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쿠우우우….
홍염이 치솟아 오른다. 그것은 하늘을 가린 구름을 뚫고서 높이 높이 솟아올랐다.
알프스의 등뼈를 강타했던 초록의 검과 이 힘의 방출로 인해…. 지면의 눈이 튀어 올라 눈보라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한다.
그 안에서 소녀가 말했다.
“뭐…뭐야! 그걸 본 거야?”
천후가 방금 한 그 대사는 ‘그녀’의 베스트 콜렉션에 있는 히어로물 주인공의 대사였다. 그러면서도 포즈는 DS 가디언즈의 주인공의 포즈라니?
당황한 목소리에 천후의 입가에 가볍게 미소가 걸렸다. 그걸 본 소녀는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의 뜻을 인지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거슬린다. 뭐지? 따끔함은 이제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를 본 순간부터…. 아니. 조정이 끝난 이후로도 조금씩 느끼고 있던 미세한 감각.
이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거슬려!
“뭐가 변신이야! 스물하나나 먹어서는!”
나오는 말은 엉망진창이다. 애초에 내가 그의 나이를 어떻게. 왜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알긴 하지. 조정을 받은 이후에도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도는 정보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뭐랄까. 전해 들은 수준에 지나지 않는데.
혼동감에 라즈베리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오오라가 흩어지며 다시 한 번 공간을 격해서 그를 압박해 들어간다.
“흡!”
하지만 이번엔 그리 쉽지 않다. 홍적은 흑염 상태 때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며 자신의 위치를 바꾸면서 자신에게 직격할만한 공격만 확실하게 주먹으로 요격했다. 여러 발로 나누면서 위력이 약해진 투사체는 그의 주먹에 닿자 폭음을 터트리며 사라졌다.
“칫! 신위….”
저것의 정체를 안다. DS만의 고유기술. 여러 번의 강화마법을 중첩, 강제 점화해서 한 단계 높은 랭크의 마법을 발휘해주게 하는 술수. 디버프를 유지하는 상황인데도 저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얼마나 갈까!”
여러 개의 마법을 때려 박는 기술. 본질적으로 들어가 보자면 그만큼 소모가 큰 기술이다. 그렇다면 장기전이 되면 승산은 자신에게 있다. 가늘게 웃은 라즈베리의 손가락이 그에게 향한다.
쿠화아아악! 그와 함께 지금까지 나눠서 날아가던 빛이 일점에 집중되어 그를 덮쳤다.
“그런 공격은-”
그러나. 말보다도 빠르게. 그녀가 겨누는 동작을 취함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똑같이 초가속 상태에 들어간 라즈베리는 빠르게 눈으로 그를 찾았다.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안 통해!”
벌써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으니까.
“다크 드래곤 슬래쉬!”
촤악! 번개처럼 날아든 그의 손날이 수평을 내긋는다. 그 동작의 시작점을 본 라즈베리는 급히 하강. 그와 동시에 허공에 적색 선이 한일자의 궤적을 남기며 공기를 찢어 갈랐다.
“뭐가 다크 드래곤 슬래쉬야!”
일부러 기술명을 외치면서 싸우다니. 미친 짓거리다. 캐스팅이 오히려 방해받지 않는가? 하지만 천후는 그대로 그녀에게 떨어져 내리며 다시 한 번 외쳤다.
“드래곤 다이브!”
“아, 진짜!”
인상이 굳는다. 기술명은 웃기지만, 같은 강화마법이 걸린 상태에선 신체조건과 근접전의 익숙함은 격이 다르다. 여러 번 보지 않았던가? 강화마법조차 걸지 않고도 무슨 야생동물같이 움직이는 모습을.
그것을 떠올린 순간 그녀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쿠콰콰쾃! 홍적이 떨어져 내리며 산사태를 일으킨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몸을 반전했다. 그 자리에서 사라지며 빗나갔다. 자유자재로 공간이동을 사용하는 그녀에게 이런 큰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다시금 거리를 벌린 채 예의 녹색 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손날을 하늘로 치켜든 채 외쳤다.
“칫! 싸부. 나이 먹고 그러는 거 부끄럽지도 않아?”
“부끄럽다. 죽을 거 같아.”
“그럼 그만하지? 짜증 나거든? 그건 나 혼자 놀 때 속으로 외치는 걸로 충분하단 말야.”
“그럼 왜 만화까지 만들었던 거야?”
“그건-”
웃으며 대답하던 라즈베리는 그러다 표정을 굳혔다. 지금의 자신은…. 이상하다.
‘경계’가 무너져 있었다.
자신. 례제나와.
불필요한 그녀석. 라즈베리를 나누는 경계가.
의식적으로 봉인해두었던 기억이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마치 본래 둘 다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던 것처럼 작용하고 있었다.
“아….”
좋지 않다. 이건 좋지 않아.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이변.
저 남자의 영향? 아니다. 분명…. 계기는 주었긴 하지만. 그것 뿐은 아니야.
“마마의 링크 때문에…?”
라즈베리가 유지하고 있는 이 스펠 쉐어 상태는 어머니…. 관에 봉인된 그녀의 중재가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 그걸로 ‘레졔나 시리즈’와 자신을 연결하여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것이 지금 그녀의 힘이 정체.
그런데…. 마마의 정신 계열 마법이 그에게 작용한 이후, 한번 연결된 링크는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음에도.
순간 레졔나는 그것을 천후가 유지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의 의식이 공유되어…흘러들어온다. 그것이 안 그래도 스펠 쉐어 상태를 유지하느라 불명확한 자신을 흔들고 있었다.
“당신…. 짜증나!”
이 상태가 길어져서 좋을 건 없다.
의식 저너머에서 들려오는 이 명확한 의지의 소리.
구한다!!!!
“으…!”
이 강렬한 의지가 그뿐만이 아니라 스펠 쉐어에 연결된 모든 레졔나 시리즈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지를 상실해서 자기 뜻이라곤 남아있지 않은 인형들이 부서진 심지를 모아, 구원을 갈구한다.
그 희미한 음성이 모여 그녀의 의식을 건드리는 것이다.
“시끄러워어어어엇!”
그녀는 그 검을 다시 한 번 내리쳤다. 하지만 홍적은 이번엔 그것을 훨씬 수월하게 피해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다크 드래곤 펀치!”
“그딴 기술 없어!”
귀찮아! 귀찮다! 단거리 공간이동을 하고, 아무리 공격을 내뿜어도 이 남자는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기술명을 외쳐댔다. 듣다 보면 듣는 쪽 얼굴이 시뻘개질 만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외쳐대며.
“하지 마! 하지 말란 말이야!”
그러지 마! 이제 와서 그러지 말란 말이야! 이상한 환상을 심지 마!
“이미 모든 게 늦었어! 당신은 ‘나’의 히어로도 뭣도 아니야!”
파슷! 바로 앞까지 다가와 날리는 손날을 공간이동으로 피해내며 그 자리에 똑같이 다시 나타난 라즈베리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에게 주먹을 내찔렀다. 이건 생각하지 못했는지, 그가 단박에 뒤로 튕겨 나갔다.
효과를 본 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이 1초에 수십 번씩 점멸하며 그의 주변에 나타나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사라져! 사라져! 사라져!! 사라지란 말이야!!!!”
이젠 필요 없어! 없어도 돼! 나에겐 파파만 있으면 충분하단 말이야!
나에게……
우리에게…!
“다른 희망을 보이지 마!!!!”
소녀의 입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하아아아아압!”
그러나 그 찰나.
그 절규를 집어삼키는 기합성이 그녀의 귓가에 파고들어 왔다. 순간, 소녀의 사고는 그 거대한 의지를 섬광의 이미지로 받아들이며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다.
그 극가속의 영역.
찰나의 틈새를 마주 보며-
그녀의 눈에서 물방울이 흘렀다.
*
[내 이름은 레졔나 그윈들링.]
<내 이름은 라즈베리 미키스트리.>
[내가 가장 처음 기억하고 있는 광경은, 예쁜 내 마마가 세상을 떠나는 광경이었어.]
<내가 가장 처음 기억하고 있는 광경은, 꽃밭의 저편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웃고 있는 광경이었다.>
[마마는 관속으로 들어가고 있는데도 파파는 얼굴을 비치지 않았지.]
<아무리 애를 써도 희뿌옇게만 떠오르는 기억. 하지만 나는 의문조차 가지지 않고 그 기억을 믿었다.>
[하지만 나는 파파에게 서운해하지 않았어. 대신 파파는 마마를 언제든지 만나게 해줬거든.]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생각나지 않았는데도.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집안의 추천이란 명목으로 알자드의 난민보호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관속에 들어있긴 했지만 말이야. 그리고 ‘이곳’에선 그것만으로도 축복이었지.]
<난민으로서는 아니었다. 일종의 봉사활동. 일리미네이터로서. 그리고 이곳에선 그것만으로도 축복이었다.>
[이곳. 내가 어릴 적부터 자란 이곳은…. 너무나 참혹하고 잔인한 곳이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이성을 마비시켜버렸지.]
<이곳. 난민보호소에서 사람들을 돌보다 보면…나 자신에 대한 의문은 빠르게 사라졌다. 하루하루를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다 보면.>
[나는 매일매일 너무나 무서웠어. 나를 닮은 아이들이 매일매일 자라나고 죽는 이곳이.]
<나는 매일매일 너무나 슬펐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보는 것이.>
[나는 파파와 마마사이에 태어난, 조직에서 유일한 S 랭크 마법사.]
<나는 이 난민보호소의 유일한 A 랭크 일리미네이터.>
[그래서 나를 함부로 건드리진 못했지만, 마마는 아니었어.]
<아무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지만, 내 마음은 점점 마모되어갔다.>
[마마의 난세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클론들은 곧 나의 자매 ‘레졔나 시리즈’가 되었지만, 그녀들은 내 성능을 따라오지 못했지.]
<그때부터였다. 히어로를 그리게 된 것은. 누군가. 이 모든 것을 구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으면 하고 생각한 것은.>
[그때마다 가운 입은 자들이 실망하는 소리가 나를 아프게 했어.]
<물론. 그런 것은 세상에 없었고, 나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생물이라 설까? 나는 점점 익숙해졌어. 파파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모습을 비춰본 적이라곤 없지만, 그런데도 나는 파파에게 잘 보이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좌절하고 있을 때였다. 알자드가 말했다. 때가 왔으니 ‘노블레스 클럽’에 타진해보자는 이야기를 한 것은.>
[하하. 정말…. 왜 이렇게까지 파파에게 집착하는 걸까. 음.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오리지널이긴 하지만, 나는 결국 파파와 마마의 딸인걸. 파파의 말에 거스를 수 없는 건 당연하잖아?]
<놀랐다. 그런 이들이 있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 A 랭크 일리미네이터의 집단. 게다가 한명 한명이 엄청난 부자들. 이들과 함께라면, 고통받는 이 사람들을 전부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순진한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점점 그렇게 무뎌져 가면서도… 결국 나는 견디지 못했어. 저 가운 입은 사람들처럼 두고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어. 그래서 도망쳤지. 밖에서 활동하고 싶다고.]
<도착한 노블레스 클럽의 연회장은 과연 대단했고, 뉴스에서나 보았던 정규 공격대의 마스터들을 보고 나는 흥분했다. 저들이야말로 히어로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들에게 나 자신이 가진 이상형을 투영시켰다.>
[당연히 그런 게 허락될 리가 없었지만, 그때만큼은 진심으로 모든 것이 싫어져서 날뛰었어. 그래서… 만날 수 있었지. 그날. 처음. 파파와….]
<그리고 그건 대단한 실수였다. 라이징 선의 마스터, 진구지 하야토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것은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파파는 처음 만났던 그 날도 똑같은 소파에 앉아있었어. 날 제대로 마주 봐주지조차 않았지. 하지만 나는 기뻤어. ‘나’라는 개인에게 신경을 써준다는 것 그 자체가. 그리고 파파는 말했지. 그렇게 바란다면, 이곳에서 나가게 해주겠다고.]
<나는 그들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일본에서 만들어낸 가상 매체의 히어로에 빠져들어 갔다. 그들이 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바로 그때. 알자드와 함께,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
[대신. 이곳을 기억하고 있으면 안 되니까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고. 그러다가 필요한 때가 오면 다시 부를 거라고 했어. 나는 동의했지.]
<그건. 정말이지 나를 똑 닮은 여자아이.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머리가 찢어지는 느낌과 함께 그녀와 만났던 기억을 잃었다.>
[어딜 가던. 이 지옥보단 나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 이후로도 위화감이 남았다. 나에게 내가 아닌 무언가가 더 있다는 위화감.>
[그렇게 태어난 것이, 가짜 나. 라즈베리 미키스트리.]
<그날이. 또 하나의 나. 레졔나를 자각한 첫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