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우정의 형태>
영천후 자택의 정원. 극단적으로 휜 환도를 든 여성, 이강호는 찬찬히 숨을 골랐다.
“이제야 어느 정도 익숙해졌나?”
얼마 전. 영천후의 영향인지 어떤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의 마력 랭크가 A로 올랐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처음에는 힘을 과하게 다뤄서 실수했지만, 얼마간 시간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몸에 익었다.
강화마법은 다른 계열보다 특히나 다루기 어렵다. 힘의 작용이 신체를 움직이는 것에 연동되는데, 그것이 일상생활을 할 때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그 감각을 잡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냈다.
“후우.”
강호는 납도 하면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예의 ‘황제액’ 사건 이후, 그녀 역시 심정적으로 꽤 복잡해졌다.
일단 단순하게는 새로 얻은 힘에 대한 것. 그녀는 A 랭크가 된 건 맞았지만, 같은 랭크인 천후에게 비교하면 그 능력이 6할에 머물렀다.
유그드라실 쪽의 설명으론 이강호가 맞는 거고 천후가 이상할 정도로 높은 거라 했지만, 자격지심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것까진 괜찮다. 그가 조금은 특별한 인간이라는 것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니까. 마법에 있어서 그는 조금 논외로 두어야 할 존재가 아닌가?
그녀를 더 싱숭생숭하게 한 것은 다른 데에 있었다. 그건….
“…아니. 그만두자. 이런 생각을 할 것이 아닌데. 나란 것은 만족을 모르는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이강호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흐트러진 마음을 축축한 땀과 함께 물로 씻어내릴 생각이었다.
사람의 인기척이 사라진 정원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봄이 왔는데도, 바람은 조금 싸늘했다.
*
“천후야. 오늘은-”
“아. 미안해, 선배. 오늘은 미국 쪽에 일정이 잡혀있어서 같이 못 갈 것 같아.”
“그러냐? 잘 다녀오너라.”
“정말 미안해. 다녀올게.”
엘모세와트 건이 정리된 이후. 마법사들 사이의 파워 벨런스는 다시 한 번 재편되었다.
정규 공격대장들이 SA 랭크 마법사의 부재를 알게 된 이후 유그드라실이 사실상 백기를 든 것이다.
그들의 의견을 세상에 강요할 때 사용하던 한 축이 무너지자, 그들은 차선책으로 영천후와 정규 공격대 마스터들을 기존 SA 랭크 마법사가 맡았던 역할을 맡겼다.
그 자리는 유그드라실의 의견을 전하는 일종의 메신저이기도 했지만, 뒤집어서 이야기하자면 양쪽에서 이득을 받아낼 수 있는 중간자 역할이기도 했다.
유그드라실의 약점. SA의 공백을 숨겨주는 대신 그들은 사실상 유그드라실과 대등 이상의 관계가 되었고, 세계 정부들은 유그드라실 자체보다 마스터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제 주체는 정규 공격대의 마스터들이었고, 유그드라실은 그들의 뜻을 이뤄주는 일종의 도구와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중에서 정점은 역시 영천후였다. 유그드라실 측에선 아직도 천후 외에는 텔레포테이션 사용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아니, 이제 와선 텔레포트 관련 권한을 아예 천후에게 넘겨버린 꼴이 되었다.
그 덕에 세상에서 텔레포테이션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싶다면 유그드라실이 아니라 영천후의 재가를 얻어야 하게 되었고, 덕분에 그는 굉장히 바쁘게 돌아다녀야 했다.
레졔나와 완전히 융합한 라즈베리와 때마침 랭크가 오른 이강호가 없었다면 DS의 업무에 구멍이 뚫릴 수도 있었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천후는 아주 이전부터 꾸준히 접견을 요청해온 미 정부와 접촉하기 위해서 큐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텔레포테이션 시스템 관련에 한정해서 큐브의 사용이 자유로워진 것이다.
강호는 그를 배웅한 뒤에야 약간 아쉬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시간을 내기 쉽지 않구나.”
오늘은…. 그와 함께 엘모세와트의 아이들, 이제는 DS 보호시설의 아이들을 보러 가려고 했던 날이었다.
그들을 구조한 이후, DS에선 지방의 아파트 단지를 하나 매입해 그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 그 인근의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교육시설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뒤 조금씩 손보며 점점 더 제대로 된 보호시설로 탈바꿈해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 보호시설에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고 있었다. 이브, 에바 건이 있어서인지, 그녀는 안타까운 경험을 한 아이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천후 역시 자주 찾아가는 편이었지만, 바쁘다 보니 강호만큼은 아니었다.
“강호 언니. 여기 계셨습니까?”
“라즈베리.”
“싸부 대신 제가 어울려드리겠습니다.”
“후후. 그럴까? 가자.”
옥상에 나타나 자기 가슴을 툭툭 치는 라즈베리를 보고 나서야 강호는 미소를 되돌렸다. 시설에 자주 발걸음을 하는 또 다른 한 명이 바로 라즈베리였다.
따지고 보자면 아이들의 상당수인 레졔나 시리즈는 유전적으로는 말 그대로 그녀의 자매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당연히 시설에 자주 찾아갔고, 그러다 보니 둘은 그 사이에 서로 많이 친해졌다.
“싸부도 스케줄 생각해보면 자주 오는 편입니다. 너무 박하게 생각하지 마시지 말입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어. 그런 게 섭섭했던 게 아니다.”
옥상에서 내려와 주차장으로 향한 강호는 헬멧을 착용하고 바이크를 탔다. 라즈베리 역시 익숙하다는 듯이 뒷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허리를 단단히 잡은 것을 확인한 이강호는 시동을 걸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런 게 아니라…. 함께 할 시간이 적은 것이 아쉬운 거다.”
“네? 무슨 말 했습니까?”
“아니다!”
아무래도 소리에 묻혀서 라즈베리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기도 모르게 본심을 드러냈던 강호는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바이크를 몰았다.
*
DS 보호시설이 맡은 아이들의 수는 총 600명. 이전 알프스 산맥의 교전 이후 살아남은 아이들의 반수에 가까웠다. 나머지는 다른 정규 공격대와 유그드라실이 1/4씩 나눠서 맡기로 했다.
처음 이들을 데려오려고 했을 땐 아무리 천후가 대한민국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반대 여론이 있었다. 저 중에서 다시 반수 정도가 마법사였고, 그들 모두 정신지배를 당했던 전적이 있었으니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천후는 다시 한 번 대한민국에 돈을 쏟아 부었다. DS의 이름을 딴 사설 보육원, 유치원을 건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유치원 입학 경쟁은 정말 끔찍할 정도였는데, 그걸 어느 정도 해소해주면서 그가 아동복지 관련으로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몇 번이나 어필하고 나서야 여론이 가라앉았다.
물론 여기엔 보호소의 아이들이 생각보다 훨씬 온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온순하다기보단….
“여전합니까?”
“네에…. 아무래도.”
아이들이 모여 있는 교실 안을 둘러본 강호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주저앉은 채로 거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골치 아픈 행동은 하지 않지만,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보일만 한 활동력 있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통했기에 식사나 화장실 문제는 자유로웠지만, 교육에도 놀이에도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아침마다 주거 지역에서 여기로 사회복지사들에게 이끌려 걸어온 이후, 자리에 한번 앉으면 허공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일반인 아이들은 차도가 있는 편인데, 마법사 아이들은 아직….”
정신지배가 심하지 않았던 일반인 아이들은 그래도 차도가 있어 층을 따로 쓰며 관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아이들처럼 생기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사고를 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쥐죽은 듯이 고요한 시설에선 그런 사고 소식이 들려오는 게 오히려 희소식일 정도였다.
그러나 레졔나 시리즈나 납치되었던 마법사 아이들, 브리딩으로 태어나 자라난 아이들은 인성이 반쯤 파괴되어, 그야말로 눈만 뜨고 있는 시체에 가까웠다.
그냥 놔두면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냥 놔두면 어느 순간 갑자기 울먹이다가 잠드는데, 가끔씩 소리를 내지르며 경기를 일으키며 두려움을 표하곤 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가슴이 아팠다.
그렇지만 그런 그녀들이 차도를 보이는 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 언니 왔다. 과자먹자, 과자.”
“언니.”
“언니.”
그건 라즈베리가 찾아왔을 때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면 다른 교실에 있던 아이들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찾아오곤 했다. 유그드라실의 분석으론 그녀에게서 엘모세와트의 잔영을 보고 있다는 것 같았다.
이건 곧 아직 그녀를 ‘명령권자’로 인식한다는 뜻이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유그드라실 측에선 그녀의 존재가 이들의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이들의 이 반응은 더는 마법이 엮여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 ‘명령권자’를 향한 반응은 ‘강한 친근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인간성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물론 그런 말을 듣지 않았다 하더라도. 혹은 완전히 반대의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라즈베리는 이곳을 자주 찾았을 테지만 말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응….”
“여기 좋아…. 편해…. 아무도 이상한 거 안 시켜…”
“밥 맛있어. 통조림보다 맛있어.”
지금까지 누가 무슨 말을 걸어도 기본적인 대답 하나 얻기 힘들었던 아이들이 라즈베리의 물음에는 앞다투어 말을 꺼냈다.
그 모습을 보며 원장은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부럽네요. 우리도 저렇게 아이들을 대할 수 있다면….”
“괜찮습니다. 시간이 해결해줄 거예요.”
아직 환경이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당장은 저렇더라도 조금씩 좋은 변화를 보여줄 것이다. 적어도 강호는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천후는 일정이 있어서 오지 못했지만, 혹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저나 라즈베리를 통해서 말씀해주세요.”
“호호. 알고 있어요. 찾아오실 때마다 그 말씀만 하시잖아요.”
“…….”
“정말 다행이에요. DS께서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게. 유그드라실에 있을 때 그분에 대한 나쁜 소문이 없잖아 있었는데. 여기 와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답니다.”
보호소 원장인 그녀는 유그드라실 마법사였다. 이런 마법사가 섞인 시설을 관리하는 노하우를 가진 곳은 유그드라실 밖에 없으니 당연했다.
그녀는 처음엔 이 아이들 전원을 유그드라실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훌륭한 환경을 제공하고 지속적으로 신경을 쓰면서 의견을 물어오자 인식이 확 바뀌었다.
“이렇게 마법사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였지요.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 거창한 게 아닙니다.”
“호호. 아. 실례지만 저도 업무로 돌아가겠습니다. 천천히 있다 가세요.”
“네.”
고개를 숙여 보인 강호는 그녀의 말대로 시설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라즈베리의 목소리를 들은 아이들은 생기를 되찾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지만, 조금 떨어진 교실까지 발걸음을 옮기자 다시 무기력함과 암담함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는 아이들 서넛마다 하나씩 사회복지사가 붙어서 어떻게든 기운을 북돋워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거기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니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던 와중에. 이강호의 시선이 잠시 한곳에 머물렀다. 이제 8살이나 될까 싶은 여자아이들 앞에서 책을 읽어주던 복지사 쪽으로.
복지사 앞에 있던 아이 중 하나는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복지사는 잠시 움찔하면서 물었다.
“화장실 가려고?”
“응….”
그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는 아이를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동안 다른 아이들은 멍하니 그녀가 있던 곳을 보거나, 지금까지 관심도 없는 것 같았던 책을 슬그머니 만지작거리곤 했다.
그 광경을 강호는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이 지나, 복지사는 아이를 데리고 다시 화장실에서 나왔다. 강호는 그런 그녀에게 홀린 듯한 얼굴로 다가갔다.
“으….”
갑자기 모르는 어른이 다가오자,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복지사의 다리를 잡고 매달리며 그 뒤로 숨었다. 놀란 그녀는 아이를 다독이며 강호를 올려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아.”
그 순간. 강호는 자신이 잘못보지 않았음을 알았다.
이미 9년이 넘게 지나 희미한 기억 속. 의미라곤 거의 두지 않았던 학창 시절. 유일하게 똑똑히 남아있는 그 얼굴 모양새와 닮았다.
강호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주희…. 주희냐?”
“네? 어떻게 제 이름을….”
놀라서 반문하던 사회복지사 여자는 그러다, 강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는 놀라서 소리쳤다.
“강호? 너 이강호니?”
세상은 좁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