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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283화 (283/324)

283화

다 큰 성인이 중학교 3학년생에게 꽃을 건네는 장면은 누가 보아도 어색했다. 얼떨결에 그걸 받아든 세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어째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자 천후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일 끝나는 게 열한 시죠? 기다리고 있을게요.”

“네? 아, 네.”

얼떨떨하게 대답한 그녀는 받은 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사람이 밀린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동안 천후는 매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이미 폐장시간이 다가온 시간이다 보니, 그 뒤로도 손님은 뜸했다. 그동안 직원들 사이에선 방금 일을 가지고 한참 웅성거렸다.

“세화야, 저 사람 뭐니? 스토커?”

“경찰에 신고해줄까?”

상황이 상황이었다 보니 다들 그런 식으로 오해를 했던 모양이었다. 깜짝 놀란 세화는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아니에요! 아는 친척 오빠… 사촌 오빠에요.”

“진짜? 사촌 오빠가 존댓말을 해?”

“그, 그게. 직접 만난 건 딱 한 번밖에 없다 보니까.”

간신히 걱정하는 알바들을 진정시킨 세화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흘낏 바라보았다.

이전에 만나보았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적어도 그때 보이던 무서운 느낌은 없었다. 그렇지만 세화는 긴장을 멈추지 않았다.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별하기엔 그녀가 2년 사이에 겪은 일들이 너무 극적이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면 돌아가라고 하자.’

세화는 그렇게 마음을 굳혔다.

그녀가 천후에게 다가올 수 있었던 건 폐점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세화야. 마무리는 우리가 할 테니까 오늘은 먼저 들어가.”

“네? 그래도….”

“됐어. 집안에 무슨 일 있는 거 같은데 얼른 가봐. 전에 너도 나 도와줬잖아.”

“고맙습니다.”

오늘 청소에서 빼준 여직원에게 인사를 한 그녀는 그제야 천후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니에요. 제가 너무 빨리 왔죠. 보자. 가게가 닫았으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긴 그렇고…. 일단 차로 갈래요? 바래다 드릴게요.”

“네? 아….”

세화는 잠깐 대답을 망설였다. 그가 이종사촌이라는 것은 얼마 전에 들어서 알았지만, 그렇다곤 해도 그녀는 한번 밖에 본 적이 없는 남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람의 차에 탄다는 건, 솔직히 무서웠다.

아니 애초에 이 늦은 시간에 잘 모르는 남자랑 같이 다니는 것 자체가 무서운 일이다. 2년 동안 저녁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런 두려움은 많이 마모되었지만, 키가 190은 되어 보이는 남자가 뒤에서 따라온다면 누구라도 무서워하리라.

그 마음을 짐작한 천후는 맑게 웃었다.

“하하하. 걱정 말아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죄, 죄송합니다.”

생각을 읽힌 것 같아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차에 탔다. 보통 천후는 2인승의 스포츠카를 자주 탔지만, 오늘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대형 리무진을 타고 왔다.

세화는 운전기사가 대신 모는 리무진이란 걸 직접 타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후가 직접 차 문을 열어주자 주춤거리며 들어간 그녀는 안쪽을 둘러보며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냈다.

“와아….”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진짜로 부자라는 게 실감이 갔다. 그렇게 놀라고 있을 때 천후가 물었다.

“집 위치가 어떻게 되죠?”

“아. 주소는….”

세화는 무의식적으로 집 주소를 줄줄 늘여놓다가 핫하고 자기 입을 가렸다. 이렇게 무방비하게 실토를 하다니? 그러나 그녀가 말을 주워담기도 전에 이미 리무진은 출발하고 있었다.

‘으….’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하고 아래로 떨궜다. 이러니 외삼촌이나 친인척들이 모든 걸 털어갔는데도 저항하지도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자신의 어리석음에 화가 날 정도였다.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양손을 꼭 쥐며 자신을 책하던 세화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후를 올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이전과는 꽤 다른 분위기였다.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적어도 나쁜 의도를 가지고 온 건 아니지 않을까? 그런 희망적인 관측이 드는 걸 필사적으로 억누른 그녀는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천후 오빠는 왜 절 찾아오신 거예요?”

“…….”

오빠 소리에 천후는 눈을 몇 번인가 깜빡이다 조금 더 큰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자신은 이종사촌 간이다. 나이 차도 5살 차이이니, 오빠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긴 하다.

그는 약간 더 눈매를 부드럽게 바꾸고선 입을 열었다.

“저는… 아니. 내가 오빠니까 그냥 말 놓을게. 괜찮지?”

“네.”

“전에 네가 찾아왔을 때, 세화 너만 왜 찾아왔었는지 듣지 못했었잖아. 그래서 무슨 사정이 있는지 좀 알고 싶었어.”

“아….”

“그리고 사실 그래서. 조금 뒷조사를 했어.”

“네?”

화들짝 놀란 세화가 소리를 지르자 천후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알아보다 보니 조금 일이 복잡하더라고. 아마 지금은 내가 너보다 네 부모님 재산이 어떤 식으로 쓰였는지 더 자세히 알 거야.”

“…….”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 하지만 그 영향이 현실을 살아가는 유세화에게 미치고 있는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

“그건…. 이제 됐어요. 되돌릴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

“…….”

“저, 저는 그런 게 아니라…. 더는 그 사람들이 그 일로 저를 괴롭히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요. 절 더 나쁜 환경으로 끌어들이지 않아줬으면 해요. 아르바이트를 해도 되니까,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지만 줬으면 좋겠어요.”

극단적인 선택지를 고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만 해줬으면 좋겠다.

좀 더 ‘쉬운 길’로 빠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족하다.

그것이 유세화의 진심이었다. 외삼촌이 밉고, 그의 행동을 용인한 어른들은 밉다. 밉지만…. 그들과 싸워서 이기겠단 생각은 언감생심 하지도 않았다.

“그 사람들이 힘을 가졌다는 건, 저보다 머리도 좋고, 세상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있단 건 인정하겠어요. 그러니 제가 죽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게만 해줬으면 좋겠어요.”

“…….”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툭. 투둑. 시트 아래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고개를 떨군 그녀는 어깨를 들썩였다.

천후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가져가다가 도중에 멈췄다. 그녀를 내려 보는 천후의 머릿속은 타들어 갈 것 같았다.

그녀가 지금 꺼낸 이 말은…. 그녀가 항상 가슴속에 담아놓고 있던 소망 그 자체였다.

그 대상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간 이들에게 향하는 절규이자 오열이었다.

눈앞에서 모든 것이라도 쥐여줄 수 있는 사람이 제 발로 나타났으니, 램프의 지니를 대하듯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빌었어도 되련만.

차라리 10억을 주세요. 20억을 주세요. 그런 말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얼마 전 찾아온 외삼촌의 아들처럼 가게를 차리고 싶으니 몇억을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중학생 아이가 입에서 낼만한 말이 아닌가?

그러나 그녀는 지금껏 가슴에 사무친 아픔만을 되뇌고 있었다.

그것만큼 슬픈 일은 없었다.

이제 고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아이가, 자기 자신의 소원조차 모두 잃어버리고만 모습을 보는 것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의 울음은 진정되었다. 천후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눈물을 대신 닦아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꿋꿋하게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러는 동안 리무진은 그녀가 사는 원룸 근처에 멈춰서 있었다. 창 너머로 그것을 확인한 그녀는 리무진에서 내렸다.

“죄송해요. 꼴사나운 모습 보여서.”

“아니야.”

“그래도… 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울어본 거 오랜만이에요. 고마워요.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희미하게 웃는 모습엔 나이다운 어린 티가 남아있었다. 천후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세화야, 잠깐만.”

“네?”

“이거. 두고 갔어.”

뒤따라온 천후는 그녀의 손에 처음 가지고 왔던 꽃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오빠가 가져가세요. 집에 둘 곳이 없어서….”

“아니야. 그래도 하루, 이틀만 가지고 있어봐.”

“네?”

“곧 둘만 한 곳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세화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그 꽃을 받아들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후는 그제야 떨리던 손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본래. 그녀는 오늘 오전에 만나볼 예정이었다. 하지만 학교에는 그녀가 없었다. 조금 더 수소문 하고 나서야 그녀가 부모의 묘소에 자주 찾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서 꽃을 보았다.

‘부모님’의 묘비에 놓인 꽃을.

“세화야. 너는 네가 누렸어야 할 정당한 권리를 포기할 필요가 없어.”

이제 그 값을 치를 때였다.

*

세상일은 정말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다. 세화는 정말이지 그것을 격하게 느끼고 있었다.

“세화 양 아버님께서 장난감 가게를 하셨다고요?”

“아, 네.”

“혹시 세화 양도 그쪽에 관심이 있나요?”

“조금은…. 꼭 그쪽을 막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요.”

“중학생이니까 당연하겠지요. 그럼 혹시 그쪽 관련으로 일거리가 들어오면 해볼 생각은 있어요? 학생이 할만한 일로, 경력에도 도움이 되는 일인데.”

“네? 시급이 얼만데요?”

“시급? 음. 연봉은 한 이 정도?”

“할게요!”

모든 건 사촌 오빠가 다녀간 다음 날. 그녀에게 찾아온 셀레나란 이름의 금발 머리의 서양인 언니가 찾아오고 나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책상 위에 두었던 꽃을 가져온 화분에 꽂은 것. 두 번째는 그녀의 일자리를 알아봐 준 것이었다.

훨씬 더 나은 시급의 일자리를 얻은 그녀는 오랜 시간 신세를 진 패스트푸드점 점장을 찾아가 인사를 했다. 그는 아쉬워하는 가운데,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기뻐하는 요상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가 새로 얻을 일자리는 얼마 후 시작될 DS 가디언즈 관련 상품 판촉 관련 일이었다. 일이라곤 해도 그녀는 아직 어리다 보니 몇 개월은 교육만 받게 될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급격한 변화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유세화의 법적 보호자는 외삼촌에서 영천후로 바뀌었다. 대체 무슨 수로 동의를 얻어냈는지 세화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아서 물었지만.

“음. 세화 양? 세상엔 모르는 게 더 좋은 게 많아요.”

그녀는 빙그레 웃는 얼굴로 그렇게 답했다. 세화 역시 학업과 직업 교육을 병행하다 보니, 다른 쪽에 신경 쓸 만한 여유가 없어, 그 의문은 금세 지워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잊고 지내는 동안, 그녀가 지내던 집 역시 바뀌었다. 혼자 지내는 건 마찬가지니 여전히 원룸이었지만, 부엌과 화장실이 좀 더 넓어지고 베란다가 생겼다.

여기까지 오면 누구의 배려인지야 뻔하니 그녀는 이사를 주저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외였다.

“이거 다 원래 세화 양이 가졌어야 할 돈으로 해주고 있는 거니까 사양하지 마세요. 아. 취업 관련은 그렇지도 않지만. 그 정도야.”

“에? 제가 가 가졌어야 할 돈이요?”

“상속재산. 다 뜯어내 왔거든요.”

찡긋하고 윙크를 보내오는 그녀를 보고서 세화는 더더욱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잘 모르겠지만, 그런 일을 하려면 그녀도 좀 이곳저곳으로 불려다녀야 정상 아닌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건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그 이후로 외삼촌과의 연락은 완벽하게 끊겼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쪽에선. 다만 세화가 개인적으로 조금 알아보자, 그의 가게에서 수많은 정부 지적사항이 나왔고, 상가는 팔렸으며, 그들이 살던 집까지 부동산 매물로 나와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녀의 친인척 중 몇몇은 검찰에게 실형을 구형받았다던가 하는 이야기도 어렵사리 들었다.

그제야 세화는 자신이 만났던 사람이 대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감상도 바쁜 일상에 밀려서 빠르게 잊혀갔다.

*

그렇게 다시 얼마 후.

야간 교육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 돌아온 그녀는 샤워를 하고 늘어져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띵동. 띵동. 갑자기 들려온 벨소리에 세화는 몸을 일으켰다.

“누구세요?”

벌써 10시가 넘었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 화면을 보았다.

“아!”

거기에 비친 사람을 본 그녀의 안색은 일순 환해졌다. 바로 현관으로 달려간 그녀는 도어락을 풀어서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그녀의 눈에 띈 것은 한 송이의 꽃이었다. 그것을 들고 있는 사람이 말했다.

“오늘은 꽂아 둘 데 있어?”

“네!”

그녀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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