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79화 (279/324)

279화

서울 시내의 큰 호프집 안. 그 안쪽 테이블에는 세 명의 여자가 앉아있었다.

금발에, 갈색 머리에, 흑발에. 인종도 다채로운 집단. 이태원에서나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조합. 게다가 한 명 한 명이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중에서 금발의 미녀, 셀레나는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게 언니가 말한 큰일?”

“흠! 으흠!”

마주 앉은 한국인 여자, 이강호는 그녀가 뾰족하게 묻자 대답하지 못하고 헛기침만 했다. 은근슬쩍 얼굴이 붉어져 있는데, 부끄러워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셀레나가 이강호를 몰아붙이는 동안 갈색 머리칼의 여자, 라즈베리는 예의 선글라스를 쓰고서는 저쪽 테이블을 슬쩍 고개를 들어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하아….”

그 모습에 셀레나는 이마를 짚었다.

남아있던 잔업을 처리하고 돌아가려고 하던 때였다. 돈에 여유가 생긴 이후, 셀레나는 자신이 직접 차를 모는 것이 세상 전체에 대단한 민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기사가 대신 모는 차 안에서 조금 늘어져 있을 때 강호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온 것이다.

“셀레나! 큰일이다! 나를 좀 도와다오!”

“응? 강호 언니? 무슨 일이야?”

“설명은 오면 해줄 테니, 일단 위치부터 알려주마! 여기가….”

급한 목소리에 셀레나는 조금 당황했다. 조금씩 여성스러워지고 있긴 하지만, 지난 20여 년간 유지해온 성격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강호는 대범한 성격이었고, 사소한 일은 아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이런 급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면….

“바이크로 사람이라도 쳤나?”

그럼 보험사를 부를 일이지, 자기부터 찾을 리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셀레나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길거리에서 누군가와 시비라도 붙어서 화가 난 이강호가 검이라도 마법으로 불러내서….

“…기사님! 차 좀 돌려주세요! 어서!”

등 뒤로 소름이 섬찟하고 돋은 셀레나는 곧바로 강호가 말해준 장소에 와보니…. 그곳에는 제 딴에는 몰래 엿듣는 것처럼 저쪽으로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강호가 보였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 문이 거칠게 열리며 라즈베리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그제야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상황이 좀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셀레나는 미간을 꾹꾹 누르면서 말했다.

“후우우우…. 일단 기사 아저씨는 너무 늦었으니까 먼저 돌아가시라고 해놨어. 그러니까 언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실까? 응?”

“으음. 아니 그게….”

셀레나의 물음에 강호는 볼을 긁적이며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남자가 들어온 이 호프집은 나름대로 장사가 잘되는 곳인지, 남아있는 테이블은 거의 없었다.

“몇 분이서 오셨어요?”

“…….”

둘을 따라가게 안으로 들어선 강호는 곧장 날아오는 종업원의 질문에 잠시 주춤했다. 당연히 여럿일 거라고 생각하는 질문을 받는 것은 역시 힘들다. 잠시 말문이 막혔던 그녀는 그러다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세 명입니다. 둘은 조금 있다 올 겁니다.”

“아~. 세 분이시구나. 자리로 안내해 드릴게요.”

“아니… 자리는…”

강호는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가 앉은 자리를 찾았다. 마침 거기서 몇 칸 떨어지지 않은 자리가 비어있는 게 보였다.

“저기에 앉죠.”

“네? 창가 자리가 비어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강호는 종업원이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이대로는 길게 앉아있기 힘들다. 남의 눈치 따윈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낸 말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어쩔 수 없지.”

조용히 홀로 중얼거린 강호는 핸드폰을 들었다. 원군을 부르기 위하여-

“와. 이 사람 봐. 우리 그냥 말실수한 거 머릿수 채우기 용이래, 라즈베리.”

“과연 여아용. 대담함의 차원이 다르군요. 저도 배우고 싶을 정도입니다.”

너무 대단한 사정이라 화가 날 지경이다. 지금 불러낸 이 두 사람이 분당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이 가게 하루 매출을 넘어설 지경인데 이 무슨 발상인지?

“미, 미안하다고 하지 않느냐? 그리고 그 여아용은 그만둬라. 부끄럽다.”

“세상에…. 옛날부터 뻔뻔한 건 알고 있었지만 언닌 진짜…. 어휴. 몬 산다 내가. 몬 살아."

“하, 하여간 온 김에 나를 좀 도와다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다.”

“어휴….”

간단하게 사정을 들었던 셀레나는 혀를 차면서 남자가 있는 자리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가깝긴 하지만 역시 거리가 조금 있다 보니 목소리는 음악 소리와 소음에 묻혀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뜬 셀레나는 품에서 웬 플라스틱으로 된 동전을 닮은 칩 하나를 꺼내서는 강호의 손에 들려주었다.

“이거 소리 안 나게 던져서 저 근처에 떨굴 수 있겠어?”

“이렇게 말이냐?”

강호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칩을 바닥을 쓸어내듯이 던졌다. 그러자 그 칩은 미끄러져 가다가 귀신같이 둘이 마주 앉아있는 식탁 바로 아래서 멈췄다.

“휘유.”

보아하니 대화를 나누던 둘은 발치에 뭐가 날아왔단 걸 느끼지도 못한 것 같았다. 역시 몸으로 하는 거라면 못 하는 게 없다. 라즈베리는 자기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하긴 했는데. 이게 뭔데?”

“뭐기는.”

셀레나는 대답 대신 둘에게 이어폰을 한쪽씩 넘겨주었다. 무심코 그걸 받아들여 귀에 가져가자-<…이전에 내가 샀던 주식이 대박이 났거든.>

<어머. 진짜?>

“우와. 도청기? 도청기입니까, 이거?”

“왜 이런 걸 가지고 다니는 거냐?”

“녹화, 녹음은 일할 땐 필수거든? 특히 마법사나 정부, 언론을 상대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그 모습에 이번엔 강호와 라즈베리 쪽이 파르르 떨었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의 도움이 필요했다.

마침 강호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대화가 나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아예 외국으로 뜨려고 하거든. 너도 따라올래?>

<진짜? 근데 오빠 결혼할 사람 있다고 하지 않았어?>

여자의 물음에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결혼? 그 여자랑? 그런 거 아니지. 전에 말했잖아. 그 여자 애비가 회사 중역이야. 그 양반한테 붙어먹으려고 했던 게 내 목적이었고. 이번에 한탕 한 것도 그 양반이 정보 흘려줘서거든. 그런데 슬슬 날 못 믿는 눈치더라고. 그럼 더 길게 끌고 갈 필요도 없지.>

<우와. 오빠 진짜 못됐다. 그럼 나하고도 결혼 안 할 거 아니야?>

<알면서 왜 그래?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몇 년 지나면 질릴 여자를 먹여 살리는 짓거리라고. 결혼이란 건. 난 그런 거 안 해. 대신에 질릴 때까진 지원해 줄게. 그래서 좋아, 싫어?>

<나야 좋지이.>

애교 섞인 목소리와 함께 입술과 입술이 가볍게 맞닿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폰을 통해 그 소리를 차분하게 듣고 있던 셀레나는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다.

‘아…. 큰일 났다.’

아니나 다를까. 강호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님에도 살이 에이는 듯한 냉기에 셀레나는 머리칼이 쭈뼛하고 곤두섰다.

덜컹. 테이블이 흔들릴 정도로 거칠게 일어선 강호는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라즈베리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부여잡았지만, 강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싸늘하게 내뱉었다.

“놔라.”

“으아….”

화들짝 놀란 라즈베리는 덜덜 떨면서 셀레나를 돌아보았다. 제발 어떻게 좀 해보라는 의미로 말이다.

그녀가 이렇게 분노한 모습을 그녀는 본 적이 없었다. 보통 마법사는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면 오오라가 함께 하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분노는 다르다.

보통사람과 똑같이 아무런 징조도 없지만…. 어떤 둔한 인간이라도 느낄 수 있는 살기라 부를 만한 걸 뿌려댄다. 당장 옆자리에 있던 커플들 역시 그 낌새를 느끼고는 깜짝 놀라서 구석 자리로 몸을 붙이고 있었다.

야생 동물, 그중에서도 맹수들이 내뿜곤 하는 본능적인 위압감을 이 여자는 사람의 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강호는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서 분노가 극에 달했다. 몇 년이나 걸려서 간신히 만난 친구가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당황스러우면서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민주희는 세상 누구보다도 선량하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행복하게 살아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겪을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을 이런 형태로 무너뜨리려 하다니?

단순히 잠시 바람을 피운 것이라면…. 그녀도 쉽게 화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 자신의 입장부터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희주의 허락하에 천후의 애인이 되어있는 몸. 그때는 좀 더 조심해서 주희의 의향을 알아보며 행동했으리라.

그러나 지금 저 남자는 아예 그녀를 도구 이상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 적은 있기나 할까? 그런 것은….

화악! 손에 힘을 줘서 라즈베리를 떨쳐낸 그녀는 큰 발걸음으로 그에게 향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잠깐만, 언니. 참아.”

“너까지 나를 말리지 마라.”

“어떻게 안 말려? 뭘 어쩌려는데? 지금 여기서 저 남자 머리를 반으로 쪼개면 언니 친구라는 사람이 좋아할 거 같아?”

“하지만 저 남자는!”

“알아! 알겠으니까…. 지금은 참아. 내가 무난하게 처리할게. 응?”

급하게 달려와 허리를 부여잡은 셀레나를 본 강호는 한 번 몸을 파르르 떨다가 몸에 들어간 힘을 뺐다. 그러자 온몸이 덜덜 떨리게 만들던 살기가 흩어졌다.

남자를 패 죽일 기세던 강호는 한 번 행동을 멈추자 대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그렇게 앉아있었다.

“언니….”

그 마음은 알고도 남는다. 자신 역시 비슷한 처지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녀의 ‘방식’은 현대 대한민국 사회에선 너무 거칠고 뒷수습이 힘든 방법이다. 게다가 간신히 되찾았다는 우정에도 금이 가게 되리라.

당장에라도 울 것처럼 기운이 빠진 그녀를 보고서 셀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늘었네.’

그것도 꽤 중요한 일이.

셀레나는 대화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호프집을 나서는 남녀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주 싸늘한 눈빛으로.

*

결국 이강호는 뒤처리를 셀레나에게 맡겼다. 눈앞의 주먹은 가깝고, 두렵지만 그것을 휘두르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DS의 주력 일리미네이터인 이강호는 더욱 그랬다.

그녀의 행동은 그녀뿐 아니라 천후의 위신에도 영향이 간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은 것이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이 지났을 때. 주희로부터 술 한잔 하자는 연락이 왔다. 장소는 그녀가 일하는 곳 근처의 술집이었다.

주희가 있는 자리로 찾아가자, 그녀는 이미 취해서 횡설수설하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그녀의 친구들로 보이는 여자 세 명이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주희야.”

“아~. 강호야아~. 와써?”

“어떻게 된 거냐?”

“하아아아아…. 나 그 남자랑 해어져써어…. 그 나쁜 새끼이이이!!!”

쾅쾅쾅! 식탁을 두드리며 화를 낸 주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고개를 풀썩 꺾었다. 업무 시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는데도, 테이블에는 이미 빈 소주병 여러 개가 놓여있었다.

“안녕하세요. 주희 친구 강호입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 안녕하세요… 그게….”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그녀들은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어느 날 그녀의 애인이 찾아와 갑자기 이별통보를 했다는 것이다. 결혼 이야기까지 나오던 깊은 사이였으니 당연히 주희는 당황했지만, 그는 다짜고짜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 뒤, 주희가 답답한 마음에 알아본 결과 남자는 사기 혐의로 구속당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나한테는 사기를 친 게 아니었는데…. 그럼 마지막까지 함께 해줄 수 있었는데에….”

훌쩍이며 내놓는 말에 여자들은 한숨을 내쉬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이강호는 셀레나가 그녀가 안게 될 마지막 상처를 남기고, 순정을 간직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이후 그가 주희에게 그 감성을 이용하여 접근하지 못하도록 수를 써놨으리란 것도.

사건의 민낯을 그녀가 직접 보았다면 충격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확실히 자신은 이렇게 이끌어 낼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좋은 수완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친구에게 자기 힘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지고 많다. 그것이 슬펐다.

그러나 그때.

“강호야아…. 나 힘들어. 계속 같이 있어줄 꺼지? 이젠 도망 안 가지?”

“…….”

꼭 하고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해오는 소리에 그녀는 작게 입을 벌렸다. 그러다. 아주 약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도망 안 가고말고. 마시자. 마시고 나쁜 녀석 생각은 싹 잊어버려라.”

“좋아! 마셔! 나쁜 자식! 내 기억에서 사라져버려라!”

소리친 그녀는 넘칠 듯이 따른 소주잔을 부딪치면서 한 번에 털어 넣었다. 그녀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강호는 생각했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다. 그를 패 죽이거나, 목을 쳐버리진 못했지만…. 지금 이렇게. 좌절한 그녀를 위로하며 함께 술을 할 수는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것이 셀레나가 자신을 위해 남겨둔 역할이 아닌가 생각하며 강호는 주희와 그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마음 한편으로… 천후와의 관계에 대해 조금은 진지하게 다시금 되돌아보면서.

그렇게.

강호는 그날 이후로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가 조금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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