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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264화 (264/324)

264화

“공평….”

어깨가 들썩인다. 공평한 세계라. 그것참 대단히 공평하군. 마법을 마법사만 사용하니까, 전 인류가 마법사를 한 명씩 소지하게 되면 공평해진다 이건가?

머릿속이 깨끗하게 날아갔다. 천후는 흥분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죽어있는 아이들 사이에 숨어있는 연구원들을 돌아보았다.

개인 차이는 있었지만, 다들 같은 사상을 가진 이들로 보였다. 남자가 한 말에 아무런 이의제기도,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도 없었다.

그들에겐 정말 마법사는… 인간과 닮은 도구인 것이다.

개량방향은 얼마나 마법사를 쉽고 편리하게 다를 수 있느냐. 이지를 빼앗는 것은 다른 것보다 그 편의성을 의한 것이었다. 아이들을 주로 다루는 것도 어릴수록 정신에 관여하게 쉽기 때문. 암시를 거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말 아쉬워요. 샘플들의 번식 주기만 더 짧았더라면 더 괜찮은 결과를 낼 수 있었을 텐데.”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천후의 몸이 천천히 떨렸다. 어느새 그의 눈엔 살의가 담겨있었다.

‘다… 죽여버릴까?’

천후는 왜 따로 한 침대에 모여 있는 아기들이 있는지도 눈치챘다. 저들은 실패작. 마법 자체를 각성 못 한,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하지만 연구하는 입장에선 마법이 없는 아기들은 아예 존재 이유조차 없다. 그러니…. 모았다가 폐기한다.

같은 인간이라는 의식은 없다. 어떻게 같은 인간이란 말인가? 마법사끼리 새끼를 쳐서 나온 저것은 가축보다도 하등한 것인데.

실험대상. 실험대상.

그 인식을 자연스레 유지할 수 있는 이들만이 이곳에서 연구원으로 지낼 수 있었다. 천후는 이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살려둘 필요가 있나?’

자기 마음속에 이 정도의 살의가 깃든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지금 마음 같아선 이 남자고, 저쪽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가운 입은 놈들이고 간에 전부 정리해버리고 싶었다.

그걸 가지고 아무도 그를 탓하지 못하리라. 아니. 탓해도 좋다. 지금 이자들의 손으로… 이들이 활동한 십여 년간 얼마나 많은 갓난아이들이 죽어 나갔을지. 숫자를 세는 것이 무의미하다.

이놈들에겐 벌이 필요하다. 죽어 마땅한 놈들.

으드득…! 그의 주먹이 세게 쥐어지며 피가 흘러나왔다. 악문 그의 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여기서 손을 쓴다면 자기는 이들과 다를 게 뭔가?

이런 것에 집착해야하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구애받아야 한다. 자신이 수틀린다고 해서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세상에 강림한 괴물 그 자체가 될 테니까.

아아. 하지만 이것이 과연 정당한 선택이란 말인가?

사람의 죄는 사람이 벌할 수 없다.

사람을 벌할 수 있는 건 법뿐.

하지만 그 법의 보호를 받지 못 하고 죽어간 아이들의 원은 누가 달래주지? 어째서 죄를 짓는 것은 제멋대론데 벌하는 데에는 절차가 필요하단 말인가?

이미 수많은 사람이 토의하고 논의하여 결론 내린 체계였지만, 그것에 원초적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끊이지 않았다.

“으아아아아!”

그 모든 갈등을 안고서 천후는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갈등을 완전히 끊을 순 없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대면해야 할 저 앞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 마음을 가슴에 안고서 나아갔다.

브리딩 룸을 벗어나 좀 더 내부로 들어가자…. 그곳엔 수많은 유리 수조들이 보였다. 그 안에는 다시금 어린아이들이 들어있었는데, 천후는 그들의 외모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래. 마치 이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여자아이처럼.

라즈베리를 닮았다.

“…….”

클론? 아니면 그와 유사한 다른 방식일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와 유전자적인 연결점을 느낀 천후의 발걸음은 점점 거칠어졌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흑색 오오라에서 백색의 빛무리가 희미하게 나타나 허공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금 그 커다란 공간을 지나 들어갔을 때였다.

바닥과 벽면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전선이 깔려있는 곳이었다. 그 하나하나가 성인 남성의 무릎이나 허리 두께만 한 전선들은 구불구불 엉켜서 그 안쪽으로 연결되어있었다.

천후는 말없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안에는….

“어라. 오셨슴까, 싸부?”

갈색 단발머리에 스키니 진을 입은 여자가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를 닮은. 수십, 수백의 아이들과 함께.

“라즈…베리?”

커다란 공간이었다. 높이는 15m가량에 너비는 한 면만도 300m 가량은 되어 보이는, 잘도 산 안쪽에 이만한 공간을 만들어 놨다 싶을 정도로 넓은 곳.

그 안에는 수많은 깨지거나 말짱한 수조들이 보였고, 그 중 온전한 쪽에는 이전 방에서 보았던 것처럼 여자아이들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 가장 안쪽에는 커다란 소파가 하나.

거기에는 양복을 입은 노인이 잠이라도 든 건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소파 뒤의 벽면에는 관을 연상시키는 물체를 중앙에 두고서 지금까지 보였던 두꺼운 전선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그 위쪽에는 네 방향으로 모니터가 달려있었는데, 거기에는 아직 아무것도 표시하고 있지 않았다.

그 중 천후의 시선이 향한 것은 역시 라즈베리였다. 죽은 듯이 고개 숙인 노인 옆에서 앉아있던 그녀는 천후가 기억하는 특유의 활기찬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데까지 찾아오시다니. 너무 먼 발걸음 하게 해드렸지 말임다.”

말버릇도 여전하다. 몇 달 사이에 습득한 한국어는 능숙하기 짝이 없다. 그렇기에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라즈베리…? 괜찮은 거니?”

그 말에. 갈색 머리의 여자는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푸북….

그 대답으로. 그의 심장에 구멍이 뚫렸다. 천후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그 모습을 보며.

“물론 괜찮아, 싸부. 아. 그리고 내 이름은 레졔나니까. 기억해둬.”

그녀. 레졔나는.

“물론 내 이름을 당신이 부를 일은 없겠지만.”

친근하게 죽음을 선고했다.

그의 눈에 다시금 녹색 빛들이…. 이번에는 수백 개가 보였다.

*

천후가 본거지로 홀로 들어가는 동안, 마스터들은 가르간츄아 바실리스크를 상대하기 위해서 모였다.

“어린 사람들은 뜨겁네.”

“음? 아. 그, 그게.”

마지막으로 나눈 애정 표현을 보고 제이나가 은근히 말하자 강호는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 제이나는 그런 그녀의 가슴 끄트머리를 검지로 쿡 찌르며 말했다.

“호호. 너무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마. 남자를 사랑하는 게 뭐가 나빠?”

“그, 그렇습니까?”

“응. 그럼~! 동양인은 너무 애정표현이 인색하다니까. 저런 거 나쁘지 않아.”

집안에서야 뛰쳐나왔지만, 아직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 남아있는 강호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잖아. 그럴수록 더욱 확인해야지.”

이런 상황. 그녀의 말에 강호는 다시금 표정을 굳혔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가르간츄아 바실리스크가 나타난 즉시 터진 게이즈 어택의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피아 구분 따위 없이 인간을 도살하는 디제스터의 특성상, 석화로 기동력을 완전히 상실한 군인들은 완벽한 희생양 그 자체였다.

근처로 도착해보니 과연.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재래식 병기에 면역성을 갖춘 바실리스크는 무슨 공격이 날아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뛰고 있었다. 그걸 현장에 투입되어있던 일리미네이터와 유그드라실 마법사가 총동원해서 주의를 끌며 추가 피해를 방지하고 있었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현장에 도착한 패트릭이 안소니에게 묻자, 그는 한층 늙은 것 같은 얼굴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 더 말할 게 있나. 최악이지. 멸급 디제스터는 생각도 못 했으니 제대로 팀을 짜놓은 것도 아니고. 병력이 섞여 있으니 우리도 마음껏 공격을 못 하고…. 그나마 석화 해제가 가능하다는 게 천만다행이군.”

“…….”

다행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게…. 석화 해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낸 순간, 돌이 된 병사들은 아직 ‘살아있는’ 상태. 그들이 죽지 않게 하려면 그만큼 공을 들여야 했다.

게다가 저놈은 눈만 번뜩이면 수십이고 수백이고 석화시키지만, 푸는 쪽은 상당한 소모를 각오한 행동이다 보니 교환이 안 된다.

“여기에 아직 엘모세와트의 마법사가 던전 내부에 섞여 있어. 그 약병으로 풀어대는 파급 디제스터도 마찬가지고. 집중이 분산되고 있네.”

어린아이들이라지만 나오는 화력은 별 차이 없다. 디제스터 하나보다 이렇게 중간중간 날아오는 마법들이 캐스팅 시간이 필요한 일리미네이터들에겐 더욱 위험했다.

“어쩔 수 없군요. 그렇다고 잡지 않으면 이 밖으로는 나갈 수도 없으니까…. 화력은 모였으니 해결을 봅시다.”

화력. 이것만은 확실히 갖춰졌다. 지금 여기에 모여서 있는 정규 공격대 마스터 4명의 화력만 합쳐도 정규공격대 하나의 화력에 버금가는 화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에 더해서 현장에 투입된 일리미네이터까지 제대로 통제할 수 있다면야, 아무리 던전화 멸급 디제스터라도 잡아내지 못할 건 아니다.

“좋네. 그럼 역할을 나누지. 일단 상황이 복잡하니 통합 통제는 포기. 공격대별로 따로 통제하도록 하고, 유그드라실 쪽은 석화 해제. 그리고…. 미스 리에겐 저 아이들의 제압을 맡겨도 괜찮겠나?”

“네? 괜찮겠습니까? 석화를 사전 차단하지 않으면…….”

“내 생각엔 석화도 위험하지만, 엘모세와트의 아이들 쪽이 훨씬 위험하네. 자네나 DS처럼 적당히 힘을 조절해서 사람을 제압할 수 있는 이들은 드물어. 차마 반격하지 못하고 당하고 있는 이들도 많네.”

“…….”

잠시 망설이던 강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진리구현자 특성을 갖춘 강호는 가르간츄아 바실리스크의 주요패턴 중 하나를 완전히 틀어막을 수 있는 특수 자원. 그걸 안소니나 다른 이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아이들을 우선시하기로 정한 것이다. 이 선택으로 짊어질 리스크는 끔찍할 정도지만, 그들은 망설임이 없었다.

“새로운 시대란 거. 그 친구 혼자서만 열 순 없지. 사람 몸은 하나니까. 그러려면 결국 우리도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가게.”

강호는 멍하니 안소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조부에게 워낙 시달리고 살아왔기 때문에, 사실 기성세대에 대한 편견이 없잖아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보게 될 줄은 몰랐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허리를 깊게 굽힌 그녀는 순간 선이 되어서 저편으로 날아갔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스컬린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영감님. 너무 혼자 생색내는 거 아닙니까? 누가 들으면 혼자 목숨 건 줄 알겠어요.”

“으, 응? 어험어험. 아니 나이 먹고 좀 무게 좀 잡아보세.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무게라면 제 위에 올라탔을 때 잡아도-”

“자! 시작하지!”

스컬린의 말에 칼처럼 돌아선 안소니는 그대로 가르간츄아 바실리스크를 상대하기 위해 날아가 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이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기. 자기는 다 좋은데 이미 커밍아웃한 사람한텐 너무 솔직한 게 탈이거든? 영감님 무서워하잖아.”

“뭐가 어때서요. 원래 인생은 전력으로 사는 겁니다.”

싱긋. 깔끔한 마스크로 웃는 걸 떨떠름하게 바라본 제이나도 결국 머니 크래프트 쪽으로 위치를 잡았다.

아주 잠깐의 말장난은 끝났다.

이제 저기서 날뛰는 괴물을 상대할 때다.

============================ 작품 후기 ============================

소제목 오타가 나서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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