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74화 (274/324)

274화

“그 소문 들었어?”

“수석비서님이랑 강호 언니 랭크 올랐다는 거?”

“둘이 시기가 겹친다는 건 이유가 그거밖에 없지?”

“그거?”

“그거 말야, 그거.”

DS의 여자 일리미네이터 사이에선 묘한 소문이 들고 있었다. 이강호의 랭크 업 선언을 모두가 들어버린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 내용은 이랬다.

‘영천후 사장과 잔 마법사는 랭크가 오른다!’

그 순간, 여자 일리미네이터들의 눈에 욕망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요즘 한창 크게 벌어들여서 수입에 불만은 없지만, 기본적으로 랭크가 오르면 대우 그 자체가 달라진다. 애초에 건당 벌어들이는 액수도 10배지 않은가?

순간 여자들이 천후를 바라보는 눈빛이 암사자의 그것으로 변하였다. 세렝게티 초원의 진정한 포식자의 눈으로.

“사장님.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쟤한테 낼 시간은 없으시죠? 저는 어떠세요?”

“이년이?”

“뭐가?”

“뭔데?”

우글우글. 열 몇 명이나 되는 여자 일리미네이터가 달려들어서 서로가 유혹해오는 통에 천후는 당황해서 주춤하고 뒤로 물러섰다.

“왜, 왜들 이러세요?”

매일 같이 얼굴 마주 보고 사니까 별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생각해보면 이들 모두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자들이다. 사회에 어느 자리에 나가도 꼭대기에 있을 사람들인 것이다.

당연히 다들 자존심도 강한 편이라, 이런 노골적인 접근은 거의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양상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에이…. 별일 아니에요.”

“하루 정도는 시간 내주실 수 있으시잖아요?”

식은땀을 흘린 천후는 같이 음료를 마시고 있던 공격대장들에게 헬프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새 멀찍이 물러나서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저기에 괜히 끼어들면 우리 완전 공공의 적 되겠지?”

“당연하죠.”

평소라면 저런 식의 접근을 막아주기도 하겠지만, 저렇게 죄다 달려들면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괜히 나섰다가 여자들에게 찍히면, 남자들 사이에서도 구설수가 생길 수 있다.

천후야 정점이니 무마가 되겠지만, 여전히 C 랭크라 여기저기서 치이는 그들 입장에선 좋을 게 없었다.

“그래도 부럽네요…. 저도 저렇게 인기 좀 있어봤으면.”

“응? 너 소개팅 나가면 완전 월척이라 인기 많지 않냐?”

“마법사인 걸 상대가 알잖아요. 아시면서.”

“아. 그렇지, 참.”

일리미네이터라는 공식적인 마법사 직업이 생기면서 일어난 문제 중 하나를 정태원은 고스란히 겪고 있었다.

그는 이제 몸뚱이 하나로 어지간한 중소기업 뺨을 후려치는 연봉을 벌고 있었지만, 마법사란 이유 하나만으로 결혼과 연애 기피 대상인 것이다. 돈의 힘이 그 모든 굴레를 넘게 해주기엔, 마법사에 대한 인식이 아직 그렇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남자 일리미네이터들은 은연중에 여자 일리미네이터와 결혼하는 것을 목표로 두곤 했다. 서로 마법사이니 말이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되면 다시 돈 많은 마법사가 그들 사이에선 가장 경쟁력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벌어진 참상이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천후를 보면서 부러워하는 시선을 보내는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일이 일이다 보니 성비도 불균형한 상황. 은근슬쩍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를 두고서 암투를 벌이던 이들은 순식간에 허탈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 와중에 어느새 레이나드의 근처에 다가온 최성아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레이나드 씨. 저는 레이나드 씨밖에 안 보고 있으니까!”

“아, 아. 네에…….”

그 모습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한 레이나드는 고개를 돌리며 약간 흘러내린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어째 그 손가락이 달달 떨리는 게 애처롭다.

“좋겠네요, 형님.”

“닥쳐….”

앓는 목소리를 낸 레이나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다가 말했다.

“하루 해프닝이면 몰라도 장기적으로 가면 위험하겠는데.”

“그러게요.”

그렇게 말하곤 있었지만, 막상 그 말투는 불난 집 불구경하는 말투였다.

“아, 좀 도와달라고요!”

그 와중 천후는 결국 버티지 못해 도망 다니며 그렇게 외쳤지만,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휙 돌렸다.

*

“아이고…. 죽겠다.”

여자들을 피해서 건물 밖으로 나온 천후는 근처 벤치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업무 시를 제외하면 마법을 금지해놓은 덕에 진심으로 도망치자 아무도 따라오지 못했지만, 이런 상황이 됐다는 것 자체가 피곤했다.

“아. 어쩌다가 소문이 그렇게 나서.”

아니. 상식적으로 남녀가 몸 좀 섞었다고 마법 랭크가 오르면 누가 고생한단 말인가? 아무리 강호 선배와 셀레나가 비슷한 시기에 랭크가 올랐다고 한들……….

“그렇게 생각할 만하네?”

곰곰이 따져보니 정말 그렇다. 게다가 천후 자신도 요즘엔 자기 몸이 대체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가 아닌가?

“……에이. 설마.”

그래도 쉽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천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할지에 대해서.

당장 하루 이틀이야 몰라도, 이 상황이 길어지면 좋을 건 없다. 직원들 간의 팀워크가 저해되는 것도 그렇지만, 일단 천후 본인도 유혹에 대단히 강한 건 아니다. 언제 아차 하고서 일을 저지르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아무리 희주가 방임주의라지만 그는 함부로 허리를 놀리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사장님. 여기서 뭐하세요?”

“아. 하연 씨.”

이전부터 인연이 있던 B 랭크 일리미네이터 하연이었다. 그녀는 허벅지가 절반은 드러나 보이게 치마선이 끊겨 있는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앉아있던 천후의 눈은 대번에 그쪽으로 향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소문 때문에 도망 나와 있는 거예요?”

“네에. 죽겠어요….”

“어휴. 다들 극성이라니까. 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거 관심 없으니까.”

그 말에 천후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녀는 최초로 경급 디제스터 퇴치를 함께한 이후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런 그녀까지 다른 사람들처럼 달려들었다면 심적으로 꽤 힘들었을 것이다.

“어차피 하루 이틀 지나면 다들 잠잠해질 거예요. 사장님은 하늘 위에 있는 사람이니까. 정말 작정한 사람들 아니면 오래 붙어있을 수 없거든요.”

“그, 그럴까요?”

“그렇다니까요?”

그의 서포터인 홍희주를 본 이들은 한결같이 전의를 상실했다. 그 뒤로도 덤벼볼 엄두를 내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에야 일시적으로 우~하고 몰려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처지를 자각하고서 다시 사그라지리라.

다만.

“그런데 사장님. 처음 그날 일도 있고…. 제가 언제 저녁 한번 사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린 적 있지요?”

그녀는 그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지만 말이다. 생글생글 웃으며 은근히 손을 포개오자 천후는 움찔하고는 슬쩍 옆으로 몸을 피했다.

“하, 하연 씨?”

“어머. 이 정도 스킨십도 안되나요? 둘 다 성인인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리 짙지 않은 레몬 향수의 냄새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은근슬쩍 올린 손은 살살 그의 팔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순간 위기를 자각한 천후는 벌떡하고 일어나 웃는 낯으로 뒷걸음질 쳤다.

“저기. 하연 씨. 제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먼저 가볼게요!”

“아! 사장님!”

탓!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지는 뒷모습을 향해 손을 내뻗고 있던 그녀는 크윽 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기회였는데…!”

좀 더 안심시켜야 했나? 그녀는 너무 빨리 속내를 내비친 자신을 원망했다. 궁지에 몰렸던 만큼 조금만 더 밀면 넘어왔을 텐데…!

“왜 이리 기회가 안 온담?”

분명 굉장히 오래전부터 은연중에 어필을 해왔는데, 어째 조금씩 핀트가 어긋나버린다. 그녀는 초조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안 돼. 난 그 여자 라인을 따라가지 않을 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레이나드 옆에서 번뜩이다 못해 섬광처럼 불타오르는 최성아를 떠올리며 하연은 다시 한 번 스스로 의지를 북돋아보곤 하는 것이었다.

*

도망치다 못해 결국 사장실 안까지 들어온 그는 그대로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엄청난 피로감에 쓰러질 지경이다.

“어째야 한다?”

하연까지 저러는 걸 보고 천후는 이 사태를 어떻게든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

“싸부! 다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

사장실 안으로 시끄러운 게 들어왔다. 편한 검은색 브이넥 티에 스키니 진을 입은 그녀, 라즈베리는 그의 앞에 서서는 과장된 몸짓을 마구 해대며 쫑알거렸다.

“다 들었습니다! 싸부랑 합체를 하면 랭크가 오른다고! 맡겨만 주세요! 제가 SA 랭크가 되어서 이 지구를 구하겠습니다! 이 불초 제자가 이걸로 청출어람 하여―”

“아아악! 시끄러웟!”

듣다 못 한 천후는 벌떡 일어나서 그녀의 양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끄아아아앙! 잘못했어요! 기브업! 기브업!”

“후우우우우!”

그녀가 단숨에 항복선언을 하자, 천후는 그대로 그녀를 휙하고 근처 소파에 던져버렸다. 그녀는 소파에 떨어진 그 즉시 쏙 하고 머리만 드러내면서 말했다.

“이상한데요? 왜 저한테만 이렇게 강하게 나오죠?!”

“너한텐 그래도 되니까! 까불지 마라, 요 녀석아.”

“으윽. 역시 제자 포지션이 문제였어요. 여동생으로 해야 했어.”

“섬뜩한 소리 하지 마라, 좀.”

레졔나와 융합한 이후, 라즈베리의 성격은 이전으로 돌아왔지만, 간간이 반말을 쓴다거나, 속이 시꺼먼 모습을 보이곤 했다. 이전처럼 완전히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면면들이 오히려 그녀를 더욱 어리게 보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치이.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이 기회에 싸부의 힘으로 DS 전 직원의 랭크를 팍팍 올리죠.”

“전 여직원도 아니고 전 직원이냐….”

“싸부가 그 한 몸만 희생하면 그 정도는…!”

“됐거든?”

그 정도로 자신을 희생하느니 그냥 혀 깨물고 죽고 말지. 성 소수자를 차별하진 않지만, 자신이 그 성 소수자에 들어갈 생각은 죽는 한이 있어도 없는 천후는 단칼에 그녀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을 커트해냈다.

“아. 뭐. 이런 난리가 나서는….”

만나는 여자들마다 극성이니 미칠 지경이다. 천후는 한동안 회사에 나오지 말아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사장실 안으로 라즈베리보다 더 골치 아픈 난적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안녕, 천후야?”

“어? 누나? 무슨 일이에요?”

사장실 입구엔 백색의 가운을 입은 여성이 와있었다. 유그드라실에서 그의 주치의이자, 어머니 역할을 해주었던 여성. 이미연이었다.

“강호 씨한테 이야기는 들었단다.”

“…….”

순간 불길한 기분에 천후는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어째 무섭다.

“무슨 이야기?”

“알면서. 천후야. 거두절미하고. 뽑자?”

“…….”

등골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에 천후는 몸을 덜덜 떨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누가 유그드라실 출신 아니랄까 봐 극단적인 성향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이렇게 ‘의학적 연구 소재’를 발견했을 때였다.

“잠깐만! 내, 내 그거 어릴 때 이미 제출했었잖아!” 부끄러워 미칠 거 같은 소리를 간신히 해보지만, 그녀는 가차 없었다.

“그때랑 지금이랑 상태가 다르니까 이런 일이 일어났겠지? 자아. 천후야!”

“으아!”

어느새 바싹 다가와 바지 버클을 풀려 하자 천후는 소리를 내지르며 버텼다. 힘을 쓰면 간단하지만 그래도 부모나 다름없는 사람인데 함부로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제자랍시고 있는 라즈베리는 그런 이미연을 옆에서 응원하고 있었다.

“잠시만…. 멈춰주시겠습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상황을 제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긴 흑발에 인형처럼 표정없는 여인, 홍희주였다.

“안돼요. 저는 꼭 그의 샘플을 채취해가야 해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주인님에게 당신이 직접 성적인 수치심을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소리죠?”

미연이 뾰족하게 묻자, 희주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와, 그 손에 무언가를 넘겨 주었다. 그것은 작은 앰풀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과연….”

순간 흐뭇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희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표정변화 없이 그 손을 잡아 악수를 나누었다.

그 기묘한 광경에 천후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붕어처럼 입을 빠끔 거릴 뿐이었다.

*

그리고 며칠 후.

유그드라실에서는 ‘샘플’을 분석한 결과 일반적인 성인 남성과 큰 차이가 없었다는 내용을 전해왔다. 마법적인 연관성을 짚어내기는 어려웠다는 말과 함께.

그 공식 결과는 입 가벼운 라즈베리를 통해서 여직원들에게 알려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후를 둘러싼 난리는 가라앉았다.

그건 다행이었지만……. 천후는 도저히 희주에게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대체…그런 건 왜 가지고 있던 거예요?”

“…….”

그 질문에 희주는 드물게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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