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65화 (265/324)

265화

<영웅 갈구의 마리오네트>

복부에 구멍이 뚫렸다. 사전 동작조차 없이, 무영창으로 날아온 공격에 몸이 꿰뚫린 것이다.

“커헉…!”

물론 이 정도로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다. 검은 세 자매까지 나오지 않더라도, A 랭크 강화마법이 걸린 그의 재생능력은 강력한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공격력은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안에 있는 것은 라즈베리 하나뿐이 아니었다. 10살가량부터 라즈베리와 비슷한 나이까지…. 수많은 갈색 머리의 소녀들이 방안에서 녹색 안광을 띄우고 있었다. 천후는 그 방출되는 오오라를 통해 그녀들이 전부 마법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감히 파파가 있는 곳까지 찾아오다니. 너무 지나쳤어. 죽어줘야겠네.”

“라, 라즈베리.”

“내 이름은 레졔나라니까?”

짜증을 낸 라즈베리의 손끝에 오오라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그에게 날아왔다. 그 사전 동작을 보고 피해내자, 그녀는 회유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와아. 역시 싸부. 대단하네. 그럼 이건 어때?”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똑같이 그에게 검지를 겨눴다.

푸콰콰콱!

“크아아아악!”

아무리 그라도 이 많은 걸 다 피하긴 어렵다. 랭크가 낮은 공격들은 튕겨 나갔지만, 수가 워낙 많다 보니 그의 몸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너무 큰 상처를 입은 천후는 피를 게워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바로 그때였다.

“레졔나. 잠시 멈추거라.”

라즈베리의 뒤편.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쇠를 긁는 듯이 시끄러우면서도 변화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특이한 목소리였다.

“왜? 파파? 이게 있으면 우리들 빠져나가기 너무 귀찮아지잖아.”

“그와는 잠시 해야 할 말이 있다.”

“흐응. 멈춰.”

그의 말에 라즈베리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그러자 오오라를 끌어올리며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던 소녀의 몸에서 빛이 꺼졌다.

“…….”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천후는 입을 다물었다. 라즈베리를 닮은 그 소녀들은 하나같이 눈에 초점이라곤 없이, 일방적으로 그녀의 말에 따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뵙는군. 드래곤 슬레이어.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기구할 뿐이야. 내 딸의 실수 하나가 내 평생 숙원을 흔들어버렸군.”

“윽….”

남자의 말에 레졔나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고개를 떨궜다. 아주 잠깐 잔류사념에 몸을 맡겼던 결과가 이렇게까지 크게 번질 줄은 그녀 역시 생각조차 못 했다.

간신히 상처를 어느 정도 수습한 천후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바라보았다. 소파에 앉은 남자는 여전해 고개를 떨구고 있어, 이렇게 보고 있으면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분명 말을 하고 있긴 한데, 턱이나 어깨 등이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

“당신이…. 엘모세와트의 수령인가?”

“그렇네.”

망설임도 없이 긍정하는 말에 천후의 오오라가 들끓어 올랐다. 그것을 보며 라즈베리와 아이들의 몸에서도 다시 녹색의 오오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에게 무슨 용무가 있단 거지? 난 당신과 나눌 말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그렇겠지. 하지만 한 번 들어보게. 그렇게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

그 말이 끝난 직후…. 갑자기 위쪽의 모니터에 전원이 들어오더니 거기에 뭔가 화면이 뜨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PPT였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이뤄낸 성과 등이 보기 좋게 정리한 데이터들.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네. 우리 손을 잡지 않겠나?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자네의 도움이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발전할 수 있을 거네.”

“…….”

“알고 있나? 일리미네이터가 등장하고 난 이후부터 오히려 마법사를 구매하는 자들은 늘어났다네. 그들이 진정한 힘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거든. 그 일리미네이터의 정점에 있는 자네가 우리와 협력해준다면, 좀 더 제대로 된 세일즈를 할 수 있게 될 거야.”

“세일즈?”

“그래. 세일즈. 어떤 사업을 하든지 계기는 중요하지. 아무리 좋은 물건을 팔고 있다 하더라도, 소비자가 알아주지 않으면 팔 수가 없어. 하지만 자네가 우리의 광고모델이 되어준다면. 자네를 통해서 우리를 선전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지.”

톤 변화 하나 없는 목소리가 내놓는 말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지금 천후를 보고서 ‘자. 마법사는 이렇게 강력하고 대단하며, 여러분의 삶을 윤택하게 해줍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1가정 1마법사를 들여놓으시는 건 어떨까요’하고 춤을 춰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 대신 코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천후는 그 전에 다른 것을 물었다.

“…당신들이 가진 물량으론 어림도 없을 텐데?”

그 말에 화면에는 그들의 생산라인으로 한 해에 찍어낼 수 있는 마법사의 수가 떴다. 거기에 제시된 숫자는 확실히 전 인류가 마법사를 ‘소유’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말했다.

“그렇기에 자네가 더더욱 필요하지. 마법사의 대표자 격인 자네만 있다면 유그드라실의 방해를 무시하고서 국가와 연동해 마법사를 특정해서 더 대규모 플랜트를 굴릴 수 있을 테니까. 그걸 운영하는 방법은 이미 준비가 되어있네. 규모만 늘릴 수 있다면 완벽해. 세 세대가 지나기 전에 세상 모든 사람은 마법사를 사용할 수 있게 될 거야.”

그 말에 천후는 이번엔 코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목소리만 입에서 나왔다.

“공평하게 말인가?”

“그렇네. 공평하게. 어떤가?”

우웅. 우웅. 소녀들이 은은히 내뿜는 오오라가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조명을 대신한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그 남자는 미동 하나 없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복을 기다리고 있던 천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준 덕분에 몸 상태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그의 시선은 라즈베리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 그와 함께 살던 때에는 전혀 본 적이 없는 얼굴. 과연…. 그녀는 라즈베리 미키스트리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천후는 그녀가 왜 그리도 영웅을 갈구했는지를 깨달았다.

파칙. 파칙. 흑색 영기에 뒤덮인 그의 몸에서 백색의 빛무리가 점멸하며 소리를 냈다. 그 상태에서…. 천후는 주먹을 움켜쥐며 외쳤다.

“개소리 집어치워!”

우웅-우웅-우웅-

그들이 있는 공간 안을 포효가 휩쓸었다.

*

단 한 번. 사람 하나가 소리를 지른 것만으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지하시설 내부가 떨렸다. 그 서슬에 오오라를 피워올리고 있던 아이들의 기세가 움찔하고 잠시 꺾였다. 심지어 앞에 있던 라즈베리마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몸을 움츠릴 정도였다.

하지만 천후는 그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소리쳤다.

“내가 네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어울려 줄 것 같나? 뭐? 플랜트? 확장이 어째? 지금….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짓거리를 더 크게 벌이자고? 웃기지 마! 내가 너에게 할 건 단 하나다! 지금 여기서! 네 모든 걸 끝장내는 것!”

흑염의 기세가 점점 커진다. 그 위세에 아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동안 천후는 천천히 주먹을 앞으로 가져오며 싸움을 준비했다.

라즈베리가 강적이긴 하지만…. 이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에게 당해낼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그녀를 제압하고 저 노인을 잡아들이면!

그렇게 판단하고 있을 때였다.

“물론. 나도 자네가 쉽게 받아들일 거란 생각은 안 했네. 동의를 얻는 게 가장 좋지만, 못한다면 제2안으로 가는 수밖에.”

아쉽다는 말을 하면서도, 말투는 여전히 톤 변화 없이 평온했다. 그 덕분에 천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잠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잠깐 사이가 문제가 되었다.

키잉-

“컥…!”

갑자기 뇌 속을 비수로 쑤시는 것 같은 통증에 천후는 비명을 내지르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오오오오오오오………

낮은 소음과 함께 노인 뒤에 놓여있던 관을 연상시키는 물체에서 라즈베리와 같은 녹색 오오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오오라는 관에 연결된 두꺼운 전선을 타고 연결되더니, 곧 방 안에 있는 모든 아이들과… 천후에게 연결되었다.

“이…이건…!”

찌잉. 찌잉. 아픔이 계속된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뒤집고 경련한 천후는 제대로 된 말조차 자아내지 못하면서 몸을 뒤틀었다.

‘S…. S 랭크 정신계열 마법사…!’

고통을 당하면서도 천후는 이 힘의 정체를 눈치챘다. 이것이야말로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정신지배를 걸어온 주체. S 랭크 마법사의 힘임을.

“아, 아아아악…!”

두개골을 따서 숟가락으로 뇌를 파내면 이렇지 않을까?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고통에 천후는 경련했다. 그 사이로 고개 숙인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힘은 인간의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포기하게나. 곧 편해질 거야. 그 뒤엔 그저 하는 말을 받아들이면 될 뿐이네. 자아.”

노인의 목소리에 천후는 낭패라고 느꼈다. 이전 경험을 생각해보면, 그는 정신계열 마법에 약했다. 완전히 타인에게 몸을 빼앗겼던 적도 있지 않던가? 그뿐만 아니라 그냥도 종종 그를 유혹하는 이상한 소년을 만나기도 했고.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닌 게야. 우리에겐 언제나 좋은 ‘종마’가 필요했는데. 자네는 거기에 들어맞겠군.”

‘시, 실수다….’

정신계열 마법사의 존재를 알았으면서도 이곳에 홀로 온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적어도 이강호만이라도 함께 왔다면 이런 일은…!

‘아니… 잠깐….’

그렇게 생각하던 천후는 그러다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통증은 대단하다. 대단하지만…. 그것뿐이다. 그를 강제하려는 속삭임이라던가. 그런 것들은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윽… 워…원래 이런 건가?”

“음?”

어느덧. 그의 곁에는 검은 삼 자매 중 하나가 나와서 아리아를 내지르고 있었다. 그와 함께 머릿속 통증이 조금씩 약해졌다.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지만 익숙해진 느낌?

방금까지 거품을 물뻔했던 그는 이제 와선 가볍게 인상만 찌푸리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지?”

노인의 말과 함께 관에서는 좀 더 강력한 오오라가 뿜어져 나와 천후를 덮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오오라만 연결되었을 뿐 이미 한 번 저항해낸 정신계열 마법은 어느새 그에게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당신들의 힘은 나한텐 안 통하는 모양인데.”

“…….”

지금까지 기계적인 화법을 구사하던 노인도 이 사태 앞에선 어이가 없는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마지막으로 쿡쿡 찌르는 듯한 두통마저도 흩어내 버린 천후는 노인보다 좀 더 극적인 감정 변화를 보이고 있는 라즈베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경악한 얼굴을 한 그녀는 오오라를 끌어올리며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걸 보며 천후는 쓰게 웃었다.

“그 얼굴은 몇 번 본 적이 있는 걸.”

“…! 웃기지 마!”

쿠오오오옷! 소리침과 함께 그녀의 손에서 방출마법이 뿜어져 나왔다. 이대로라면 그가 들어왔던 통로를 깔끔하게 날려버리고 말리라.

하지만 그 순간, 천후의 몸 주변을 맴돌던 빛무리들이 그의 팔목에서부터 빙글빙글 돌면서 그의 손끝에 모이기 시작했다. 천후는 그렇게 손끝에 백열이 생겨나자 그대로 날아오는 녹색 섬광을 후려쳤다.

푸콰아아아아악! 그 손짓에 맞은 섬광은 그대로 방향이 꺾이면서 천장을 대각선으로 뚫고 올라갔다

“아, 아?!”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라즈베리는 깜짝 놀라서 말도 제대로 못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후는 가만히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S 랭크는 5년 동안 못쓴다더니.’

알자드 때부터 보이기 시작한 이것의 정체를 천후는 슬슬 눈치채고 있었다. 이것은 SA 랭크 신위를 걸었을 때 접한 그 정신 상승의 여파. 신위의 정규 사용법을 익히자 부가적으로 따라온 것이다.

임시 신위라고 해야 할까? 굳이 온몸에 시뻘건 불꽃 스펠 세이브 한꺼번에 터트리며 안 둘러도, 강화마법에 일정 수준 따라오게 된 것이다. 조금 문제가 있다면 이게 정신적인 부분에 좀 영향을 받아서, 나올 때가 있고 안 나올 때가 있단 건데.

‘적어도 지금은 걱정 없지.’

지금 천후는…. 정말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머리끝까지 열 받아본 적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은 에바 때. 생각해보면 그때도 정신의 영향을 받아 A 랭크의 통제가 완전해졌다.

못 해먹을 일이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았다.

“이걸로 말 안 듣는 제자 엉덩이 좀 때려줄 수 있겠군!”

“이게…! 까불지 마!!!!”

빛무리에 대응해, 녹색 오오라가 다시금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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