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송칠삼의 우울>
엘모세와트 건 이후로 모든 것이 순조롭다.
멸급 디제스터는 일 년 사이에 두 번이나 나왔으니, 아무리 그래도 더 나올 일은 없을 것 같다. 경급이야 이제 와선 문제 되지도 않는다. 유그드라실도 요즘은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있다.
일리미네이터의 기량은 날로 좋아지고 있다. 가장 걱정되던 것은 랭크만 높던 라즈베리였지만, 실종 사건 이후로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
배틀 데이터가 누적될수록 사소하게 다치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어 갔다. 요즘은 정말 무슨 짓을 해도 순삭이 나오고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러니 이 정도면 이제 DS에서 당장 걱정할 거리는 없다는 게. DS 두 명의 공격대장 중 하나 레이나드의 판단이었다.
“후우.”
그렇지만 그의 입에선 지금. 드물게도 한숨이 나오고 있었다. 걱정거리라곤 이제 남아있지 않은 판국에 이런 한숨이라니. 듣기가 오히려 어려울 정도인 상황.
“왜 이리 한숨을 쉬세요. 답지 않게.”
의아하게 생각했는지 다른 공격대장인 정태원이 묻자,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늘 쓰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만, 그 너머로 어떤 눈길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굳이 그 기분을 밖으로 내비쳤다.
“넌 말해도 몰라, 새끼야.”
“와. 이 형님 보소.”
이건 레이나드가 태원에게 종종 내비치는 태도였다. 뭐. 나이도, 경력도 차이 나는 까마득한 형님이니 뭔 소리를 해도 닥치고 들을 수밖에 없긴 하지만, 기껏 신경 써줬더니 이런 반응이라니?
“너무 애송이 취급이 심하신데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너는 공감할 수 없는 문제라니까. 대화를 나눠봐야 소용이 없어요. 요만큼도.”
“와. 화난다! 너무하시네!”
휘휘 하고 대놓고 저리 가라는 손짓에 태원은 성질을 내면서 바닥을 쿵쿵 발로 찼다. 물론 둘 다 조금씩 농담기를 섞어서 하는 발언이긴 했지만, 그 안에 은연중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형님이 무슨 10대 여고생입니까? 피어나는 새싹보고서 우수에 젖어있게? 그건 귀엽기라도 하지. 형이 이러면 되게 궁상맞아 보여요. 막 근처에 풀풀 날린다고.”
“끄응.”
새끼가. 나이 먹고서 고민 좀 할 수 있지, 졸라 뭐라고 하네. 속으로 궁시렁거린 레이나드는 그러면서도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제 40이 되는 그는 일리미네이터 중에서는 상당히 나이가 많은 편이라, 확실히 그가 이러고 있으면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뭔가 고민이 있더라도 남들 시선 별로 없는 데서 해야 하는 것이다. 공격대장이란 자리가 문제이기도 하고.
그동안 저쪽에서 기회를 노리며 기웃거리고 있던 여자, 최성아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레이나드의 얼굴이 굳었다.
“야. 일단 장소를 옮기자.”
“…형님도 여간 아니시네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태원은 그와 함께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했다. 그가 향한 곳은 전력분석실이었다.
배틀 데이터를 계속해서 연구하고 영상으로 재현하며 대처법을 고안해내는 게 일인 곳이었는데, 레이드가 없을 때 두 공격대장이 머무는 집무실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천후도 내려와 있었다.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요? 속이라도 나빠요?”
둘이 집무실로 들어가는 걸 보고 따라 들어온 천후는 레이나드가 다시 한숨을 푹푹 쉬자 그 앞에 서서 물었다.
“아….”
귀찮은 녀석들 둘이 붙었다. 그래도 이 둘이 DS에서 가장 친밀한 사람들이긴 했다. 쩝 하고 입맛을 다신 레이나드는 한 번 자기 얼굴을 세수하듯 양손으로 훑고는 중얼거렸다.
“그렇게 진지한 이야기는 아닌데….”
말 시작은 그렇게 하면서도 깍지를 끼고서 이마를 짚고 있는 게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뭔가 심각한 내용이 나오는가 싶어 둘은 의자를 가져다 가까이 앉았다. 그때가 돼서야 레이나드가 다음 말을 꺼냈다.
“너희… 최성아 씨 어떻게 생각하냐?”
“에이. 뭐야. 그 소리였어요?”
“괜히 진지하게 들었네.”
후욱. 단박에 어깨에서 힘을 뺀 둘은 뭐 그런 걸 물어보느냐는 눈으로 레이나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되려 호통을 쳤다.
“난 진지하니까 제대로 말을 해봐!”
‘아깐 진지하게 묻는 게 아니라더니.’
‘하여간 이 인간….’
한순간 뜻이 통한 천후와 태원은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꼈다. 뭐 그래도 이 사람이 이렇게 고민하는 태도를 보이는 건 처음이다. 둘은 나름 성의껏 대답했다.
“뭐… 나쁘진 않잖아요? 형님이 어린 여자를 바라는 게 아니라면야. 돈도 많고. 형님한테 헌신적일 거 같고. 외모도 그리 밉상은 아니고….”
“화장 벗겨지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천후가 날카롭게 끼어들자 태원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쌩얼은 어떤지 몰라도 하여간 그렇죠. 조건은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요.”
“결혼까지 생각하시는 거라도 뭐… 출산 문제가 마음에 걸릴 순 있겠지만요. 그거 말곤. 음…. 괜찮지 않나?”
둘의 의견은 일치했다. 사실 그들은 레이나드가 최성아를 왜 저렇게까지 피하는지 잘 몰랐다. 일단 도망 다니니까 어울려주고는 있었지만, 종종 보면 저럴 거까지 있나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철벽 태세를 유지해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레이나드가 따로 여자를 만나느냐면 그것도 아니고. 물론 개인 시간에 따로 누굴 만날지도 모르지만, 일단 둘이 보기엔 그런 대상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좀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레이나드는 늘 도망만 다녔다.
“그렇지?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잘됐네요. 언제 한 번 식사약속이라도 잡지 그래요?”
아마 그러면 최성아는 좋다고 달라붙을 것이다. 그날 디제스터가 나타난다면 2초 만에 정리하고 돌아오지 않을까? 그 정도로 그녀의 대쉬는 노골적이었다. 그러나 레이나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가 없어….”
“네? 왜요?”
“형님도 괜찮게 생각한다면서요. 뭔 소리래, 이게.”
“후.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레이나드는 둘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어째. 이 문제에 있어서는 둘 다 영 믿음이 가지 않는 조합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더 질질 끌 수도 없는 노릇이라, 레이나드는 천천히 머리를 뒤로 한 번 넘기고는 입을 열었다.
“이건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지만…. 사실은 딸이 있어.”
“네? 성아 씨가요?”
“진짜 처음 듣는 소린데? 그렇구나. 전 남편이 있었구나.”
애 딸린 여자라면 조금 고민 할만도 하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에.
“아니. 성아 씨는 독신이고… 내가 있어. 딸이.”
“네?”
“네에?”
“지금. 고등학생이야. 2학년.”
둘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과연. 상당히 고민할만한 문제였다.
*
레이나드. 본명 송칠삼. 올해로 마흔이 된 그는… 어렸을 적엔 좀 놀았다. 한창때는 40, 50명을 이끌고 돌아다니곤 하는 알아주는 양아치였다.
하지만 그렇게 막 나가던 그도 여자가 생기자 바뀌었다. 담임과 교사들에게 사정사정하고 빌고 또 빌어서, 간신히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낸 그는 갓 스물에 결혼을 했다. 그의 상대는 천애 고아였던지라 외가 쪽 반대는 없었다.
집안도, 배경도 없는 여자였지만, 칠삼의 부모는 인생 내다 버린 쌩 양아치였던 아들에겐 오히려 과분한 상대라는 생각을 가졌었던 모양인지, 결혼식과 전세, 혼수를 해결해주곤 둘을 축복해주었다.
칠삼은 이후 직접 돈을 벌게 되자 이게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는지 간접적으로나 알게 되었다.
나름대로 정신을 차린 칠삼은 낮은 임금이나마 열심히 벌어다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곧 사랑의 결실을 보았다.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이다.
예쁜 딸 아이였다.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덜컥 손주가 생기자, 양친은 당황했지만 그러면서도 엄청나게 기뻐했다고 한다.
이걸로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그는 열심히 살았다. 집에 돌아오면 자신이 일생 지키기로 한 아내와 그녀를 똑 닮은 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만큼 힘이 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사고가 있었어. 10년 전쯤에.”
그는 자신의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렸다. 이야기를 듣던 둘은 흡 하고 짧은 숨을 들이켰다.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말로 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레이나드는 하하 하고 짧게 웃다가 계속 말했다.
“그 뒤론…. 몇 년 정도 정신이 나갔었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었지. 디제스터를 잡느라고 말이야. 조금 정신이 돌아오니까 나도 업계에선 꽤 이름을 날리고 있었어. 날 존경한다는 놈도.”
레이나드는 태원에게 턱짓을 한번 했다.
“몇 명 정도 생겼고. 나름대로 배울만한 점이 있었나 봐. 이 업계에서 레이나드는 말이야.”
당연했다. 그는 10년 전, 디제스터가 막 나타났을 때 복면을 하고서 시민을 구해냈던, 보수조차 없이 괴물과 싸워왔던 초기 일리미네이터 중 하나였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나타났던 많은 경급 디제스터를 상대로 공격대장직을 수행해왔다.
업계의 누구라도 존경할만한 대상이었고, B 랭크들도 뭣 모르는 애송이들 말곤 그를 존중하곤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로는 아니었지. 난 쓰레기였어.”
그의 음성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일리미네이터 초기에는 임금이 안정적이지 않았다. 아니, 임금 이전에 언제 체포를 당할지부터 걱정해야하는 판이었다.
이제 막 열 살이 된 딸은 매일 같이 자리를 비운 그 없이 홀로 자랐다. 그나마 그의 양친이 딸을 돌봐주었지만, 그들도 부친은 8년 전에 돌아가셨고, 모친 역시 그를 뒤따르듯이 한 해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레이나드는 상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날뛰며 돌아다녔다. 그 대가로 업계 사람들에겐 존경을 얻었지만. 그만큼….
“아이가 자라는 데에 필요한 건 돈이 다가 아닌 거야. 당연한 건데…. 막상 내가 그걸 진짜로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았어. 그때가 되었을 땐, 이미 난 그 아이를 마주할 면목이 없더라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둘은 숙연해졌다. 이건 그가 정말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자신의 사연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라면… 확실히 재혼 같은 걸 생각하기는 힘이 들리라.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천후였다.
“따님하곤 같이 살고 계세요?”
“아니…. 따로 살아. 원래는 같이 살았었지만… 도망 나왔어. 내가. 그 아이를 보면서 일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거든.”
“이 양반아….”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은 정태원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마 그 도망 나왔을 시절부터 금전적인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활비만 부쳐준다고 그걸 부모라고 생각할지의 여부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레이나드는 둘 앞에서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서 낮은 목소리를 냈다.
“나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 이제 와서라도 되돌리고 싶어. 그러니 모든 관계에 있어선 그 아이가 가장 우선이야.”
“지금에라도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래. 그래서 최성아 씨와 쉽게 가까워질 수가 없어. 내 나이 마흔이다. 누구와 만난다면 이제 진지한 관계를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렇지만 그 아이에게 죽은 애 엄마는 아직 가슴속에 남아있지. 내가 부족했던 만큼 더욱…. 고등학생이면 다 컸다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지당한 문제였다. 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성아 씨한텐 미안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문제네요…. 그럼 요즘은 따님을 좀 찾아뵙고 그러세요?”
“…….”
순간 레이나드의 입에서 말이 뚝 끊겼다. 동시에 둘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마른 침을 삼친 천후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예요?”
“작년. 삼월.”
“아아아아….”
“이 양반아…. 이 몹쓸 양반아….”
집무실 안에선 장탄식이 흘렀다.
한편, 같은 시간.
“…흑.”
집무실 문밖의 벽에 붙어서 서 있던 한 사람은 흘러나오려는 울음소리를 숨기며 전력분석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