 이동에 큐브 엘리베이터를 제공하지 않았다. 디제스터를 퇴치할 때를 제외하면.
이그네스가 남극으로 날아가는 와중에까지 그랬었으니, 정말 겉으로만 하하호호 거리는 관계였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차를 타고서 백악관으로 들어간 그는 발터 대통령이 권하는 자리에 앉으며 서두를 떼었다.
"오늘 저는 모든 정규 공격대와 '유그드라실'의 의견을 통합한 대변인 자격으로 여기에 왔습니다."
"…아. 아. 그렇습니까?"
발터 대통령의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 태연하게 비행기도 아니고 큐브를 타고 내려왔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직접 말로 들으니 무게가 달랐다.
천후가 한 말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이렇다.
'나는 지구 상의 모든 마법사를 대변하는 자이다.'
1/10,000 확률로 태어나는 초자연적 능력을 가진 제2 인류의 통합 대변인이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지금까진 정규 공격대 마스터와 유그드라실 사이엔 언제나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었다.
그나마 SA 랭크 마법사들이 비슷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들은 유그드라실이 발족할 때 나타난 이후론 보이지도 않았다. 이제 와선 허상 속의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지금 이 자리에. SA 랭크 마법사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내려선,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이 눈앞에 나타났다.
순간 발터 대통령은 근처에 있는 보좌관이나 분석관들에게 힐끗 눈짓했다. 그것만으로 의사는 충분이 전해졌다.
그 의미는 간단했다.
수정.
그들이 인지하던 기존 마법사들의 정점은 유그드라실. 그것이 이 자리에서 단숨에 수정되었다.
이젠 아니다.
이젠 그들이 아니라 이 남자였다.
'내부에서 큰일들이 있었나 보군.'
미국은 강력한 첩보기관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들 사이에 존재하던 알력싸움까지 알아내기엔 벅찼다. 다만 안소니나 패트릭을 통해 유그드라실과 공격대 마스터 사이에 알력이 존재한다는 것까진 인지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이 남자는 그것을 모두 끝마치고, 그걸로도 모자라 다른 공격대 마스터들까지 포섭한 양태를 보이고 있었다.
놀랍고도 두려운 일이었다. 이제 이 남자의 발언력은 이전과는 격이 다른 것이 되리라. 인류는 이제야 진정으로 제2 인류와 진정으로 대면하는 자리에 선 꼴이 된 것이다.
그것은 사실상 우주인과의 퍼스트 콘택트와 가까운 감성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가 꺼낸 다음 한마디는, 그들이 지구에서 살아온 그들과 동류의 존재임을 그에게 깨닫게 해주었다.
"먼저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요청하고 싶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랍권에서 움직이고 있는 용병 단체가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 수많은 민간인뿐 아니라 마법사 인신매매를 하고 있지요.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저희가 따로 용병을 움직이는 걸 '묵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
발터의 머릿속에는 굉장히 여러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영민한 그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이 대변인은…. 사람의 말을 할 줄 안다는 결론을.
그의 얼굴이 한결 풀렸다.
"놀랐습니다. 지상군 투입을 바라실 줄 알았는데요."
"그럴 순 없겠죠. 지금 미국 상황에선 도저히…."
"이전 유그드라실이라면 그랬을 겁니다. 다행이군요. 대변자가 당신으로 바뀐 건."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은 발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유그드라실이 발족한 냉전 시절. 당시 나타난 SA 랭크 마법사들의 데몬스트레이션은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이나 소련을 기겁하게 하기 충분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마음만 먹으면 인류를 증발시킬 수 있을만한 무력을 보여주었고, 인류를 굴복하게 했다.
그 뒤로 그들의 위세를 등에 업은 유그드라실의 요구는 늘, 언제나 과한 면이 있었다.
그러다 영천후의 이야기를 들은 발터의 감상은 이랬다.
"드디어 외계인들이 지구 사정을 파악했다 싶군요."
"……."
외계인이란 발언에 약간 욱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예시라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닌지라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게다가 발터의 이 말은 평소에 유그드라실이 어떻게 행동해왔는지 알려주는 척도와 같았다.
"돌아와서…. 그 정도라면 도움을 드리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사실 미국 내부에선 지상군 투입에 대한 여론도 격한 상황이라…."
부시 행정부에서 온갖 삽질로 미국 경제를 박살 내놓은 걸 저번 행정부에서 간신히 호흡기 붙여서 살려놨다. 그러자 다시금 '강한 미국'을 바라는 사람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현 행정부는 최대한 군 투입까진 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치고 있는 상황에 가까웠다.
"신의 국가를 직접 상대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일을 키울 순 없겠죠. 저희가 개입하는 범위는 최소화할 생각입니다.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그런 것이라면야…. 사실 우리 정부에서도 더는 마법사 테러가 일어나면 위험하단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협조할 수 있다면 나쁠 것이 없지요. 각국 정상들과도 스케쥴을 잡아보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뿌리를 뽑아보지요."
발터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무기 지원을 한다면 어디까지 해야 할지, 엘모세와트 위치 파악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등의 논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