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82화 (282/324)

282화

<받았으니 베푼다>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다. 유세화는 어린 나이에 그것을 직접 체감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2년 전까지, 그녀는 중산층 가정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 자영업 나락의 시대에서도 장난감 가게를 운영하며 매출을 내고 있었고, 어머니 역시 맞벌이를 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적엔 그녀가 가진 유일한 불만은 양친이 바빠서 제대로 얼굴 보기 힘들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커서 중학생이 되었을 땐, 아빠가 가게 일을 돕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게 불만이었고.

물론 그녀의 아버지가 그걸 마냥 싫어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딸이 자신만의 꿈을 발견하기를 더 바랐던 전형적인 아버지였다.

14살이 될 때까지 그녀는 물질적으로 뭔가 부족했던 적이 거의 없었고, 그건 이후로도 쭉 그럴 줄 알았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날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날이었다. 세화는 부모님이 둘이서만 저녁에 외식해도 되냐고 묻자 어른스러운 척 그러라고 대답했다. 그 대신 집안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때 나눈 통화가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거라곤, 그녀가 어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졸음운전으로 10톤이 넘는 화물차가 부모님이 타고 있던 차를 덮쳤다고 했다. 세화는 장례식이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부모님의 영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너무 훼손이 심해, 도저히 어린 아이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던가.

중학생. 죽음에 대한 개념은 있던 나이였다. 그녀는 울었다. 자신을 사랑했던.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던 양친이 세상을 떠났다는 그 슬픔으로 울었다.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두 부모가 모두 죽었다는 것은, 단지 슬픔의 감정만으로 받아들일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

재산 이야기가 나왔다.

어렸던 세화는 양친과 자신이 얽힌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데도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무지를 탓할 순 없었다. 대한민국의 그 어떤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도 이런 것을 알려주지는 않으니까.

며칠이 지나.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녀가 있는 곳은 이전에 살던 집이 아니었다.

방 세 개에 화장실만도 두 개. 거실이 있던 집에서 원룸으로 바뀌었다. 중학교 1학년. 재산 개념이 희박하던 그녀는 혼자 살게 되었으니 집을 팔아서 작은 집으로 옮겨 주었다는 외삼촌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나 조금 더 머리가 크고. 환경의 변화가 너무 심하다는 것을 깨달아 이곳저곳에 문의해본 결론은 싸늘했다.

상속이란 건…. 포기할 경우 친족에게 돌아간다.

2년 전.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 날.

세화가 양친의 죽음에 슬픔으로 오열하고 있던 그때에.

친족들은 세화에게 상의도 없이 그녀의 이름으로 상속 포기를 신청했다.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설마 어른들이 자신을 속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그녀는 자기 부모님이 남긴 모든 것이 넘어갈 때까지 슬퍼하고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녀의 법적인 보호자는 외삼촌이 되었지만, 그는 전혀 그녀를 돌봐주지 않았다. 생활비를 줄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직접 찾아가 사정했을 때나 있으나 마나 할 정도로 줄 뿐이었다.

서류상으로 그녀는 외삼촌 가족과 동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마련한 여러 지원은 전혀 받을 수 없었다.

학교는 간신히 다녔지만, 생활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중학생 여자아이가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정말 한 손으로 꼽는다.

게다가 보통 부모나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외삼촌은 그녀에게 왜 일을 하려고 하나며 역으로 성을 냈다.

그동안 외삼촌은 운영하던 가게가 권리금 문제로 골치 아파지자, 아예 건물 하나를 사들였다. 그 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다들 쉬쉬했지만, 그녀 역시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살의라는 걸 그녀는 그날 처음으로 느꼈다.

*

고통과 어려움에 익숙해지면, 사람의 감정은 마모된다. 쉬운 길을 찾고 싶어 유혹에도 약해진다.

반 친구 중 몇몇이 좀 더 ‘쉬운 길’을 제시한 적도 있었다. 거기에 유혹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교과서나 선생님이 ‘안 된다’고 늘상 말하는 행위라 하더라도. 당장에 느끼는 돈의 유혹은 강렬했다.

그것을 부모님을 생각하며 참았다. 아버지의 가게가 정리될 때 간신히 몇 개 가지고 나온 장난감과 인형을 보면서 눈물지으며 참았다.

그러다. 외삼촌에게서 연락이 왔다.

외삼촌은 한참이나 아르바이트를 말렸지만, 그녀가 생활비를 직접 벌기 시작한다는 게 자신이 돈을 쥐어 줄 필요가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란 것을 알게 되자 그 이후론 오히려 장려했다.

그 뒤로는 보호자가 필요한 몇몇 일을 할 때를 제외하곤 서로 연락이 끊겼다. 세화는 그를 증오하고 있었고, 그에게 세화는 골칫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TV에서 흘러나오는 광고를 보았다. DS의 광고였다.

대한민국이 배출한 세계의 영웅. 이제 거의 DS가 고유명사 수준이 되어서 일반인 중에선 그의 이름을 모르는 경우도 많았지만, 세화는 알고 있었다.

영천후.

그녀는 종종 어머니가 같은 이름을 입에 올렸었단 걸 떠올렸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커다란 사건, ‘대참사’ 때 희생당한 당신의 언니 가족에 대해 언급할 때….

그녀는 그가 자신의 혈족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물어볼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친척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연락을 피했으니까. 결국 물어볼 사람이라고는 외삼촌밖에 없었다.

그는 처음엔 대답하기 싫어했지만, 어느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번에 그를 만나러 갈 거냐며 같이 올 건지를 물어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그녀의 사정을 읊으며 동정심이라도 얻어 보자는 수작이었지만, 세화에게 있어선 기회였다.

그리고….

끝났다.

세화는 분노한 그의 얼굴을 마주 본 그 순간부터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 말도 못해보고 저택을 나오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세화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인형들을 끌어안고 울었다. 극단적인 생각이 들어 정신을 환기하기 위해 TV를 틀자, 거기에선 때마침 DS 가디언즈라는 만화영화가 5월부터 방영한다는 예고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TV에 인형을 집어 던져버렸다.

자기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였다. 아무런.

*

평일. 학교에 가야 할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그 시간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옷은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녀가 향한 곳은 경기도 산간이었다. 그녀의 양친도 이곳에 묻혀있는 곳. 장은 화장으로 치렀지만, 시신은 봉안당이 아니라 땅에 묻었다고 했다.

세화의 손엔 시내에서 사온 꽃 몇 송이가 들려있었다. 그녀는 부모의 묘에 들르기 전, 선산에서도 가장 구석에 놓여있는 묘비에 먼저 들러 꽃을 내려놓고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늘 이렇게 했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바로는 먼 외국에서 죽어 시신을 찾지 못해 그녀의 부모님이 자비를 들여 묘비만 세워둔 곳이라고 했다.

세화는 어린 마음에 ‘자기 자리에 못 들어가 있네, 불쌍하게’하고 말했던 걸 기억했다. 지금도 비슷한 감상이었다. 묘비만 세워진 묘라니. 여기에 찾아올 사람은 얼마나 슬플까. 아니, 여기에 그들을 기리는 묘비가 있단 걸 알 수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부모의 묘비 앞에 섰다. 나머지 꽃을 내려놓은 그녀는 쌓아놓은 봉분에 손을 짚고는 말했다.

“하아…. 아빠, 엄마. 나 힘들어서 또 왔어.”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을 때마다 이곳에 오곤 했다. 차비와 꽃값만 해도 그녀에게 꽤 큰 지출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힘들다…. 나 둘이 있는데 따라가면 안 될까?”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스산한 바람 한줄기가 지나갈 뿐이었다. 그녀는 이내 주저앉고는 울었다.

아무리 해도 더 나은 내일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그녀는 열심히 노력하며 살고 있었지만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DS를 찾아가기 얼마 전. 그녀는 외삼촌으로부터 그녀가 사는 집을 비워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세금을 빼려고 한다고.

반박을 해봤지만 뺨을 맞았다. 다른 집을 알아봐 준다고 소리를 쳤다. 보증금을 대신 내줄 테니, 월세를 그녀가 내다가 돈이 모일 때마다 보증금을 갚아 나가라고 했다.

그건 최저 시급을 간신히 받고 있는 그녀에게 있어선 삶의 기본적인 요건조차 충족할 수 있는 최악의 환경을 의미했다.

몇 번이나 거부하자, 그렇다면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세화는 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부터… 사촌 오빠를 만날 때마다 보는 눈길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사촌 동생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보는 눈빛.

그뿐만 아니라…. 외삼촌과 함께 살게 되면 그 외에 무슨 일을 당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지금의 삶조차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녀를 잠식했다.

“너무 무서워…. 살아가는 게….”

편해지고 싶었다. 모든 것을 놓고 싶었다. 그녀가 간신히 지키고 있는 윤리에 속박된 그물을 벗어 던지면, 모든 것이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부모님은 사랑한다. 하지만 두 분이 묻힌 이 묘소는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 하소연할 곳 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갈게.”

학교는 빼먹어도. 일은 빼먹으면 안 된다. 점장이 그녀의 사정을 많이 이해해 주고 있는 만큼 더더욱.

돌아가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더 여기서 주저앉을 시간이 없었다.

두 부모의 딸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

“어서 오세요~. 답도날드입니다.”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은 집에서 가까운 패스트푸드점이었다. 하는 일은 주방에서 일하다가, 사람이 밀리면 그때 주문을 받는 일에 투입되었다. 너무 어리다 보니 처음부터 카운터에 세우는 건 점장이 저어했다.

그래도 그녀는 일을 똑 부러지게 잘하는 편이었다. 한 매장에서 일을 오래 한 만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아르바이트생 중 일부는 그녀를 고까워했다.

“세화야. 이번 달에 여유 좀 있니?”

“네? 아니요. 저는 돈 쓸 곳이 좀 있어서….”

“어휴. 중학생이 무슨 돈 쓸데야? 너랑 나랑 월급도 똑같이 받으면 돈이 안 남을 수가 없을 텐데!”

“…….”

특히 얼마 전에 일을 시작한 40대 여성이 그랬다. 차라리 같은 어린 학생들 사이에선 세화는 귀여움을 받았다. 꼼꼼한 데다 일을 잘 아는데도 거들먹거리지 않고 잘 알려줬으니까.

그렇지만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나이를 무기로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거기까진 그렇다 쳐도 문제가 되는 건 그녀가 돈을 빌리고 다닌다는 점이었다.

시시때때로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곤 했는데, 누구도 되돌려 받았단 사람이 없었다. 그걸로 깊게 따지고 들면 언성을 높여대니 버티지 못하고 만원, 이만 원씩 주곤 했는데, 그게 쌓이자 꽤 큰돈이 되었다.

그걸로 눈치가 보이자, 요즘 그녀는 다른 레퍼토리를 들고 왔다.

“요즘 내가 계를 좀 하는데, 이게 완전 대박이야. 세화 너도 맡겨보라니까.”

“죄송해요… 여유가 없어서.”

“어머, 얘가.”

매장에서 유일하게 그녀에게 ‘각출’ 당하지 않은 게 세화였다. 일단 같은 어른인 점장이 그럴 때마다 막아줬던 게 가장 컸다. 하지만 오늘 점장은 본사에 가 있었다. 그동안 그녀는 기회를 노려서 이미 한 바퀴를 싹 돌고 세화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러지 말고. 다른 애들은 다 맡겼다니까?”

“그게….”

세화는 곤란해 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보다 못한 카운터를 보던 여자 알바가 그녀를 불렀다.

“세화야. 나대신 카운터 좀.”

“아, 네!”

먹구름을 가르고 태양 빛이라도 내려온 기분이었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카운터로 다가갔다. 카운터를 내준 알바는 왼눈을 한번 찡긋해 보이고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휴, 희정아. 손님도 별로 없구만 세화를 내보내면 어떻게 하니?”

“화장실 가고 싶은 걸 어떻게 해요? 이모가 빨리 카운터 배우시던가.”

“얘가….”

따갑게 흘기는 눈길을 빗겨낸 여자 알바는 키를 들고 화장실로 향해버렸다.

그동안 세화는 아주 잠깐 찾아온 평화를 맛보았다. 물론 앞쪽엔 손님들로 가득했지만, 그들을 응대하는 건 그녀에겐 간단한 일이었다.

두 명쯤을 상대한 이후, 눈앞에 특이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검은 정장 슈트에 선글라스를 쓴 남자였다. 손에는 웬 꽃 한 송이를 든 그는 카운터 앞에 서서는 주문은 하지 않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 손님?”

대기하는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붐비는 매장이다. 시간을 너무 지체하면 사람이 쌓인다.

당황한 세화가 말을 걸자, 그는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순간, 세화는 어딘가에서 그를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분명. 바로 얼마 전-

“꽃값을 치르려고 왔어요.”

그녀가 스스로 떠올리기도 전에, 선글라스를 벗은 남자. 영천후는 그녀의 손에 들고 있던 꽃을 쥐여주었다.

그것은 그녀가 묘비에 놓아두었던 것과 같은 꽃이었다.

============================ 작품 후기 ============================

오타를 좀 손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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