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59화 (259/324)

259화

<잔류>

알자드가 사망하자 데스웨도우는 곧장 항복했다. 그냥 어용 PMC만 상대하자면 좀 더 버텨보겠지만, 당장 눈앞에서 괴물 놀이하던 놈이 섞여 있으니 싸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천후는 알자드 외엔 사람을 상대로 힘을 쓸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게 생각해주느냐 마느냐는 그가 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들의 시선 하나하나가 천후에겐 가시가 되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최대한 냉정함을 가장해서 마법사 희생자들을 유그드라실에게 맡기고, 엘모세와트에 대해 알아내는 것에 주력했다.

천후는 최악에는 유그드라실 마법사를 통해 정신계열 주문을 사용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뜻밖에 순순히 입을 열었다.

“마법사를 일차적으로 넘기는 루트는 유럽 쪽입니다. 아는 내용은 전부 말할 테니까 제발 이상한 짓은 하지 말아주세요.”

“모리스나 그가 데리고 다니던 꼬마들 꼴이 되는 건 사양입니다.”

“…….”

그들이 유그드라실에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장면이었다.

알자드의 부하 중 핵심 멤버에게 정보를 들은 천후는 한가지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완전한 특정이…. 안 된다.”

알자드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대로, 그들 중 일부는 기억이 온전한 이들도 있었다. 덕분에 알자드가 세상에 마법사를 뿌리는 루트. 방법. 중간에 엮이는 자들까지 구체적으로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을 일차적으로 보내는 곳은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다. 유럽 몇몇 국가에 보낸다는 것까진 알아냈지만, 그 중간에 머무는 곳까지만 가본 이들이 전부였다.

“그들의 수괴와 직접 만난 건 단장이 유일합니다.”

“…….”

역시 그를 살려뒀어야 했나. 천후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를 죽이고 살리고는 마지막에 가선 이미 그의 손을 떠나있었다.

나이는 먹지 않는 몸이 되었지만, 수많은 인체 실험의 후유증으로 그는 확실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오늘 싸우지 않았어도 1년 이내에 사망했으리라.

그 상태에서 천후의 강화마법을 따라잡느라 무리하게 마법을 사용한 그는 마지막에 와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래서 재생력을 부여해주는 마법이 풀리자마자 사망해버린 것인지라, 이런 생각을 해봐야 의미가 없었다.

그 뒤. 데스웨도우 인원들은 아랍국가에 맡겨졌고, 천후는 서울로 돌아왔다.

*

늦은 밤.

천후는 불 꺼진 방안에서 TV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님….”

“아. 음. 희주 씨.”

그런 그가 걱정된 걸까? 희주가 방으로 들어서며 그를 불렀다. 사실 걱정될 만도 했다.

그가 있는 이 방은 1층 안방이 아니었다.

방주인이 자리를 비운 2층의 라즈베리의 방이었다.

그녀가 있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방에 들어온 그는 라즈베리가 늘 비장의 물건이라고 자랑하던 베스트 콜랙션들을 틀어보고 있었다. TV 속에서는 가면 쓴 변신 히어로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참 많네요. 두고 간 게.”

“…….”

“얼른 가지러 오게 해야 하는데….”

쓰게 웃은 천후는 다시 TV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희주는 몇 번인가 눈을 깜빡이다가, 그의 등 뒤로 다가와 가만히 끌어안았다.

희미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들어왔다.

“막혀버린 건가요?”

“…….”

그녀의 질문에 천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웨도우가 남긴 증언이 아주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토대로 조사한 비행기 기록, 인물 조사를 거듭한 결과 그들의 본거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국가’는 몇 곳으로 압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다시 한 번 중개를 거치는 순간. 거기서부터 모든 증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 본거지에 가까워지자 정신계열 마법의 개입이 너무 강해져서 더는 진행할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이다.

아무리 그라도 이 정도 범위를 전부 들쑤시며 다닐 힘은 없었다.

“차라리… 개인적으로 찾아보고 다니면 모르겠지만, 더는 어쩔 수가 없더군요.”

“…….”

“이렇게…. 작정하고 숨었다가 또 한 10년 지나면 나타나겠죠? 그리고 그땐….”

아니. 아마도 이미 어찌하기엔 늦었으리라. 마지막 지푸라기 잡는 심정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도 알고는 있었다.

그가 아는 라즈베리 미키스트리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그때 그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있으리라.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왜…. 대체 왜 그런 끔찍한 짓을 하는 걸까요? 난 이해할 수가 없어….”

이렇게 안겼는데도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희주는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약해진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그러면서도 그는 상처 입었음은 노출하고 있었다.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것 역시 긍정적인 방향이지만…. 그 계기가 너무나 잔혹하다.

희주는 대답 없이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것에 대한 답은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질문과는 다른 말을 입에 담을 뿐이다.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

“그 아이는 자신의 영웅이 찾아오기를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의 어깨가 흔들렸다.

언제나. 언제나.

5년이고. 10년이고. 이제 다른 사람이 되어. 알아보지도 못하게 되더라도. 그 의미가 그의 머릿속을 흔들었다. 온몸의 혈관이 전부 틀어 막힌 것 같았다.

“그러니…. 부디. 포기하지만은 말아 주세요.”

나지막한 목소리엔 희미한 감정이 실려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진 알 수 없었지만.

“주인님은 그 아이가 바라는 단 한 명의 히어로니까.”

그다음 말에 천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의 시선은 다시금 TV 화면으로 향했다.

아아. 히어로. 히어로라.

나도 저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모든 것을 어떻게든 이뤄낼 수 있는 자들이면 좋으련만. 그렇지가 않다.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그걸 위해 타인의 힘을 빌리고, 편법을 사용해도 닿지 않는 영역에 네가 있어.

너무나. 너무나 어렵다.

하지만. 그래…. 그녀의 말이 맞다.

내가 저들과 같을 수 있는 건 아마 하나밖에 없겠지.

‘절대 포기하지 않아.’

*

“아아. 정말 언제까지 여기에서 지내게 하는 거야, 파파는. 지루해.”

“죄송합니다. 조정 이후 어느 정도는 머무르셔야 한단 게 그분의 방침이신지라.”

“조정은 이미 끝난 지 오래잖아. 귀찮네, 정말.”

천장과 벽에 수많은 전구가 달린 공간. 백색 가운을 입은 이들에게 갈색 머리 소녀는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그 가짜는 이미 사라졌다고 했잖아? 여기에 계속 있는 건 재미없다고.”

“저희한테 그런 말씀 하셔도…”

“그분께 직접 말씀드리는 것이….”

곤란해 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것들을 본 그녀의 표정은 한껏 찌푸려졌다. 사실 그들의 말 대로였다.

그녀, 레졔나가 움직이는 허가를 내릴 수 있는 건 그녀의 아버지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아무리 말해봐야 별 의미는 없었다.

‘그렇지만 파파에겐 당분간 말 잘 듣겠다고 해뒀단 말이지.’

그녀의 ‘파파’는 그리 자주 만나볼 수 없었다. 억지를 부리면 못할 것도 없지만… 레졔나는 파파에겐 착한 딸이고 싶었으니까. 대신에 누구 하나가 말실수라도 하면 그걸 핑계 삼아 나가볼 생각이었지만, 잘 넘어오지 않는다.

투덜거린 그녀는 걸터앉아있던 침대에서 내려와 방을 나왔다. 그녀를 따라서 네댓 명의 연구원들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녀는 그들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자기 마음대로 활보하고 돌아다녔다.

그녀가 돌아다니던 일반구획을 지나면, 한편이 강화유리로 막혀있는 방들이 보였다. 그녀는 그중 하나로 시선을 던졌다. 그 안에는 멍하니 제 자리에 주저앉아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오늘은 몇 명이야?”

간단히 던진 대답에 연구원들이 당황하며 말했다.

“아가씨. 실험체에 너무 관심을 보이실 필요는….”

“뭐?”

레졔나의 아미가 꿈틀거렸다. 그 순간 그녀의 몸에서 녹색 오오라가 치솟아 올랐다.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으며, 연구원들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내가 물어보면 대답이나 해. 너희가 뭔데 말대답이야?”

“죄, 죄송합니다.”

넘실거리는 단발머리를 보면서 덜덜 떤 연구원은 곧장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눈앞의 이 여자는 수틀리면 따라다니는 연구원의 목숨 정돈 눈 깜빡할 사이에 앗아갈 수 있는 괴물이었다.

안 그래도 기분에 따라서 행동이 들쭉날쭉해지는 여자인데 자칫 신경을 거슬렸다간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지금까진 그런 적이 없더라도 말이다.

“오늘은 35개 샘플이 실패했습니다. 곧 폐기를 준비 중입니다.”

“…그래?”

연구원의 말에 례졔나는 유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스스로 생각할 힘을 잃고서 앉아있는 저 아이들은 ‘실패작’이다. 파파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인형들. 조직의 자원을 갉아먹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폐기하는 건 당연한 순리.

그런데….

지직. 머릿속이 따끔따끔 거리는 느낌에 레졔나는 인상을 썼다. 조정은 끝났을 텐데도 이따금 이런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물론 무의미한 것이다. 조정의 잔재.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난다면 아무렇지도 않아지겠지, 분명. 그렇긴 하지만….

“며칠만 그대로 놔둬. 정신을 차리는 애들이 나올 때도 있잖아.”

“네? 아니요. 그건 너무 가능성이 낮아서 빠른 폐기 쪽으로 오래전에 가닥이….”

남자 연구원이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말에 레졔나가 고개를 확 돌렸다. 그러자….

콰쾅! 남자 너머의 벽면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석재가 무너져 내렸다. 놀란 연구원은 다리를 후들거리다가 참지 못하고 결국 그 자리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레졔나는 그런 남자를 내려보며 말했다.

“나는 해라 라고 한 거야. 너희 동의를 구한 게 아니라.”

“아. 아아아….”

“매일 동생들이랑 놀다 보니까…. 나까지 실험체로 보여?”

남자의 머리가 필사적으로 좌우로 돌아갔다. 그런데도 레졔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오오라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보통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연구원들은 다 같이 그녀의 앞에 꿇어앉았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제발 노여움을 거둬주십시오.”

“아직 미숙한 자인지라….”

“흥.”

벌레 같은 것들. 쓰레기를 보는 눈으로 그들을 노려본 레졔나는 휙하고 몸을 돌려서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겁먹은 그들은 차마 그녀를 더 따라갈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말대답한 남자를 둘러쌌다.

“너 미쳤어? 례졔나 오리진은 조정한 지 얼마 안 돼서 불안정하다고.”

“그, 그렇지만 자원이….”

“그깟 통조림 몇 개랑 목숨이랑 바꾸고 싶나?”

남자는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목숨은 순전히 그녀의 기분에 따라서 언제든지 날아갈 수 있으니 극도로 민감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뭐…. 이미 수령께서 조금만 더 지나면 안정될 거라고 말씀하셨으니까. 그동안 샘플들을 살려두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잖아. 좋게 가자고. 좋게….”

어르는 듯한 여직원의 말에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연구원들은 레졔나가 사라진 통로 쪽을 바라보았다. 본래는 얼른 따라가야 하지만, 어차피 그녀는 수령에 메여있는 존재. 그냥 놔둬도 이곳을 빠져나갈 일은 없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다.

“마법사 따위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뱉었던 남자는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레졔나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것 말고도 그들이 할 일은 무궁히 많기에.

*

“지루해.”

지하시설에서 나온 그녀는 산중 저택으로 나와 그 안을 돌아다녔다.

이곳엔 아무도 없지만…. 바로 그렇기에 이 아래 쪽 시설보단 그나마 나았다. 파파를 만날 수 있는 건 좋지만, 그때 외엔 시끄럽고, 짜증 나고. 갑갑하고…. 피 냄새가 나는 곳.

거기보단 이 위장용 저택이 훨씬 지낼만하다.

안에 있는 다른 아이들도 같이 나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럴 일은 없다. 필요한 때가 오지 않는 이상 그들은 나올 수 없다. 오로지 레졔나만의 특권. 그것에 감사해야 할 터였다.

그래. 이건 파파가 나에게만 특별하게 준 권한. 그러니까 다른 아이들과 같이 나올 순 없는 거다. 응.

아아. 그렇지만 이곳을 돌아다니며 저택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째선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마치 이런 집에서 살아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 아니, 이것보단 조금 더 작으려나?

그래도 작은 정원도 있고. 같은 층에는 다른 아이들이….

“…….”

멍하니. 기시감에 이끌려 그녀의 발걸음이 움직인다. 몽롱한 기분. 아주 잠시. 자기가 자기가 아니게 된 기분.

“…핫.”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거실 한편에서 정신을 차린 레졔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방에서 여기까지…오면서 뭘 했는지 기억이 모호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거라곤 몇몇 그림들뿐이다. 뭘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조정을 다시 받아야 하나.”

그것만은 질색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레졔나는 몸을 돌려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레졔나의 생각은 옳았다. 방에서 그녀가 서 있던 곳까지…. 있는 거라곤 그림뿐. 그걸로 뭘 할 수는 없겠지만―

뚜.

뚜.

뚜.

그녀가 서 있던 자리 바로 앞.

돌려서 거는 식의…이제는 모형으로나 볼만한 구형 전화기의 수화기는 바닥에 떨어진 채. 통화종료음을 울리고 있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 전부터. 그녀가 방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