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72화 (272/324)

272화

<챕터 4. 스타트>

주의.

이 기록은 비문입니다. 허가된 인물을 제외하곤 열람 및 기록 수정을 금합니다. 기록을 볼 자격을 가지고 있는지는 미미르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허가 없이 이 기록을 열람한 이후 있을 불이익에 대해서 유그드라실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을 것임을 밝힙니다.

해당 기록물은 음성 녹음 형태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메시지 재생을 시작합니다.

1일

언젠가 일어날 것이라 예언되어 있던 일이 터졌다. 13선조의 존재가 그것을 상징했지만, 결국 우리는 미리 대비하지 못했다. 아니. 무의미한가. 가야의 앞에서 어떤 준비를 한들 그것에 의미가 있을까?

수 세기 만에 나타난 그 남자조차 가져온 거라곤 결국 미봉책에 불과했다.

하아….

천이백만이 죽었다. 그 자리에는 이제 나무의 묘목 하나만 덩그러니 자라고 있을 뿐이다.

묘목. 묘목이라.

벌써 크기가 5m는 넘어가는 나무를 보고서 그걸 묘목이라 불러야 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실제로 저건 묘목이다. 어디까지 자랄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불가해.

그 남자는 저것을 악시스 문디. 세계수라 불렀다. 그것은 곧 정식 명칭이 되었다.

그리고….

하.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 미친 거라고 밖엔 표현할 수가 없다. 난…. 우리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해봐야겠지. 그건 이해한다. 하지만 이건…. 너무나 터무니없는…. 아….

하하하….

…….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죽었다. 그들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가디언이라는 명칭이 이렇게까지 공허할 수가 있을까.

모르겠다. 지금은. 아무것도.

…….

우리는 그것을 실험체라 부르기로 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3일

실험체에게는 이성이 없는 것 같다.

인지능력이 있긴 한 걸까? 다행히도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첫날부터 그랬다. 숨을 쉬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특수하게 마련한 감금시설에 식량을 넣어주고 있지만 입을 대지 않는다.

아직 판단을 내리기엔 성급하다. 좀 더 지켜봐야 한다….

7일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다. 실험체는 식사를 시작했다.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도. 어렵지 않게 수저와 젓가락을 다룬다고 한다.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그 지옥이 펼쳐지기 전엔 부모와 살았지 않던가.

하. 부모라….

실험체에서 채취한 혈액은 인간과 똑같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신체적으론 인간과 완전히 동일할 거란 건 이미 예상된 바였다. 우리 마법사가 그렇듯이.

….

구역질이 난다.

…….

47일

실험체가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실험을 그만두겠다는 녀석들을 잡아놓느라고 진을 뺐다. 하나같이 겁을 먹은 걸 달래는 건 쉽지 않았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의 교훈은 얻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사정을 알고 있는 놈들로 연구진을 꾸린 건 상부의 실수였던 것 같다. 원활하게 진행하려면 섞여 있긴 해야겠지만, 일반 직원들을 더 투입하는 게 좀 더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 도망치겠다는 생각도 덜 할 테고.

일반 직원들 사이에선 우리의 움직임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이미 흐르고 있다.

실험체의 신분은 대한민국인. 대참사의 유일한 생존자이니 아무래도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막상 그 대한민국에선 이미 몇 주 전에 완전히 그를 되돌려받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연락을 해왔지만.

당연하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

103일

실험체에게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할 사람이 정해졌다.

이미연. S 랭크 회복계 주특기 마법사. 앞으로 수십 년간 유그드라실의 배를 채워줄 여자다. 실험체에 대한 정보는 모르는 상태다. 그저 생체 데이터를 얻어야만 하는 입장이라고 상당히 힘들게 납득시켰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일단 그렇게 접촉한 뒤 실험체를 방에서 끌어내 인간적인 대우를 받게 하는 것이 목적인 것 같다.

매진할 목적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사람에게 힘을 주니까.

그게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고 할지언정.

148일

이미연을 통해 실험체가 그날의 기억을 돌아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듣는 순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예상되었던 일. 그의 안배가 작용하기 시작했다.

…대단하단 말밖엔 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설마 그가 생각하는 마지막 국면까지 진행될 수 있는 걸까?

아니. 그럴 리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그런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190일

다시 비상이 걸렸다. ‘놈’이 마법을 사용했다. 처음엔 형편없는 수준이었는데…. 뒤에 가선 날뛰는 괴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 뒤엔….

말도 안 돼.

메이거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응?

192일

생각보다 ‘놈’에게 동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의 수가 많다. 정보가 규제된 상태로 머릿수 싸움이 되니 상황이 우습게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니 '그' 역시 온건파로 돌아서 버렸다.

놈이 지내는 곳은 2차 실험실도 벗어나서 독방수준으로 격상되었다. 바로 이틀 전에 그렇게 날뛰었는데도 이런 위험한 결정을 내리다니. 제정신들이 아니다.

그래놓고 놈을 뒤치다꺼리하는 전담으로 세 명을 지정했다. 나도 그중 하나다.

나는 놈의 법적 양부가 되었다.

미친. 홀몸이 된 지가 언젠데 양부라니. 애초에 왜 내가?

이걸로 내가 놈에게 붙어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되긴 했지만, 그것 말고 대체 무슨 수확이 있지? 그럴싸하게 보이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위험성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가는 것 같다.

멍청하긴….

…….

2,037일

‘녀석’이 유그드라실 직속 일리미네이터가 되었다. 녀석은 마치 홀린 것처럼 괴물을 잡는 법을 익혀간다. 무슨 스펀지 같다. 그렇지만 너무 위험하다. 이제 열다섯인데.

그렇게 말을 해봐도 녀석을 들어먹지 않는다. 애초에 남의 말을 들어 먹는 놈은 아니긴 하지만. 감정표현도 여전히 서투르다. 5년 전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런 쪽은 크게 발달하지 않은 것 같다.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이미연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있다. 방에서 나올 수 있는 시간도.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목구비가 두드러져서 어릴 때의 그 귀염상은 없어져 가는데. 저렇게 무뚝뚝한데도 여직원들 사이에선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이미연은 그걸로 쌍심지가 불타오른다.

모를 일이군. 모를 일이야.

2,059일

일이 터졌다. 이걸…. 여기에 대체 뭐라고 남겨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은…. 나도 사건을 정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으니. 기록을 남긴다.

오늘은 녀석이 유그드라실 직속 일리미네이터로서 처음으로 디제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지상으로 파견된 날이었다.

노친네들. 정말 안달이 나서는! 빨리 상황을 정리하고 싶어서 미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처음 상대하는 것도 파급 디제스터. 녀석의 기본 랭크로는 버거운 적이었다. 단련을 했다지만.

나타난 곳은 대한민국.

강원도 산간에 있는 연구단지였다…….

*

처음으로 기억하는 건.

추락하는 감각이었다.

하늘에서.

빛이 보인다 싶었다.

그것이 기뻤다. 드디어 빛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슬펐다. 내가 저기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뒤. 빛에서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남은 것은 어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어둠 그 자체였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 그저 그대로 있기만 하면 그걸로 끝.

그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누구나 맞이하는 어둠의 또 다른 모습.

그것의 일부가 되는 것은 모든 것이 언젠가는 맞이하는 당연한 종언이었다.

그렇게 그저 침잠했다. 깊이. 깊이.

이윽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때까지.

그저 갈라져 나왔던, 여전히 저 높은 곳에 있을 빛을 그리며.

그렇게 가라앉아가고 있을 때-

빛이 다가왔다.

*

타닥. 타닥. 무언가가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검은 연기가 하늘로 퍼져 올라가고 있었다.

소란. 큰 소란이었다. 수많은 종류의 소리들이 비상사태를 동시에 알렸다. 그러나 정작 그것에 반응해야 할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찌…. 찌지지직….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물소리에 섞인 소리.

유리를 올려놓았던 장치의 받침대에 적힌 ‘실험체 2407’라는 명패 아래.

“…….”

스륵. 바닥에 유리가 깨져 자각자각 거리는 가운데에…. 그 안에서 떨어져나온 것이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둠.

그것은 ‘실험체’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눈을 뜨기 전부터 가까웠던 것. 자신이 침잠되어있던 곳.

그러나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자신이 합쳐져 있던 ‘빛’과는 또 다른…. 희미한 조명이 주변을 밝힌다.

그렇기에 볼 수 실험체 역시 볼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불타오르는 광경을.

화마가 모든 것을 덮친다. 이미 실험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주변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매캐한 연기는 유독물질을 태우고 있는 호흡을 방해했다. 간신히 뜬 눈에선 삶의 증명으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리적인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슬픔의 감정은 없다. 실험체에겐 아직 그런 것이 갖춰지지 않았다. 이제 막 분리되어 나온 그것에게는.

“아…아으으….”

그저 본능적으로 괴로운 느낌에 기침을 하면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 유리조각 사이에서 그대로 멎어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서서히 고통스레 죽음을 맞이하고 있을 때에…….

쿵! 쿵! 콰아아아앙!

정체 모를 폭음과 함께, 무언가가 실험체가 있는 공간 안으로 들이닥쳤다.

“크워어어어어어어!”

검은 연기사이로 늑대의 몸에 황소의 뿔을 가진 괴물의 형상이 보였다. 구르듯이 안으로 들어온 그것은 불붙은 바닥에 미끄러지며, 잘 보이지 않는 주변 기물들. 다른 유리들을 산산조각냈다.

딱히 파괴적인 움직임을 하려고 작정하지 않아도, 머리높이만 3미터가 넘는 네발 동물이 움직인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파괴를 불러왔다.

“크르르르르….”

매캐한 연기 속에서 비릿한 냄새가 섞였다. 그것은 바닥에서 나는 냄새이기도 했고, 괴물의 몸에서 나는 냄새이기도 했다. 자세히 보면 괴물의 몸에서는 검붉은 피가 검댕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생소한 냄새. 그것에 대한 궁금증이 희미하게 일어나 실험체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 동작 때문에 자각자각 하고, 같이 쏟아진 유리들이 소리를 냈다.

“크워어어어어!”

그 소리를 들은 괴물은 단박에 그 커다란 머리를 실험체 쪽으로 돌려 포효했다. 아니,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놈은 실험체를 발견하자마자 방안으로 들어오던 것보다 더 거친 기세로 달려들었다.

“…!”

실험체의 눈동자에 거칠게 달려들어 오는 놈이 비쳤다. 그 살의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는 것조차 실험체에겐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

순간 실험체는 그것이 지금까지 자신이 있던 영역.

‘어둠’의 또 다른 형태임을 알았다. 그것이 물리적인 세상에서 변형된 모습. 그것은 이 눈앞의 괴물뿐만이 아니라, 실험체의 주변에 널려있었다.

그 어느 것도 피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그리고… 피해야 할 이유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실험체에게 당연한. 친숙한. 늘 잠겨있던 고향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사람의 몸통만큼이나 기다란 발톱이 머리를 노리고 날아온다. 실험체는 그것을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아앙!

“크워어어어어어!”

다시 한 번 폭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질이 조금 달랐다. 벽만 부수고 괴물만 들어왔을 때와는 달리….

이번엔 천장까지 무너져, 방안에 가득했던 연기를 흩어내고 청량한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아….”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괴로웠었는데 그것이 가시자, 실험체는 자기도 모르게 폐 깊숙이 그 공기를 들이 채우며 눈물범벅이 된 눈을 힘겹게 떴다.

그리고 실험체의 눈앞에는-

빛이 있었다.

“……!”

그것은…말 그대로 빛이었다.

어둡기 그지없던 방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그 안을 가리고 있던 어둠의 장막은 하늘에 떠 있는 태양빛으로 흩어져있었다.

그러나 실험체가 발견한 빛은 그런 세상에 구현된 물리적인 빛이 아니었다.

눈앞.

방금까지 목숨을 위협하던 정체 모를 괴물의 머리를 짓밟고 있는 소년이 보인다.

감정의 터럭조차 보이지 않는 인형 같은 인상의 소년이었다.

그 나이에선 잘 하지 않는 장발을 하고 있어, 얼핏 보면 여자로 착각할만한 용모의 소년. 하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몸 때문에 성별을 착각할 일은 없었다.

얼굴과 온몸에 괴물의 피로 칠갑을 한 그 소년은 태양빛을 등진 채-‘그녀’를 내려 보고 있었다.

그것을……. 소녀 역시 커다란 눈으로 올려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소년과 소녀의 첫 만남이었다.

…….

2,172일

천후의 감정 표현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를 때 말곤 말 한마디 안꺼내던 녀석이라곤 생각하기 어렵다.

이런 생각을 해선 안 되는 건데…. 그 지옥 같은 광경을 이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도 희망을 품고 만다. 어리석음이 옮은 느낌이다.

하지만 정말……. 이대로만 갈 수 있다면.

녀석을 정말로 아들처럼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곤 한다.

돌아보면…. 불쌍한 녀석이 아닌가?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 그 다음 날부턴 감금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니.

요즘은 인규가 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귀가 간다.

그러니 부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실험체…. 아니. 놈이, 녀석이……… 천후가.

부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메시지 재생이 끝났습니다. 다시 한 번 들으시겠습니까?

============================ 작품 후기 ============================

주인공과 히로인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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