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마음을 정할 때>
밤.
태양이 지고 달이 떠올라 어둠에 휩싸인 밤은 과거, 감히 인간은 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신성시되었던 때가 있었다.
얼마 안 되는 기름 등이나 횃불에 의지하여 걷기에는 너무나 짙고 광활한 그 어둠은 도저히 다 밝힐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던 때가.
시간이 지나 오늘날.
그런 믿음이 있던 시절은 이제 먼 과거. 설화와 전설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생각쯤으로 받아들여지는 날이 왔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의 빛은 그들이 살아가는 별. 지구 어디에서나 밝게 빛나, 우주에서 바라보더라도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다 보면, 과연 이 지구의 선도종족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날은 그 설화와 전설이 가장 공존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디제스터.
인간의 상상 속 괴물이 그대로 구현되어 나타난 괴물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나타나 인간의 삶을 위협했다.
이것은 기묘한 불일치였다. 이미 인간은 이론으로만 치자면 세상의 수많은 신비를 전부 흩어내고 모든 진리를 캐냈다고 볼 수 있음에도, 신비의 영역에 있는 알지 못하는 것들이 인간을 해하고 있었기에.
그 기묘함의 궁극에는 인도 뭄바이 한가운데에 우뚝 선 나무.
세계수 악시스 문디가 있었다. 마치 모든 생명체를 굽어보는 것 같이 하늘 높이 자라난 이 존재 자체가 물리학을 비웃는 거대생명체는 전설의 실존을 상징하듯. 이 순간에도 점점 성장하고 있었다.
그 세계수의 끄트머리가 존재하는 성층권 한가운데에는 또 하나의 기묘함의 끝이 있었다.
그것은 눈이었다. 높은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 보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의 눈.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자신만은 모든 것을 파악하겠다는 의도로 만들어진, 발칙하기 그지없는 또 하나의 전설들이 만든 기구.
과거 북구 신화의 신들이 기거하던 장소까지 아우르던 우주수의 이름을 딴 그것은 오늘도 하계의 사정과는 괴리된 것처럼 조용히 하늘에 떠 있었지만.
실상 그 내부에선…그 어느 때에도 없었던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
<경고. 경고. 현 시간부로 전 일리미네이터 소집을 건의합니다. 경고. 경고.>
유그드라실의 메인 AI, 미미르가 경고음이라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관제실은 위험을 상징하는 붉은 점등이 수도 없이 깜빡이며 비상벨을 울려대고 있었고, 유그드라실 직원들은 그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드디어 활동을 시작했나?”
“예상보다 빠르군.”
관제실에는 일반 직원뿐 아니라, 유그드라실의 최고 간부들까지 뛰어들어와 있었다.
이들은 평소엔 세상에 무슨 대단한 난리가 나더라도 자기들끼리만 저 안쪽 간부 회의실에서만 이야기를 진행하던 자들이었다. 그나마 얼굴을 내비친 건 인류 존망의 위기였던 이그네스 사태 때 정도. 그때조차도 전원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전부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말문을 잃은 것처럼 유그드라실의 눈, 미미르가 관제실 벽면의 대형 모니터에 띄운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저럴 수가….”
작은 소녀였다.
하얀 원피스에. 검은 머리칼을 가진 소녀.
어느 도심지의 첨탑 꼭대기에 맨발로 선 그녀의 머리카락이 거센 바람에 따라 흩날린다. 그렇게 율동하는 머리카락은 마치 어둠 속에 녹아들어 가는 것처럼 이 어두운 밤 전체에 수 놓여, 이 밤하늘 전체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비롯된 것 같은 착각을 가져다주었다.
만지기만 해도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은 가냘픈 몸.
분을 뿌려놓은 것처럼 새하얀 그 몸을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켜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 몸에 걸친 한 장의 옷감은 특이하게도 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흰색을 띠고 있어, 마치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니라 하늘에서 자아낸 실로 만든 옷감인 듯하다.
그녀를 보는 순간, 유그드라실의 모든 직원들은 미미르의 비명과도 같은 경고를 귓가에서 지워버리고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마음속의 모든 것이 정화되는 것만 같은 신비한 분위기의 소녀였다. 바람에 흩날리고 있어, 그녀의 외관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저 서 있을 뿐인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요소는 또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짐승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햄스터나 작은 도마뱀 정도의 크기의 그것들은 마치 그녀의 애완동물인양 어떤 것은 그녀의 몸 위에. 어떤 것은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그녀의 근처에서 홰를 치면서 맴돌고 있었다.
그 외관이 귀엽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놀라며 그것들을 본 이유는 다른데에 있었다. 그것들이야말로 화면을 적색으로 물들이며 미미르가 발광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경고. 경고. 소녀의 몸 주변에 있는 모든 개체가 천급 디제스터로 판정.>
“뭐, 뭐라고?”
“말도 안 돼.”
직원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 아이 주변을 돌고 있는 동물들이 전부 디제스터라고? 그것도 천급 디제스터?
지금까지 천급 디제스터는 대한민국에서 나타났던 이그네스 엠프레스 뿐이다. 그것도 사실 디제스터가 아니라 유례가 없이 강력한 마법사가 폭주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디제스터가 나타났단 말인가? 저런 모습으로? 인간과 함께?
지금까지 디제스터에게 가져왔던 모든 이미지가 무너져 내렸다. 일반 직원들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함께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노인들의 표정은 달랐다. 미미르가 지금 이 순간에도 유그드라실이 떠나갈 정도로 경고음을 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침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과연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거로군.”
“그는?”
“이미 출동한 상태입니다.”
그 대답에 노인들의 인상이 굳었다. 아직 일리미네이터에게 지원 요청을 하지 않은 상태인데 ‘그’에게 연락이 닿아서 움직였다는 건…미미르의 AI가 내린 자체적인 판단이라는 뜻.
“무리해서라도 손을 봐야겠군.”
그렇게 말하는 사이…. 화면에 소녀가 서 있는 첨탑 근처에서 또 하나 사람이 나타났다.
장신의 키에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팔을 들어 눈을 보호했다. 소녀의 원피스는 잔잔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실상 소녀의 근처에선 자연계에선 쉽게 일어나지 않는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태풍 한가운데에 들어온 것 같은 강력한 바람을 뚫고서 힘들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10m 거리까지 다가갔을 즈음. 지금까지 그녀의 근처에서 노닐고 있던 생물들 중 일부가 갑자기 그에게 몸을 돌리더니, 마치 소녀를 지키려는 듯이 그사이에 늘어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더는 접근하지 않고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남자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흥미가 없는지, 멍하니 처음 나타났던 때 그대로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의 문명이 주욱 펼쳐져 있는 도심지의 지평선을…….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그녀는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세찬 바람 속에서도 신기할 정도로 뚜렷하게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벌써 열세 시련의 끝, 앙골 모아의 때를 지났는데도. 왜 인간은 아직도 멸망하지 않아?”
스으으으.
분명히 남자는 여자아이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는데도, 그는 그녀가 어느새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뭐?”
그것을 깨달은 남자―영천후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를 올려보았다.
나부끼는 앞 머리칼 안쪽.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자연계에 존재할 수 없는 눈동자를 가진 소녀를.
폭풍이…찾아오고 있었다.
*
“디제스터 등장. 일리미네이터 팀. 스텐바이.”
“텔레포터와 합류. 캐스팅 시작합니다. 6, 5, 4, 3, 2, 1!”
“제로! 텔레포트 성공! 일리미네이터 교전 시작!”
미국. 월드 리버티 본사. 공격대의 마스터인 패트릭 스튜어트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중계되고 있는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벽면의 여러 모니터에는 수많은 각도에서 도심지에 등장한 디제스터를 촬영하고 있는 장면이 보이고 있었다.
유그드라실에게 파급 디제스터의 발생을 경고받은 월드 리버티는 이전부터 벼르고 있던 ‘준비’를 마치고서 오늘 그 실현에 들어갔다.
푸슛. 민가를 부수며 날뛰고 있는 체고만 3m가 넘는 괴물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상공에 갑자기 사람들이 나타났다.
성별부터 복장까지 제각기 다른 이들이었다. 그렇지만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제각기 몸에서 희미한 오오라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본사에서 누군가가 랩을 하듯 빠르게 그들에게 지시하자, 그들은 순식간에 갈라지면서 일리미네이터의 전형적인 진형. 드리블 형태를 만들었다.
포인트 맨의 선제공격에 유도된 디제스터는 얼마간 그렇게 불로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포인트 맨을 쫓아다니다가, 마지막에는 남은 다른 일리미네이터의 방출 마법을 맞고선 그대로 소멸했다.
“디제스터, 퇴치되었습니다. 텔레포테이션 시스템 시범 운용, 성공입니다.”
“와아아아아아!”
그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서로를 끌어안고 기뻐했다. 그건 월드 리버티의 마스터인 패트릭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는 경거망동하기 전에, 그의 뒤에 있는 인물에게 돌아섰다.
거기에는 현 미국 대통령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감사하네, 패트릭! 드디어 숙원을 이루게 되었군!”
“감사합니다.”
씨익 하고 미소를 지은 그는 그리고는 옆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그보다 약간 작은 키의 동양인 남자가 같이 웃고 있었다.
어느샌가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그 기색을 느낀 남자는 마찬가지로 패트릭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범운용 성공 축하합니다, 패트릭. 이후 보완이 필요한 부분은 시간을 들여서 생각해보도록 하죠.”
“음! 고맙네, DS!”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악수하는 대신 그를 끌어안고 그 등을 두드려주었다. 정말이지 감탄과 고마움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제스처였다.
그리고 그것은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그를 바라보는 직원들의 얼굴은 모두 동경과 감사, 그리고 미래에 펼쳐질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텔레포테이션 시스템의 허가권을 쥐고 있는 지상의 유일한 남자. 드래곤 슬레이어. DS. 영천후를 바라보면서….
*
“후…. 오래 걸렸네, 생각보다 더. 그동안 고생 많았어, 란.”
“후후. 고생은 자네가 더 했지. 조금 지친 거 아닌가?”
“사실은 좀. 지치긴 했지.”
미국에서 텔레포테이션 시범 운용을 성공한 천후는 월드 리버티를 나오는 차량 안에서 안도와 기쁨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 측에서 이 건으로 접촉해온 건 이미 한참 전부터였다. 노블레스 클럽에 처음 참가하여 패트릭과 안면을 튼 이후, 그와 미 정부는 때만 됐다 하면 도입하고 싶다는 사인을 보내왔다.
그동안은 유그드라실의 관계 문제와 오로치 사태, 이그네스 사태, 엘모세와트 사태까지…. 바쁜 사건의 연속이라 그럴 틈이 없었지만, 다시 시간이 비자 그들은 작정한 듯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결국 긴 회의 끝에 텔레포트 시스템의 허가를 내주고, 그 구체적인 적용 범위까지 정한 그들은 오늘. 드디어 시범 운용에 성공할 수 있었다.
“건당 거둬들이는 로열티 부분도 만족할 만큼 협의를 해냈고…. 노하우 전수는 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제 직접 오갈 일은 좀 줄어들겠지.”
“그럴 테지. 그렇지만 나는 조금 아쉬운걸. 자네를 보는 일이 다시 줄어 들 테니.”
“후…. 거짓말하지 마. 오려면 얼마든지 올 수 있으면서.”
“이런.”
들켰나? 천후의 말에 란은 부채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녀는 어차피 엔체스터 가에서 천후를 전담마크 하는 입장이다. 마음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대한민국으로 찾아오리라.
그 모습을 보며 가볍게 그녀와 한번 입을 맞췄던 천후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후우…. 그럼 이제야 좀 편하게 지낼 수 있겠네. 미뤄왔던 걸 좀 해야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는 바로 차창 밖이 아니라,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음? 뭔가 계획하고 있던 거라도 있었나?”
그것에 의아해서 란이 물어보자, 천후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그리 거창한 건 아니야. 아이들이 있는 곳에 찾아가 보려고.”
“아아….”
그가 말하는 ‘아이들’이 누구인지는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란은 말없이 그의 볼을 쓰다듬다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이 남자가 떠날 때까지 남은 잠깐의 시간. 그동안만이라도 그 온기를 한몸에 받고 있고 싶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