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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266화 (266/324)

266화

“장난삼아서 싸부라고 불러줬더니 내가 진짜 그 부스러긴 줄 알아? 공격해!”

라즈베리의 외침과 동시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의 몸에서 다시 한 번 오오라가 피어올랐다. 이들의 랭크는 다들 다르지만, 이 정도 모이면 어지간한 공격대 하나는 씹어먹을 화력이 나온다.

‘라즈베리 상태를 생각해보자면 저 아이들도 망설임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의 화력이 집중되면 입구 쪽이 위험하다. 순식간에 판단을 끝낸 그는 벽면을 차고 뛰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초록색 오오라들이 그의 뒤를 쫓았다.

콰르르릉. 콰콰쾅! 몇 발 박히지도 않았는데 엄청난 진동이 울리며 천장에서 자재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걸 날카롭게 바라보던 라즈베리는 손을 수평으로 들어 올리며 공격을 멈췄다.

“치. 짜증 나게 구네. 파파한테 먼지가 떨어지잖아. 그만. 이렇게 하면 안 되겠어.”

제법 넓은 공간이긴 했지만, 마법사의 풀 캐스팅 급 화력을 계속 견딜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특히 저 중앙에 있는 관. 거기로 연결된 전기 시설들은 한눈에 봐도 중요해 보였는데, 이런 핵심시설 내부에서 전투를 지속하는 건 그리 달갑지 않았다.

“파파. 장소를 옮길게.”

“그러거라.”

“뭣?”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에 천후는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의 의아함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합!”

그녀의 짧은 기합성과 함께 천후는 갑자기 눈이 핑글 도는 것을 느꼈다. 상당히 익숙한 감각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텔레포테이션 시스템을 사용할 때의 감각 그대로였으니까.

“윽?!”

놀란 천후는 마법에 저항하려 했지만,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그가 있는 곳은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알프스의 능선 위였다.

“이런…….”

텔레포트 같은 마법은 수혜자가 강하게 저항의사를 가지면 완전히 저항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강제로 이동시킬 수 있다니? 엄청난 능력이다.

‘이 오오라 연결 때문인가?’

정신 지배는 완전히 실패했는데도 그의 몸에는 희미한 녹색 오오라가 남아서 그녀들과 연결되어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라즈베리와 그 공간에 있던 다른 아이들까지 전부 함께 이동해 있다. 이 연결 상태에서 이동을 바라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머릿수가 많다 보니까 가능했던 조화인 모양이었다.

이걸 다르게 말하자면, 아이들을 버림패로 사용할 마음만 먹는다면 고체 안에 끼게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응용할 수 있단 것이라, 천후는 극도로 경계심을 높였다.

지금의 라즈베리는 사람을 죽이는 데 그리 거리낌이 없는 상황. 당장 그녀가 힘을 발했을 때 쳐내지 않았다면 그의 뒤에 있던 배양실이나 브리딩 룸이 깔끔하게 날아갔으리라. 그럼 정말 어떤 극단적인 전술을 사용해도 이상하지 않다.

“자. 그럼 싸부. 어디 내 엉덩이를 때려보지그래?”

가늘게 웃는 모습이 묘하게 매력적이다. 이 추위에도 흰색 반소매 브이넥 티에 스키니 진을 입은 그녀는 정말로 자기 둔부에 손을 가져가 보였다.

“…….”

라즈베리가 버릇없이 굴 때가 없진 않지만, 저런 모습을 보이는 적은 없었다.

아. 한 번은 있었던가? 하지만 그때도 저런 웃음을 지은 적은 없었다. 정말로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 걸까? 천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계속 까부는데, 라즈베리. 내 손맛은 생각보다 맵다.”

“하하앙. 그러셔? 쳐!”

비웃음으로 답한 라즈베리가 외치자 이번엔 정말로 초록빛으로 세상이 휩싸였다. 그가 있던 자리, 그가 이탈할 모든 방향에 공격이 전부 꽂힌다.

아무리 그가 소리보다도 빠르게 움직인다지만 모두 피해내기엔 너무나 어려운 공격들. 그중 하나에 격중당한 천후는 그대로 설원 위를 물수제비하듯 몇 번이고 튕겨나갔다.

“큭!”

공격이 너무 많다. 게다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공격이 순차적으로 날아오며, 튕겨나는 이 와중에도 빛이 따라오고 있었다.

쿠르르릉! 비탈에 산사태를 일으키며 자세를 회복한 천후는 그대로 뛰어올랐다. 그것조차 예상했는지 그 회피 경로에도 공격이 미리 깔려있었다. 이것까진 어쩔 수가 없어서, 천후는 다시 한 번 빛무리, 부분 신위를 끌어올렸다.

“흡!”

파팍! 파치칙! 날아오는 광선을 쳐내버린 천후는 그대로 전격이 되어서 아이들에게 달려들었다. 아이들을 주특기 별로 뒤섞어 놓은 걸까? 그중에서 강화계인 것 같은 아이들이 쏘아져 들어왔다. 그렇지만 랭크 차도, 신체능력 차이도 너무 크다!

“미안하다!”

“아윽!”

순식간에 쵸크로 달려든 아이를 기절시킨 천후는 다른 아이가 하이 킥을 연달아 차오자 그걸 가볍게 왼손으로 받아내면서 그 아이 역시 경추를 쳐서 기절시켰다 말이 쳤다지, 예상되는 재생력을 고려해서 죽지만 않게 손봐준 수준이라 죄책감이 엄청나다.

“아. 정말 쓸모없네.”

바로 그때. 저편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위력의 방출마법이 그에게 날아왔다. 일부러 8줄기로 나눠서 날아온 그것들을 본 천후는 깜짝 놀라서 그대로 회피기동을 했다. 어느 정도 유도 기능까지 달린 그것들은 그를 위로 도망치는 것까지 따라오다가 간신히 하늘 저편으로 날아갔다.

“후우…….”

부분 신위를 재사용하는 데엔 시간이 걸리는 상황에서 저런 걸 몸으로 받았다간 위험하다.

‘그런데 유도기능이라.’

그녀의 방출계 마법의 형태는 순수한 에너지 방출계열. 명중률을 염려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이렇게 근접 교전을 하고 있을 때 같이 쓸어버렸다면 오히려 위력도 더 강하고, 맞을 확률도 더 올랐으리라. 그런데 이렇게 행동한단 건….

“라즈베리! 정신 차려! 아직 기억이 남아있는 거지?”

쩌렁쩌렁. 설산 한가운데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라즈베리는 인상을 썼다.

“하아? 무슨 소리람. 아. 설마 애들을 피해서 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야? 바보 같네. 별로 그 애들 목숨을 아낀 게 아니거든? 걔들이 다 파파의 상품이라 부서지면 아까우니까 그런 거지.”

“…….”

“흐응. 그런 불쌍한 얼굴 하지 마. 그래도 안 봐줄 거니까. 근데 정말 도움 안 되네. 오히려 수가 많으니까 거슬리기만 하고. 차라리 다른 방향으로 쓰는 게 낫겠어.”

“뭐? 무슨….”

“이런 뜻이지.”

천후의 물음에 라즈베리는 가볍게 답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 순간…. 아이들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오오라가 모였다. 공간을 넘어 초록빛 오오라가 사슬처럼 엮이며 그녀에게 엮였다.

그는 이 광경이 낯설지 않았다. 아니…바로 얼마 전에 상대하지 않았던가? 바로 이런 상대를.

“스펠 쉐어라고? 어떻게…그건 보통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나?”

천후가 놀라서 소리 지르자, 라즈베리는 깔깔 웃었다.

“응? 아~. 맞아. 싸부가 알자드를 잡았다고 했지? 후후후. 맞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알자드의 결과지. 마마의 힘이 함께 하는 나는 동생들의 힘을 전부 연결해서 쓸 수 있거든?”

그 결과를 말해주듯…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오오라가 하늘 끝까지 치솟으며 일렁였다. 라즈베리는 그 전능감에 몸을 떨면서 손을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스펠 쉐어가 연결되어 능선에 주저앉아있던 아이들이 한꺼번에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런데도 쉐어 상태는 유지된다. 물리적인 거리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놀라고 있을 때. 갑자기 라즈베리가 그를 손가락으로 겨누며 말했다.

“자아. 그럼 싸부. 시작해볼까? 하지만 그 전에. 싸부의 그 반짝반짝은 너무 거슬리니까…. 없어져 줘야겠어!”

“!”

깜짝 놀란 천후가 몸을 피했지만, 그녀의 손에선 에너지 투사체가 날아오진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가락이 그를 한 번 지정하자, 천후는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전투를 치를 때 자연적으로 따라오곤 하던 기묘한 고양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그것에 놀란 천후는 곧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그의 몸 주변을 돌아다니던 빛무리가 깔끔하게 사라져있었다.

*

알프스 산맥 중턱에서 피어오른 오오라는 주변 전역을 덮었다. 멀리서 보고 있자면 오로라라도 피어오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빛. 보통 사람은 계속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력이 상하리라.

그 속에서 갈색 머리의 여자가 하늘에 뜬 채 천천히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레졔나는 말이지. 원래부터 저하계열 주특기 마법사란 말이지. S 랭크의. 아아. 지금껏 힘들었어. 방출마법사 흉내를 내느라.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숨길 필요도 없겠지? SA가 나서면 뭐 어쩔 수 없는 거니까.”

“…….”

공식적으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S랭크 마법사는 유그드라실의 고위 간부들 외에는 없었다.

천후는 이 때문에 아마도 SA 랭크들이 존재했을 때는 레졔나처럼 S 랭크 이상의 마법사가 공개적으로 나타나면 그들에게 개입해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엘모세와트도 같은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SA 랭크 마법사의 부재는 함부로 알려선 안 되겠구나.’

그게 실제로 억제력이 되어서 이런 괴물 같은 힘을 지금까지 숨겨오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니.

하지만 그가 놀랄 시간은 그리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하늘로 솟아 있던 라즈베리의 손이 가볍게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녹색의 검. 하늘 끝까지 치솟아 있던 오오라가 일자로 떨어져 내렸다.

쿠………쿠오오오오오오!

알프스 산맥의 등뼈에 쌓여있는 눈들이 하늘 높이 비산하며, 산사태 정도가 아니라 산 자체가 무너져 내린다.

신이 직접 세상에 현현해서 그 검을 내려치면 이런 느낌일까?

“크…크헉…!”

모션을 보는 순간 최대한 몸을 움직였지만, 그것만으로 다 피해내기엔 범위가 너무 넓었다. 그 끄트머리에 스친 것만으로도 신체의 일부를 잃은 천후는 라즈베리가 부린 조화의 결과를 보고서 눈을 치켜떴다.

미친. 제정신이 아닌 화력이다. 스펠 쉐어 효과를 받은 라즈베리의 방출 마법은 이미 천후의 방어력을 우습게 넘어서고 있었다. 게다가 그 효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하. 이제야 빠져나왔어?”

그녀가 손을 벌리자, 이번엔 전형적인 에너지 투사체가 날아온다. 워낙 거대하지만 그것은 어떻게든 피해냈다. 하지만 그것을 등 뒤로 흘린 그 순간, 투사체가 허공으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안면 바로 앞에 다시 나타나 있었다.

콰아아아앙! 그대로 얻어맞은 천후는 그대로 지상으로 떨어져내려 땅에 박혔다. 제대로 허용한 단 한 번의 공격. 그것만으로 이미 검은 삼 자매가 전부 나와서 반 시체가 된 그를 복원 시킨다.

“이렇게 연결하면, 레졔나는 내 동생들의 주특기를 모두 공유할 수 있어. 전부 주특기 수준으로 사용할 수 있지. 자매끼리라서 가능한 특혜랄까? 자. 어때. 이제 좀 정신이 들어? 히어로?”

“크윽….”

“아하하하. 라즈베리? 응! 아직 있어. 내 머릿속에. 따끔따끔하게 하고 있어. 하지만 그냥 그거야. 두통일 뿐이지. 걔는 항상 히어로를 찾더라?”

파아아앗!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오오라가 사방으로 쏟아진다. 그것들이 전부 허공에 사라지더니 전방위에서 천후를 노린다. 그것들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흑염이 수저로 파먹은 푸딩처럼 사라지고, 그때마다 그에게 붙어있는 정체 모를 것들은 소리를 내지른다.

“하하! 약해! 이런 게 걔가 기다리던 히어로야? 웃기고 있네!”

그래. 정말 웃기고 있다.

아직 그녀에겐 여유가 넘친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서 당장 저걸 개미 짓밟듯이 밟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째지며 울린다.

“히어로는 무슨 히어로야! 이제 와서 무슨 그런 걸 바라고 있냐고! 그런 게 있다면! 그런 걸 하고 싶었다면 좀 더 빨리 나타났어야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아? 이미 모든 게 늦었어!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모든 게 끝나있었어.

그 모든 건 어차피 헛된 바람일 뿐이지. 이제 와서 뭐가 된다는 건데.

거칠게 소리 지르던 그녀는 그러다. 자신의 말이 조금 이상해졌단 것을 깨달았다.

아아. 그래. 이것은….

머리가… 따끔거린다.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눈에서 액체를 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방해돼! 사라져!”

일갈과 함께, 그 아주 미약한 느낌조차도 쉽게 흐트러지고 만다. 그 덕분에 아주 잠깐 공격의 고삐를 늦췄던 그녀는 천후를 찾았다.

그녀에겐 다행히도 그는 방금 포착했던 장소에서 멈춰있었다.

두르고 있던 흑염이 흩어지고…. 완전히 보통 사람으로 돌아온 채로.

“흐음? 뭐야. 힘이 다한 거야? 항복?”

자발적으로 항복한다면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파파’는 이 남자를 종마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살려둬야지. 머릿속이 따끔따끔 거리는 와중에도 레졔나는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천후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아니. 그럴 생각은 없어.”

“뭐? 그럼 자살할 생각? 뭐 힘을 쓰고 있나 없나 똑같으니까 상관은 없나?”

시시한 결과다. 라즈베리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눈에서 흘러나오는 이 쓸데없는 액체가 시야를 가로막긴 하지만, 어차피 큰 어려움은 아니다. 이제 아무런 힘없는 인간 하나 눌러 죽이는 것은.

그런데도. 치켜든 그녀의 손은 어째서인지 떨어지지 않았다.

이것 역시 두통 때문에? 알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원인을 찾는다.

그것 역시 간단했다. 그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 희망이 말한다.

“확실히…. 너무 늦었을지도 몰라.”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은 슬픈 어조.

“그래. 너무 늦었어. 나타날 거면 10년. 아니 20년 전엔 나타났어야지. 이제 와서 나타나 봐야 의미가 없어.”

그에 맞받아. 모든 것을 포기한 인형이 말한다.

매체의 영웅은 언제나 꼭 맞는 순간. 히로인이 비명을 지르는 그 순간에 정확히 맞춰서 나타나 주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부조리에 휩쓸린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언정.

“나는 네가 바라는 그런 완벽한 영웅은 아니야. 그렇게 되지도 못할 거야. 하지만.…. 그래도.”

스륵.

오른손을 가볍게 얼굴 옆으로 가져온 그는, 반 누더기가 되어있는 팔뚝의 천을 뜯어내, 그것을 옆으로 던지며 말했다.

“지켜봐 줘. 나의… 변신!”

“아…!”

또 하나의 빛무리가.

하늘 끝까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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