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75화 (275/324)

275화

<악마를 보았다?>

겨울이 언제까지고 계속되진 않는 법. 눈 오는 계절은 끝났다. 그것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일이 천후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하아….”

“자. 얼른 가방 메. 얼른.”

“머리도 좀 더 정리하고. 얼른.”

“하아아….”

땅바닥을 꺼트릴 법한 한숨 소리를 들으며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봄이 오긴 왔구나. 애들 학교 다니는 거 보면.”

‘늙은이.”

아래쪽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가볍게 한 귀로 흘려들은 천후는 대신 그 말을 한 장본인, 이그네스를 내려 보았다.

“왜 그리 부루퉁해?”

“귀찮으니까 그렇다!”

답지 않게 까치발까지 세우며 그렇게 쏘아붙인 이그네스는 획 하고 몸을 돌렸다. 얼마 전까지는 이 시간이면 아침 식사를 마치고 희주와 함께 차나 마시던 그녀였지만, 오늘은 분홍색 가방을 등에 메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양옆을 백발의 아이들이 포위하고서는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오빠. 다녀올게!”

“일 열심히 해~. 이그네스는 우리한테 맡겨!”

“오냐~. 수고.”

훈훈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던 천후는 그러다 아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침착하게 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면서 중얼거렸다.

“그럼 가볼까?”

“으. 싸부. 정말 가시게요?”

뒤에서 들려오는 찜찜해 하는 목소리에도 그는 흔들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얼마 전. 천후는 보여주기 싫어 죽겠다는 낌새를 노골적으로 내비치는 이그네스에게서 종이 한 장을 건네받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학부모 참관수업 안내>

“이, 이거!”

“말해두는 데 절대로 오지 마라! 절대!”

이그네스는 그렇게 사전에 목소리를 높여 두었지만.

“기껏 가져다줬는데 이 기회에 가봐야지!”

“아아….”

아쉽게도 그건 천후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오늘.

바로 그 학부모 참관수업이 있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바야흐로 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 그 자체였다.

*

이브와 에바의 사실상 부모나 마찬가지가 된 그 날 이후. 천후는 둘이 다닐 중, 고등학교를 서울 시내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미래에 아이들이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있는 학교를 만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 역시 엄선에 엄선을 거쳐서 선정했고, 그 뒤엔 희주를 통해 암암리에 자금이 들어가고 있었다.

“오신다는군요.”

“으윽. 어쩐 일로 직접 학교에 방문까지….”

“아무래도 오늘 학부모 참관 수업을 보러 오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 사립 초등학교의 교장, 교감은 한자리에 모여서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얼마 전, 교장은 학부모회의 머리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홍희주로부터 하나의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이번에 아이 하나를 더 학교에 입교시킬 생각이라고.

그때까진 입이 귀에 걸렸지만, 바로 어제 ‘이사장님’이 직접 찾아올 수 있단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내내 복통과 설사에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다.

“하, 학부모회장님을 만나는 것도 긴장되는데 DS가 직접 온다니 어쩌다 이런 일이….”

“흠이라도 잡히면 끝장입니다, 끝장!”

둘의 안색이 샛노래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브, 에바가 이 학교에 다니고 나서부터 그들은 거의 새 인생을 살고 있었다. 진정한 돈뽕맛을 본 그들은 그 즉시 학부모회장…. 홍희주의 완벽한 개가 되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치르는 행사는 거의 참가하지 않고, 대리인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이 학교에서 그녀의 의사는 신의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부군인-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DS가 직접 오다니.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를 직접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직접 보고 싶지 않은 쪽의 사람이었다.

돈만! 돈만 빨아먹고 싶다!

만나는 것만으로 압도당하는 인간과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다! 치졸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인간적인 바람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람은 바람이고. 물 떠다 놓고 하늘에 그렇게 빌었는데도 직접 오겠다는 사람을 어쩔 수는 없는 법이다.

“일단 최대한 깨끗하게 청소해놓고, 애들 시켜서 잡초도 뽑고….”

교감이 습관적으로 내놓은 말에 교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쳤습니까? 업체를 불러야지요, 업체를!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요! 입학식 때부터 애들 부려 먹고 있는 거 보이기라도 했다간 무슨 소릴 들을 줄 알고!”

“죄, 죄송합니다!”

그제야 자기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깨달은 교감은 입을 다물었다. 그전까지야 일상적으로 아이들에게 창문 청소까지 시키고 그랬지만, 현 이사장 앞에서 그랬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후우. 일단…. 학부모회에 미리 사정을 설명하고서 아이들도 대비 연습을 시킵시다. 이 학교 학부모님들도 DS의 자제분이 같은 학교라는 거에 애착이 클 테니….”

“네. 그럼 이러저러해서….”

두 사람은 그렇게 붙어 앉아서 속닥속닥 토의를 나누었다.

생존을 위한 토의를….!

*

테러를 받은 이후. 수리는 너무 오래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천후는 아예 인근의 저택을 하나 사들여버렸다. 이전보다 건물이 큰 3층짜리 주택이었지만, 정원은 약간 작은 집이었다.

라즈베리는 그 대문 앞에서 밖으로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양복 차림새를 점검하고 있는 천후를 보며 물었다.

“싸부. 정말 가실 겁니까?”

“응? 어. 셋이 입교할 땐 못 갔었으니까 이 기회에 가봐야지.”

“으음….”

그 소리에 라즈베리는 갈색 단발머리를 긁었다.

‘완전 민폘 텐데.’

눈앞에서 싱글벙글인 이 양반이야 아무 생각 없겠지만, 직접 맞이하는 쪽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그녀는 쉬이 상상할 수 있었다.

그건 뭐랄까…. 괴롭히는 거나 다른 없는 일이다. 송사리만 가득한 곳에 메기를 풀어놓는 그런 상황. 그녀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까마득한 느낌을 받아버렸다. 학교 관계자들이 불쌍해진 라즈베리는 은근히 물었다.

“싸부가 오는 거 그리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이그네스가 애도 아니고.”

“앤데?”

“…….”

라즈베리는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야 애긴 하지. 애긴 한데….

“하아.”

라즈베리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녀는 레졔나와 융합되면서 이전보단 약간 더 차분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천후에 대한 존경심이라거나, 자신이 컨셉으로 밀던 말투를 완전히 버리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융합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그녀의 눈으로 볼 때 천후가 이그네스를 대하는 태도는 특이했다. 라즈베리는 이그네스를 완전히 자기 또래 정도로 대하고 있었다. 외양은 어린애라도 말이다. 아무래도 사정을 알다 보니 그 이하로 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천후는 그녀를 구해낸 이후론 이그네스를 정말 완벽하게 애로 대하고 있었다. 이그네스는 당연히 그걸 싫어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이전처럼 대놓고 뭐라 하는 경우는 조금 줄었다.

둘 사이에서 미묘한 합의점이 나온 모양인데, 이그네스를 작정하고 저렇게 대하는 경우는 드물다 보니까 오히려 신기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돌아와서. 천후가 이그네스를 아무리 애로 대한다고 해도, 그녀의 정신연령은 어지간한 성인보다 위다.

참관수업 같은 건 차라리 오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사실 그 통신문도 자의적으로 줬다기보단 어쩔까 꼼지락거릴 때 천후가 발견해서 보여준 거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괜히 천후가 학교에 인사차 가보겠다고 하는 건.

‘인사를 하는 입장이 반대가 되잖아.’

지금쯤 한바탕 난리가 나 있을 학교를 생각하면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하지만 천후는 거기서 한술 더 떴다.

“기왕 가는 김에 교장 선생님이랑 이야기도 좀 하고. 담임선생님도 만나 뵙고 식사도 같이하고 나오려고.”

“으와….”

악마다. 악마가 여기 있다. 어쩜 저런 소름 돋는 생각을 웃으면서 말하지?

라즈베리는 자기도 모르게 일어난 닭살을 긁으면서 혀를 내둘렀다. 그러는 동안 준비를 마친 천후는 차고에서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에 몸을 실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녀올게. 가요, 희주 씨.”

“네.”

어느새 준비를 마치고 나온 희주 옆자리에 앉자 천후는 상쾌한 미소를 날리며 학교로 향했다.

“아아…. 가버렸다.”

아마 그가 학교에 도착하는 순간, 그곳에선 세상에서 가장 슬픈 광경이 펼쳐지리라.

“으으. 어쩌다 이런 일이.”

그러나 라즈베리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제 홍희주가 자신에게 당부했던 것을 떠올렸다.

어제. 천후가 저렇게 들떠서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기대하고 있던 그 시간. 희주는 미리 그녀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라즈베리.”

“네, 넵!”

낮고 기복 없는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자, 라즈베리는 자기도 모르게 빠릿빠릿한 태도로 희주에게 몸을 돌렸다. 그녀는 평소의 무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그녀의 어깨에 가벼이 손을 올렸다.

“보셨죠?”

“네…?”

“주인님이 지금 이대로 가시면 조금…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지겠지요.”

“…….”

알고 계시면 말려주세요. 턱밑까지 차오른 그 말을 간신히 삼킨 라즈베리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희주는 성격상 천후에게 정면으로 미운 소리를 잘 못 하는 편이었다. 오히려 그와 함께 참관 수업에 함께 갈 요량이다. 그러니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브레이크를 걸 필요가 있었는데….

“라즈베리라면…잘해줄 거라 믿어요.”

“…….”

단숨에 이게 무슨 소린지 알아들은 라즈베리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오늘의 수습 담당 당첨 사인이 아닌가?

그녀는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입을 벌리려고 근육을 움직이는 그 순간, 어깨에 올려진 희주의 손에 아주 약간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해주실 거죠?”

쿵쾅쿵쾅. 등 뒤로 식은땀이 다 흐른다. 아주 잠깐 반발심을 느낀 걸 들킨 기분이라 무섭다. 감정이라곤 터럭도 느껴지지 않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 보자, 라즈베리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 네엡. 여부가 있겠슴까!”

“…….”

스윽. 스윽. 그제야 표정변화 하나 없이 그녀의 손이 얼굴을 타고 올라와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안심시켜주었다.

‘으으. 언니는 너무 무서워.’

분명 무서운 행동을 하진 않는데 이상하게 무섭다. 마치 그녀를 통제하는 법을 처음 만났던 때부터 알고 있는 느낌이랄까? 감히 거역할 수가 없다. 특히 천후에게 아주 약간 흑심을 품었단 걸 들킨 날부터는 더더욱.

“교장 선생님에겐 미리 귀띔을 해두었으니까, 그때그때 주의사항만 전해주시면 될 거예요. 저는…라즈베리가 먼저 현장에 도착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희주는 예의 양복 정장과 선글라스를 내밀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천후가 떠나자마자 휘릭하고 변장한 라즈베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다가 분연히 양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에에이! 좋슴다!”

어차피 하겠다고 한 이상 안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확실히 해보자!

사람은 살려야 할 것 아닌가…!

*

홍희주에게 미리 영천후가 오늘 올 수도 있단 소식. 그리고 방금 출발했단 소식을 들은 교장과 교감은 결연한 얼굴로 단상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만큼이나 결연하게 서 있는 이들이 있었으니.

“아. 운동장 조회 싫어.”

“어제부터 이거 왜 하는 거야?”

“아아. 조용히 하시고. 다시 한 번 오와 열을 맞춰봅니다. 앞으로 나란히!”

단상 위에서 마이크를 쥔 학생주임은 매와 같은 눈으로 학생들을 내려 보았다. 아직 어린아이들인 초등학생은 그가 화난 것 같은 목소리로 마이크로 소리를 질러대자 궁시렁거리면서도 줄을 맞췄다.

학생주임은 위에서 보았을 때 가장 깔끔한 형상을 만들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었다. 무릇 인간이란 군중이 질서 있게 열을 맞춰서 있는 걸 위에서 내려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

이걸 위해서 그들은 어제부터 4시간이나 학생들을 잡고서 선행연습을 시켰던 것이다.

물론 왜 이러는지 사정을 전혀 모르는 아이들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부아아아아앙! 학교 운동장으로 슈퍼 바이크 한 대가 우렁찬 배기음을 내면서 들어왔다. 바이크에는 두 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뒤에 타고 있던 사람은 운전한 사람에게 엄지만 치켜들어 보이는 날래게 단상까지 뛰어와서 외쳤다.

“아! 정말! 뭐하는 겁니까! 애들 빨리 들여보내세요! 빨리!”

“네? 무슨 소립니까? 당신은 뭔데 우리 학교 아침 조회를….”

“학부모회장님이 시켜서 왔어요! 이사…, 아니 그분 이런 거 완전 질색한단 말이에요! 자기 때문에 애들 동원된 거 알면!”

헬멧을 벗은 정장 입은 여자, 라즈베리는 급하게 교사들을 향해 그렇게 외쳤다.

“그런…. 아이들 앞에서 한 말씀 해주시면서 아이들 상태도 보고 그러실 수 있게 준비한 건데….”

“됐다고요! 얼른! 진짜 오기 직전이란 말이야! 지원 끊기고 싶습니까?!”

그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황급히 아이들을 들여보냈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좋다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마지막 아이까지 간신히 현관문 안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학교 주차장 쪽으로 람보르기니가 나타났다.

이 학교에, 하필이면 오늘 저런 차를 타고 들어올 만한 사람은 하나뿐이다. 주차 공간을 찾는 동안 우르르 주차장으로 이동한 그들은 천후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한 줄로 늘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이사장님!”

“우왓. 깜짝이야. 안녕하세요. 왜 나와들 계세요?”

“하. 하하하하! 당연히 밖에서부터 모셔야죠.”

그 말에 천후는 미안하단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에이. 그러실 필요 없는데…. 학생들까지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죠? 그러면 너무 미안한데….”

그렇게 말하는 마지막 목소리가 싸늘하다. 교사들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까 그대로 그를 맞이했다면…….

‘크, 큰일 날 뻔했다!’

그들은 은연중에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기둥 뒤에 교묘하게 숨은 라즈베리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라즈베리는 그들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신호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그 슬픔의 메시지에 라즈베리는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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