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천후는 그녀가 말한 단어를 기억했다. 이전, 들은 적이 있었다.
유그드라실.
자신이 가장 믿는 세 사람 중 한 명에게서.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동안 친란은 설명을 계속했다.
“사례들을 조사한 결과 루스트 그윈들링은 그런 신역에 자연스럽게, 혹은 우연히 도달한 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요즘은 그들을-”
“네츄럴 소스.”
“흠? 알고 있었나?”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알 것 같았을 뿐이야.”
란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지만, 대답해줄 기색이 아닌 것 같아 본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 역시 그런 네츄럴 소스 중 하나와 만났던 것 같더군. 하지만 그들의 접촉은 너무 극단적인 단면적인 접촉이었네. 특히 강호 양과 같은 진리구현자의 경우엔 너무 난이도가 높지. 전 인류가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룬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니 다른 방식이 필요했다….”
“그렇네.”
인간이 의도적으로 신에 닿게 하는 작업. 그것은 개인으로는 무리였다. ‘인류’라는 종족 전체의 의사를 강제로 하나로 통합해 접속해야 한다.
“알자드에게 걸려있던 스펠 쉐어나, 모리나 그윈들링을 통해 만들어진 레졔나 시리즈의 정신 연결 역시 전부 그 발상을 이루기 위한 시도 중 하나였네.”
마법적으로 일종의 정신적인 그룹을 만들어, 그 상태를 인류의 공동체적 영역까지 함께 발을 들이게 한다.
이 영역으로 들어가면 이미 인류와 ‘신’은 접합해있는 상태로 보았고, 거기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본 것이 스펠 쉐어라는 가시적인 성과였던 것이다.
“모리나와 레졔나…. 라즈베리 미키스트리의 정신 연결은 그 인류 사념 통합체에 이르는 초입 단계였다고 보면 되네. 하지만 거기에서 도무지 더 발전하지 않았지.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기계 인격 루스트 그윈들링의 추론이네만…. 그는 라즈베리를 통해 신과의 접촉할 수 없는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네.
첫째. 정신 링크의 규모가 부족하고, 유전자적인 동일성을 가진 이들만으로 링크를 만든 결과 인류의 공동체적 영역에 완전히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론… 이미 완성체가 있어서 접속 자격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결국 간단하게 말하자면, 엘모세와트의 진정한 목적은 전 인류의 마법사화. 그 방법론으로 인류 의식을 일체화시켜 누군가 하나를 ‘신인神人’으로 만들어 신에게서 힘을 받아오겠다는 것이다.
전 인류를 물리적으로 하나로 합체시킬 수는 없으니, 정신적인 영역에서 그것을 시도해왔다. 그런데…. 수십 년간 그걸 연구해왔던 이들보다 더 빠르게 그 결과물을 낸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말도 안 돼…. 만약에 그게 가능한 집단이 세상에 있다면 그건….”
“유그드라실 뿐이지. 지상에 아무런 기록물도 남기지 않을 수 있고, 마법사에 대해서 누구보다 더 정확히 아는 기관은 그들뿐이니.”
맞닿은 둘의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추위가 느껴졌다. 그 불길함에 몸을 떨면서도 천후는 부정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럼 이미 진작에 전 인류가 마법사가 되어 있어야지.”
“그 부분에서 의문이 남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유그드라실을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거네.”
“…….”
천후는 말이 없어졌다. 란은 그런 그를 올려보다가 가만히 그의 몸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게. 이것은 어디까지나 엘모세와트의 추론에 불과하니까. 그들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냈다지만, 그 모든 것이 모두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네. 그들은 수많은 ‘가정’을 기초에 두고서 ‘추론’을 한 것에 지나지 않아.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지.”
“그래. 알고 있어.”
알고 있다. 이들의 가설은 허술하다. 마법사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남긴 자료들은 정말이지 극소수이다. 덕분에 마법사 연구자들 사이에선 신처럼 추앙하는 루스트 그윈들링의 주장조차 ‘이론’이 아닌 ‘가설’의 영역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현대 과학의 눈으로 보자면 저건 가설이란 명칭조차 붙이기 어려운 헛소리 모음집에 지나지 않는다. 쓰레기 같은 자료라고 해도 좋으리라.
그러나 그 쓰레기를 모아서 연구를 했더니 뭔가 결과가 나와 버렸다. 연결성이 있는 결과가…. 그것이 불안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후의 불안을 자극하는 것은 다른 데에 있었다.
‘유그드라실 역시 비슷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천후는 이전. 이그네스의 리미터를 만들면서 고인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때 그가 주장했던 내용과 엘모세와트의 마지막 데이터의 내용은 상당한 유사성을 띄고 있었다.
최완 역시 유그드라실이 마법사에 대해 연구했다는 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무언가 부산물이 태어났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 않은가?
그것을 과연 그들이 제대로 수습했을까? 과연?
“…….”
그들에 대한 믿음은 얄팍한 유리와 같아서…. 의심을 시작하자 쉽사리 부서져 나갔다. 그 부서진 자리를 힘겹게 손으로 가리며, 천후는 옆에 누운 친란을 끌어안았다.
두려운 듯이. 몸을 떨면서.
‘이런….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진 않군.’
완전히 그의 품에 들어와 버린 친란은 놀란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금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
다음날.
천후는 엔체스터 가에서 마련한 사교회에 참석해 미국 여러 유력 정치인과 기업가들을 대면했다. 옆자리에는 친란, 로자미아 엔체스터를 대동하고서.
그녀가 그의 애인이라는 것은 미국 정, 재계에서는 공공연하게 퍼져 있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그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애석해했다.
일단 기쁜 건, 그녀가 그의 옆에 있음으로써 미국의 안전에 이바지한다는 점.
안전이란 모든 부의 기틀이다. 그들이 아무리 인류 문명을 손아귀 위에 올려놓고 체스를 두고 있는 것 같이 행동하더라도…. 실제로 발밑이 무너지고 괴물이 튀어나오는 일상이 계속된다면 도저히 버틸 수 없다.
사회적인 안정이 있고 나서야 안정적인 축재도 가능한 것이다. 그는 존재만으로도 안전을 상징하는 자였다. 누구라도 환영했다.
다만 애석해 하는 점은 그 옆에 있는 여자가 자신들 딸, 조카, 손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미 그 옆자리에는 많은 여자들이 포진해 있어서, 쉽게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영천후가 좀 더 호색한이어서 여자라면 달라붙는 대로 마구 자버리는 남자였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는 자신의 애인들 외에는 함부로 허리를 놀려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로비’할 구석이 줄어든다. 혈연관계가 되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로비인데 말이다.
그가 가진 재산 규모는 여기에 모인 자들에 비하면 대단하지 않았지만, 그의 변심 하나로 그들이 가진 재산이 망가질 정도의 ‘힘’이 있었다. 그 힘이 그를 갈구하게 만들었다.
그 적나라한 광경을 보고서 친란은 펼친 부채 속에서 더욱 짙게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어찌 아니 그럴까. 오늘만큼 즐거웠던 적도 드물다네.”
천후에게 들이댔다가 튕겨 나간 여자들이 보내는 시샘의 시선이 즐겁다. 노인들이 그런 그녀들을 구석으로 데려가 질타하는 광경에 몸이 짜릿하다. 그녀의 다른 여자들은 이런 면에서 조금 둔감할지 몰라도, 란은 이런 상황에서 희열을 느꼈다.
“음. 역시 대붕 위에는 일찍 타고 볼 일이지.”
“?”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천후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란은 대답 대신 주변에 보란 듯이 그 팔에 더욱 달라붙었다.
그러는 동안. 천후는 저쪽에서 낯익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셀레나를 미니로 줄여놓은 것 같은 소녀가.
“아. 프리니.”
그녀를 본 천후는 반가워하며 다가갔다. 순간 그녀의 주변에 있던 남자들이 놀라 접근을 막으려고 했지만, 프리니는 제지하듯이 손을 들며 말했다.
“사람 얼굴 정돈…. 이제 익혀두세요. DS입니다.”
“헉.”
“죄, 죄송합니다.”
그녀는 머니 크래프트의 실질적인 수장. 신변의 위협을 대비해서 늘 일리미네이터 몇이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너무 충성심이 과하다 보니 막지 말아야 할 사람도 막을 때가 있곤 했다. 지금이 그랬다.
하지만 사정을 알고 있는 천후는 오히려 그들에게 수고한다는 듯이 눈인사를 해주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네. 잘 있었어?”
“네…. 천후 옵빠.”
“옵빠?”
“어떻게 불러야 하나…. 배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웬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거기엔 영한사전 앱이 떠 있었다. 가볍게 웃은 천후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파티엔 자주 참석하는 거니?”
“할머니는…. 늙어서 아프고. 엄마는 바쁘니까…요.”
보통 사람들이 알기에 머니 크래프트의 마스터는 그녀의 모친인 제이나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바쁘다는 핑계로 이런 사교회 참석은 모두 프리니에게 넘긴 상태였다. 이것은 루셀 가의 후계자 구도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런 사정까진 짐작하지 못한 천후는 그저 호오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함께 회장을 돌아다녔다. 그러자 순식간에 다시 그에게 눈길이 쏠렸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만 같이 듣고 있는 란만 묘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거 또 소문이 묘하게 돌기 시작하는군.’
좋게 생각해야 할지 아닌지, 이번만은 그녀도 판단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일단 양상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와중에 프리니가 먼저 질문을 던져왔다.
“옵빠. 질문이요.”
“응? 네가 물어볼 것도 있니?”
“모든 거 다 아는 거… 아녜요.”
뾰로통한 얼굴로 그렇게 쏘아붙인 프리니는 그러다 머리카락을 베베 꼬아대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손가락으로 살짝 짚으면서 말했다.
“이번에…. 대통령이랑 텔레포테이션 협약. 끝났다고 들었어요. 그럼 최초로 어디에 도입…할 거예요?”
순간 웅성거리던 회장이 순식간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지금까진 드문드문 던져지던 시선이 한순간에 쫙하고 천후에게 몰렸다. 그 기색을 느낀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흠칫했다.
“으, 응? 아직 협의 중이라 완전히 정해지진 않았는데? 워싱턴 D.C야 확정이지만.”
미국의 경우 그 땅덩어리가 워낙 넓다. 대한민국만 해도 ‘도’ 단위로 텔레포터를 배치해서 운영하고 있을 정도니, 이걸 미국 전토에서 구현하려면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게 되리라.
이 때문에 천후와 미국 측은 일단 몇 개 주에서만 먼저 시험적으로 돌려보다가 천천히 확대해갈 생각이었다. 아마 아무 외압이나 로비가 없었다면, 대충 워싱턴을 중심으로 직경 몇백 km가 그 영향권이 되었으리라.
그런데 지금 그 로비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친목질이라는 로비가.
천후의 말을 들은 프리니는 한 번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만, 자기 검지를 서로 콕콕 마주 대면서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보았다.
“그럼요. 프리니가 부탁하는데 몇 군데만 시범지역에 포함해주면 안 돼요?”
“어? 으음….”
혼자 결정 내릴 문제는 아니었다. 원형에서 형태가 변할수록 미국 측에서 들일 초기 비용이 늘어날 테니까. 그런 이성적인 생각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네? 옵빠. 제발요.”
꼬옥. 허리춤을 안아오면서 초롱초롱 올려보는 눈을 보자니 이성이 약간 흐릿해졌다. 그 모양새가 귀여운 나머지 천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으음. 그럼 그럴까? 어딘지 말해주면 일단 말은 해볼게.”
“!!!”
순간. 조용해졌던 회장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전의 10배쯤.
‘페도필리아….’
‘로리콘….’
‘증손녀. 증손녀를 데려와라! 어서!’
드문드문 들려오는 노골적인 발언에 친란은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려서, 배를 잡고 간신히 소리 죽여 웃었다.
‘아아아. 즐겁구나. 나를 너무 즐겁게 해주는 게 아니냐?’
그러는 동안 프리니는 그의 손을 부여잡고는 다른 이들을 둘러보며 ‘흥!’하고 승리의 콧김을 내쉬어 보였다.
안타깝게도, 홀로 그 분위기를 파악 못한 천후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후. 천후가 참가하는 사교회에는 수많은 초, 중학생 어린아이들이 나와서 그에게 애교를 부렸지만, 그는 정말 귀여워만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