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그가 내뱉은 한마디에 거실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어른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던 남자의 얼굴 역시 흙빛이 되었다. 천후는 그런 그를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상부상조란 건 서로 어려울 때 돕는 거죠. 당신들은 내가 가장 어려웠을 때 외면해놓고서 이제 와서 나한테 무슨 도움을 바라는 겁니까?”
정말 웃음 밖에 나오질 않았다.
“아까도 말했죠. 난 댁들을 몰라. 진짜 하나도 몰라요. 남남이나 마찬가지라고. 아니 차라리 남남이면 조금 도와줄 마음이라도 들 수 있지. 몇 되지도 않는 혈육이랍시고 갇혀 있을 때 대체 뭐 해준 것도 없으면서 이제 와서 얻어먹으려고 들어? 헛소리도 작작하셔야지.”
평소에 온화한 태도를 보이는 편인 천후에게서 거친 발언들이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말하는 그의 표정엔 노기가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천후는 생각했다.
‘아아. 희주 씨는 나를 너무 잘 알아.’
그동안 희주가 이들이 천후에게 접근하는 걸 막은 것은…. 단지 천후가 속상할 걸 걱정한 것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들을 지켜온 것이다.
조금은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진 나이 때부터, 천후는 줄곧 생각해왔다.
자신에게는 가족이 없는 걸까?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셨단 건 알고 있다. 그건 매일 밤 꾸는 꿈에서 줄창 봐왔으니까. 그분들은 세상에 없겠지.
그렇지만 혈육은 있지 않을까? 사회 상식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 프레이야에게 물으니, 자신 같은 고아가 생기면 보통 혈육, 친족들이 거둬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러나 모두가 거부하면 보호시설로 보내지고, 그는 그 보호시설에 있단 이야기였다. 다만 그는 조금 더 ‘특별한’ 보호소에 있는 거라고.
거기까진 뭐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럼 어떻게 지내는지 정기적인 확인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자신에게 가해지고 있는 이 처사는 알면 알수록 정상적인 보호시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 그의 친인척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항의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무슨 죄를 짓거나 병을 가진 것도 아닌데, 국가가 개입할 수 없는 장소에 감금되어있는 상황이니,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항의를 해야 마땅하다.
유그드라실은 외부 시선에 굉장히 민감한 편이라, 그렇게 행동했다면 적어도 그에 대응하는 행동 정도는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다려도. 아무리 기다려도. 그들이 연락해오는 일은 없었다.
양부가 된 최완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이 천후를 포기했다고 말해주었다.
그것을 천후는 언제나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
원망? 아쉬움? 그런 사무치는 감정은 아니다. 장성하여 지상에 내려오는 그 날까지 그는 유그드라실에서 지낸 나날을 무조건 후회하고 있던 게 아니니까.
다만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이 나를 10년간 방치했으니 그들과 나는 그냥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니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겠다고.
양친의 기일에 찾아갈 변변한 가묘假墓조차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더더욱.
천후의 눈매는 점점 싸늘해져 갔다.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내 친인척이랍시고 입을 놀리지? 좋아. 그럼 재미있는 실험을 해볼까?”
그렇게 말한 천후는 갑자기 일어나 자신을 외삼촌이라고 밝힌 남자의 앞까지 다가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딱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어깨에 손을 올려보려는 동작이었다.
“허억!”
하지만 그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의 손을 세게 쳐내곤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순간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는 급히 천후를 보았지만, 그는 이미 쓸쓸한 얼굴로 자기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친인척에게 도움은 받고 싶지만…. 괴물의 손이 몸에 닿는 건 무섭나 보지?”
이미 그의 말엔 최소한의 존대도 사라져 있었다. 그저 삐딱하게 고개를 눕힌 채 하는 말에 외삼촌이란 남자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흥.”
코웃음을 친 천후는 다시 뒤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이제 분위기는 완전히 일변해 있었다. 그를 만나기만 하면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근거 없는 희망은 완벽하게 날아가고, 말 한마디만 잘못했다간 ‘정말로’ 남아있는 인생이 날아가 버릴 수 있는 현대 문명의 왕을 마주하고 있는 자리로 탈바꿈했다.
그것을 인지하자 다가오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뭘 믿고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바람을 잡았던 외삼촌이란 남자에게 원망의 눈길이 쏠렸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왕의 시험은 시작되고 있었다.
“좋아.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대체 뭐가 얼마나 어려워서 들어왔는지 들어나 보지. 어디 한 번 사연들 말해봐. 한 명씩. 자. 거기 괴물 조카 무서워하는 외삼촌부터.”
“윽….”
거부할 방법은 없었다.
*
영천후의 집에 찾아온 6명의 친인척은 모두 한가족인 것은 아니었다. 50대 남자인 외삼촌과 그 아내, 20대 초반 남자. 이 셋은 한가족이었고, 30대의 남녀는 그의 고종사촌. 10대 여자는 이종사촌이라고 했다.
한 명씩 이름과 나이를 들은 천후는 턱을 괸 채로 외삼촌이란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 차가워서 마주 보고 있자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하다. 그렇지만 세상의 정점에 다다른 저 조카는 쉬이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친척에 대해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는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그대로 그들을 쓸어버릴 만한 사회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두려움에 떨면서 그는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흔한 이야기였다. 5년 전까지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그는 퇴직당한 이후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괜찮게 시작했지만, 건물주와 분쟁에서 진 그는 그걸 교훈 삼아 아예 건물을 사서 가게를 차렸고, 그 결과 상당히 무리하게 자금을 운용하여 허리가 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가게는 어느 정도 돌아가고 있고, 집과 건물을 가지고 있으니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었지만, 주식에 손을 댄 것이 문제였다. 뒤가 없이 주식을 굴리다가 태반을 날려버린 그의 사정은 한순간에 크게 어려워졌다.
그 와중에 천후의 소식을 들었고, 그의 도움을 받으면 이 상황을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 정도 해주는 건 어렵지 않지. 그런데 들어보니 그렇게 어려운 상황도 아닌 거 같은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흑자는 보고 있는 가게가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건물주도 자신이고.
요즘 같은 불경기에 그런데도 힘들다고 하는 건 정말 코웃음 나올 이야기였다. 젊은 사람들일수록 어처구니없어 하리라. 그렇지만 외삼촌은 크게 반박했다.
“그렇지 않다니까! 내 자식만도 셋인데 그 학비만 해도-”
“그럼 다시 당신 상가를 파시고 임대로 장사를 하시던가. 안 그럴 거잖아. 헛소리 좀 작작하세요. 내 눈엔 징징대는 걸로 밖에 안 보이니까.”
애초에 4, 5년 장사한 걸로 상가를 살 정도로 벌었단 시점에서 의심 가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저 양반이 한 말이 전부 사실일까부터 의심되는 상황인 것이다.
아주 너그럽게 저걸 액면 그대로 믿어주더라도, 저 상황은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애초에 상가 임대 수익이 있는 인간이 생활이 어렵다고 징징대다니. 미친 게 아닐까?
그의 아내, 외숙모까지 끼어들어서 사정을 해댔지만, 천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시선을 옮겼다.
그들은 각각 이직 희망과 결혼 자금 지원을 바라고 있었다.
남자의 경우, DS나 어디 관련 기업에 낙하산으로 한자리 꽂혀서 인생 날로 먹고 싶단 의도가 풀풀 났다.
여자는 30대 중반이었는데, 20대 중반부터 직장생활을 했다면서 지금까지 모은 돈이 2천만 원도 되지 않았다. 대학 때 학자금도 부모가 전부 내줬는데도 전혀 돈을 모으지 못한 것이다.
“도대체 염치들이라고 없군.”
천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지만, 진짜배기는 이 뒤에 있었다. 외삼촌의 아들. 그러니까 그의 외사촌인 남자는 천후와 비슷한 나이였는데, 이 중에서 가장 당돌한 얼굴로 말해왔다.
“형 돈 많잖아. 나 가게 차리게 2억 정도 내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
“…….”
사람의 머리통을 보고서 쪼개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정말 난생처음이었다. 툭 튀어나온 저 앞니를 죄다 털어버리면 나불거리는 게 조금 공손해질까?
정말 진지하게 고려해보던 천후는 간신히 그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2억을 쓰는 건 어렵지 않지. 그런데 내가 왜 일면식도 없는 인간에게 그런 투자를 아무 대가도 없이 해야 하지?”
“우린 친척이잖아!”
“그래서? 넌 내가 2억을 주면 그 친척인 나한테 뭘 해줄 생각이냐?”
“어?”
여기서 말문이 막혔단 시점에서 아웃이었다. 차라리 계속 당돌하게 ‘형이 나중에 우리 가게 오면 잘해주고, 사진도 걸어둘게!’ 하면서 넉살 좋게 나왔다면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자신이 가게를 차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고, 투자하면 어떤 성과를 낼 수 있는지 차분하게 어필을 했다면 듣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놈은 그냥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철부지였다. 2억을 준다손 쳤을 때 이놈이 과연 가게를 차리긴 할까? 돈으로 주긴 그러니, 원하는 형태의 가게를 직접 차려주면 그걸 제대로 운영할지부터 의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심한 작태에 혀를 찬 천후는 마지막으로 다른 이종사촌이라는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천후와 눈을 마주치자 덜덜 떨면서 시선을 피했다.
분위기에 압도당했는지 제대로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던 천후는 그러다 다시 그들 전부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야기는 다 들었는데…. 내가 당신들을 도와줘야 할 이유를 전혀 못 느끼겠군. 이 중에서 진짜 힘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여. 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쉰 천후는 그러다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외쳤다.
“당장 내 집에서 꺼져! 내가 더 화가 나기 전에!”
쩌렁쩌렁 거실 전체가 울릴 정도의 일갈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이미 현관 쪽으로 와있는 희주의 배웅을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저택을 빠져나갔다.
“아, 안녕히 계세요.”
유일하게 이종사촌 소녀만이 천후와 희주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을 뿐이었다.
그 뒤. 그들이 대문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천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묻으며, 고개를 위로 치켜들고서 두 눈을 손으로 덮었다.
말하는 것 하나하나 들을 때마다 다 뒤집어 엎고 싶은 걸 참느라 미치는 줄 알았다.
많은 감정에 무딘 편이긴 하지만 천후 역시 사람이다. 친인척에게도, 대한민국 정부에도 그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없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직접 찾아와 하는 말들 꼬락서니를 듣고 나니, 진짜 재기조차 못하게 밟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찾아오는 걸 막지 못해서….”
“…언제부터 연락이 왔던 거예요?”
“트란제비야 시절 때부터입니다.”
“그동안 도와준 적이 있나요?”
“아직 도움을 준 적은 없었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잘했어요. 정말로….”
직접 연락을 받았다면 진짜 무슨 짓을 했을지 상상이 안 간다. 다만 오늘처럼 ‘온건하게’ 끝나진 않았으리라.
“아마 한 번 정도는 더 연락을 하겠지. 희주 씨한테라도 매달리고 싶을 테니까. 그래도 아무것도 해주지 마세요. 이 일로 명망에 상처 입는 것 정도는 감수할 테니까.”
“네.”
그녀가 걱정하던 부분은 짐작할 수 있었다. 친인척을 박하게 대했단 소문이 도는 것을 경계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 때문에 저것들이 자기 부에 묻어가는 것을 보고 넘길 순 없었다.
“이 김에 확실히 정리를 좀 하죠. 차라리 미리 손을 쓰는 게 낫지. 제 친인척에 대한 정보는 있나요?”
“명단 정도는 파악해뒀습니다만, 정확히 어떻게 살고 계신지까지 조사해 두진 않았습니다.”
“그럼 알아봐 주세요. 일단…. 인사하고 나갔던 아까 그 여자아이부터.”
천후는 찾아온 사람 중 가장 어렸던 사촌 아이를 떠올렸다. 들어와서부터 한마디도 못하다가 쫓겨나듯 나갔는데, 생각해보니 그 아이의 사정은 듣지 못했다.
떠올려보면 그녀는 외삼촌의 가족조차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 그녀의 양친이 아니라 직접 와있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도, 마침 희주는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외삼촌이 저택에 찾아오기 전, 누구와 함께 올 건지 희주에게 통보를 해두어 조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분의 성함은 유세화. 이년 전쯤에 양친이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순간. 천후는 표정을 굳히곤 자기도 모르게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혹시나 했던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야말로… 오늘 정말 찾아올만한 이유가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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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2억만~발언은 실화 기반이라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