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285화 (285/324)

285화

업무 시간이 끝나고 회사에서 나온 레이나드는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머무는 곳은 다름 아닌 DS에서 마련한 직원 아파트였다.

일본에서 오로치를 상대하고, 장기 해외 레이드를 치르면서 DS에선 직원들이 제대로 출퇴근하는 것조차 힘든 환경이 생길 때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서는 근처의 미분양 아파트 단지를 통째로 사들였다.

직원이라면 누구라도 최소한의 계약금만 내면 들어와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돈 많은 일리미네이터보다는 일반 직원과 그 가족들이 더 많이 사는 아파트였다.

그 앞에 있는 마트와 상가들이 은근 꿀을 빤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중 상당수가 DS 소유라는 것도. 좀 더 커다란 사내 자판기라고나 할까?

레이나드는 그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본사까지 걸어 다녀도 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계속 일에 엮여있단 생각도 들었고.

“후우.”

거실에 앉아 돌어오는 길에 마트에서 캔맥주를 사온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캔을 땄다. 레이나드는 안주도 없이 그걸 꿀꺽꿀꺽 목 울림소리를 내며 원샷해버렸다.

“크아. 빌어먹을 자식들.”

자기도 모르게 욕지기를 내뱉은 레이나드는 퇴근하기 전. 둘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자기 사정을 밝히자 천후와 태원은 그를 아주 가루가 될 때까지 비난했다. 솔직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듣고만 있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열이 받았다.

“지들이 내 맘을 어떻게 안다고.”

으득으득 이를 간 그는 순간 손에 힘을 줘서 들고 있던 맥주 캔을 찌그러뜨렸다. 레이나드는 시선을 내려 그 모양새를 바라보았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훗.”

뭔 생각으로 화를 내는 건지 자기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그냥 가슴이 먹먹하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그런 와중에, 천후가 마지막에 그에게 던진 말이 떠올랐다.

‘형님. 제가 감히 형님한테 뭔가 말씀드릴 처지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한 말씀만 올리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위험하잖습니까?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다간 평생 후회할 수도 있어요.’

그것이 ‘어느 쪽’의 평생인지, 그는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레이나드 역시 그 설명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레이나드는 착잡한 마음으로 찌그러진 맥주 캔을 내려 보았다.

“해야 할 일이라.”

피해왔던 일.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해야 할 일. 그 시점을 언제로 잡는가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었다.

그 자신의 마음.

“녀석의 말이 맞아.”

DS가 안정화되면서 위험성은 크게 줄었지만, 다시 언제 어떤 디제스터가 나타날지 모른다. 이그네스 같은 디제스터가 또 나와서, 이번엔 인간을 거침없이 공격한다면 그땐 꼼짝없이 죽는 일만 남을 것이다.

그렇게 죽어버리면 후회밖에 남지 않을 거다. 그래도 죽는 자신이야 뒈졌으니까 그나마 덜하겠지만…. 마지막까지 제대로 얼굴 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홀로 남은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맥주 캔을 한쪽에 모아놓은 분리수거용 상자에 던져 넣은 그는 외출할 준비를 했다.

*

오랜만에 차를 타고 찾아온 딸이 사는 집은 DS 본사에선 상당히 멀었다. 그것은 곧 그와 그만큼 먼 거리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면서 그걸 깨달은 순간, 레이나드는 자기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후우…”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는 근처에선 꽤 알아주는 고급 아파트였다. 아파트 건물 중앙 입구부터 주민만 가지고 있는 카드 키가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물론 딸과 오래 떨어져 살았다지만, 그 카드 키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지갑을 들어서 인식 장소에 댔다.

…….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인상을 찌푸린 레이나드는 몇 번이나 대보다가 아무리 해도 되지 않자 지갑 안을 뒤져보았다. 그 안에 카드 키는 없었다. 당황한 그는 차로 가서 뒤져보았지만, 그쪽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

순간 레이나드는 그 카드 키를 이전 딸을 보았을 때, 그녀의 집에 두고 나왔다는 걸 떠올렸다. 그날 입고 있던 코트 주머니에 넣은 채로 말이다. 다음에 다시 올 때 가져오자는 생각을 했었다. 그게 벌써 일 년 전의 일이다.

곤란해졌다. 레이나드는 도로 입구 자동문 앞에서 석상처럼 굳었다. 이제 방법이라곤 호수를 누르고 인터폰으로 호출하는 방법만 남았다. 혹은 다른 사람이 오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가던가. 그러고 싶진 않았다.

만약 그랬는데 딸이 집에 없으면? 혹은 화가 나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열어준다 치면…. 그 아이에게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하지? 애초에 나는 무슨 염치로 이곳에 얼굴을 비치러 왔단 말인가?

한 번 행동이 막히자 모든 것들이 막막해졌다. 고개를 떨군 그는 다시 한 번 발을 빼려고 했다.

‘다음에 다시 오자.’

생각해보니 먼저 전화 연락이라도 했어야지, 이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다고. 그런 그럴싸한 합리화를 시도하며 그가 몸을 돌리려 할 때.

“거기서 뭐 하세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

일 년 전에 들었을 때와는 또 조금 달라져 있었지만, 그는 그 순간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예빈아.”

“오셨어요?”

송예빈. 그의 고등학생 딸이 와있었다. 키는 160 중반 정도였지만, 비율이 워낙 좋아서 더 커 보이는 아이였다.

뒤로 올려 묶은 말총머리와 차분한 인상이 조화를 이루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났는데도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학교에서 막 돌아오는 길인지 여전히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장을 보고 왔는지 손에는 이런저런 비닐 봉투들이 들려있었다.

그녀는 레이나드가 자기 이름만 한 번 부른 채 굳어있자, 말없이 그를 지나치더니 문을 열면서 말했다.

“들어오실 거예요?”

덜컹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질문은 마치 자신이 그냥 그대로 가버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물은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레이나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문이 닫히기 전에 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

레이나드의 딸. 송예빈이 사는 곳은 아파트 6층이었다. 레이나드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그녀는 무거운 짐을 든 그 상태로 도어락을 열어서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광경을 보는 레이나드는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들어줘야 했는데.’

예빈은 아직 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레이나드는 스스로 자신에게 벌점을 쌓아나갔다. 잠깐만이라도 장 봐온 물건들을 들어주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는가. 아빠한테 줘보라는 그 한 마디를 저 모습을 볼 때까지 떠올리지 못하다니.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먼저 들어온 그녀는 꺼져있는 거실 불을 켜고서는 짐부터 정리를 했다. 그동안 레이나드는 멍하니 건물 안을 돌아보았다.

방 두 개에 거실이 있는. 혼자 살기에는 조금 큰 집이다. 그녀는 평소에도 관리를 잘해놓고 사는지, 거실은 어지럽혀진 구석이 없이 깔끔했다.

“앉아 계세요.”

“어? 그, 그래.”

낭랑한 목소리에 레이나드는 명령이라도 들은 것처럼 멍하니 소파에 앉았다. 그동안 예빈은 커피를 타 와서 그에게 넘겨주었다.

“고, 고맙다.”

“…….”

예빈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머릿속이 순간 탈색되었다. 여기까지가 끝이라니. 순간 자기도 모르게 컵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치솟듯이 일어난 레이나드는 그녀의 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건 싫었다. 아무리 일 년 만에 찾아온 못난 아비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방문 앞까지 다가간 순간.

달칵. 문을 열고 나온 예빈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비켜주세요.”

“안 돼.”

“…….”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꺼냈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예빈은 맑은 눈동자로 선글라스 너머의 그를 올려보며 다시 한 번.

“비켜주세요. 씻어야 하니까.”

이번엔 뒤에 더 내용을 붙여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그는 예빈이 다른 옷가지를 들고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착각한 것이다.

“아….”

“아니면 먼저 화장실 쓰실 거에요?”

“아, 아니.”

“그럼 좀 씻을게요.”

“그래….”

순간 안도감에 기운이 확 빠져버린 레이나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거실의 소파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얼굴을 양손으로 덮었다.

“하아아….”

너무 긴장했다. 그의 꼴조차 보기 싫어서 방으로 들어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격지심 때문에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그녀는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는데 말이다.

좀 더 자연스럽게 대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이야 하고 있다. 생각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0년. 10년이다. 그가 자신의 딸, 송예빈에게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그 어렸을 적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마주하고자 하는 딸은 클 만큼 큰, 머리만은 어른 못지않게 다 자란 여고생이다.

전혀 모르는 미지의 존재가 될 때까지 그녀에게서 도망쳐온 것이다. 간신히 뒤돌아보니, 열 살 아이는 불쑥 커서 전혀 다른 아이가 되어있었다.

그 죄책감과…. 자기도 모르게 느끼고 마는 생소함은 그를 옥죄었다.

그렇게 그가 괴로워하는 동안, 예빈은 샤워를 마치고 잘 때 입는 파자마 복장으로 거실로 나왔다. 레이나드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올려보았다.

이렇게 보면 놀라울 정도로 세상을 뜬 아내의 젊은 시절을 똑 닮았다. 그것은 확실히 그녀가 레이나드… 송칠삼이 딸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그때마다 그의 가슴이 욱신욱신 쑤셨다.

한편, 예빈은 그런 레이나드를 마주 보며 물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응? 응.”

간단한 질문에 간단한 답이 오갔다. 그 이후. 둘 사이에선 다시 대화가 끊어졌다. 집 안엔 정적이 감돌았다.

그가 와서인지, 아니면 본래 즐기지 않는지 그녀는 거실의 TV조차 틀지 않고 소파의 반대쪽 끝에서 그저 앉아있었다. 그렇게 시간만 계속 가고 있었다. 레이나드는 초조해졌다.

‘할 말이…. 없다.’

그녀를 만나서 머릿속이 새하얘졌기 때문에? 그것만은 아니다. 그녀와 나눌 공통의 대화 소재가 전혀 없는 것이다. 기껏 찾아와서 일 이야기나 할 순 없는 법인데, 그렇다고 그녀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조차 전혀 모른다.

틱. 틱. 벽걸이 시계의 초침이 가는 소리가 그를 압박해왔다. 뭐라도….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그는 그래서 무난하다 싶은 질문을 던졌다.

“학교는 잘 다니고 있니?”

“네.”

“성적은 어때?”

“성적표는 보내드리고 있을 텐데요.”

간단하게 돌아온 대답이었지만, 레이나드는 말문이 턱 막혔다. 예빈이 보내는 눈빛을 차마 마주 볼 수 없었다.

‘모른다.’

바로 작년까지 예빈은 성적표를 우편으로 보내오곤 했었다. 그런데 작년 빌라이저가 제공하던 오피스텔에서 DS 직원 아파트로 옮길 때, 레이나드는 학교에도, 예빈에게도 바뀐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머릿속이 다시 한 번 탈색되었다. 눈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레이나드는 시선을 피했다.

한 번 눈을 깜빡인 예빈은 정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반에서 10등 정도 해요.”

“그…렇구나.”

그것을 마지막으로 둘 사이에서 대화가 끊겼다. 2시간 이상…. 계속.

레이나드는 자신의 실책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를 마주할 자신이 이제는 터럭도 남지 않았다. 그는 마치 설원에라도 온 것처럼 몸을 덜덜 떨었다.

그러다. 완전히 늦은 밤이 되었을 때, 그녀가 물었다.

“주무시고 가실 건가요?”

그 말에…. 레이나드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숙인 고개는 다시 들어 올리지 못했다.

그는 말없이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아버지. 잠깐만요.”

덜컥. 그 한 마디에 그의 몸이 얼어붙었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 말은 마치 언령처럼 그를 그 자리에 속박했다.

레이나드를 멈춰 세운 예빈은 자기 방에 들어가는가 싶더니 다시 나와서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의 손에 무언가를 들려주었다.

“두고 가신 물건이요.”

“…그래.”

그것을 받아든 레이나드는 그대로 도망치듯.

아니 정말로 집 안에서 도망쳐 나왔다.

문밖으로 나온 그는 엘리베이터조차 타지 않고 계단을 뛰어서 내려와, 차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허억… 허억….”

그는 숨조차 고르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어,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급하겐 자신이 사는 직원 아파트로 돌아왔다. 간신히 자기 혼자 사는 집으로 돌아온 그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숨이 가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에겐 아직 자각이 없었다. 그저 그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멀어졌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러나 자각은 불현듯 찾아들었다. 한참이나 숨을 고르던 그는 멍하니 딸이 마지막에 그에게 챙겨준 물건을 내려 보았다.

그것은 그가 작년, 그녀의 집에 두고 갔었던 코트였다. 엉망진창인 상태였던 코트.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주머니 안쪽을 뒤져 보았다.

그 주머니 안에는 그의 카드 키가 여전히 들어있었고.

코트는 깨끗하게.

아주 깨끗하게 다려져 있었다….

“나는 정말…. 몹쓸 아비다….”

선글라스 아래로 눈물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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