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천후는 쉬는 날을 만드는 게 이렇게 힘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디제스터는 디제스터 대로 잡고 다니고, 그렇지 않을 땐 사람을 만나고, 회의하고, 거래하고…. 그렇게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 보니.
5월이 찾아왔다.
가정의 달이라는 5월. 하지만 천후에겐 조금 다른 의미가 있었다.
“벌써 1년인가?”
그가 유그드라실에서 내려온 지 1년이 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막상 입에서 내고 보니 감회가 새롭다. 그땐 정말 앞날이 막막한 상황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정말이지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오라버니. 부디 우리에게 보은을 내려주소서.”
“오오.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녀석들….”
눈앞에서 애들이 이러고 있는 걸 보면 더욱더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이한 이브, 에바는 눈을 빛내며 용돈을 탐하고 있었다. 뭐 날이 날이니 용돈 좀 주는 거야 별일은 아니지만, 얼마를 줘야 좋을지 좀 감이 안 잡혔다.
‘구정 때 한 소리 들은 기억도 있고.’
솔직히 그의 금전 감각은 상당히 망가져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주기 좀 저어한 면이 있었다. 그래도 세뱃돈보단 적게 줘야겠지 생각한 천후는 미리 3만 원씩 넣어뒀던 봉투를 그녀들에게 건넸다.
“아껴서 써.”
하루 이틀에 탕진할까 봐 그렇게 말하니, 이브는 한쪽 눈으로 윙크를 날리며 이렇게 말했다.
“오빠. 돈이란 건 말야. 쓸 일이 있을 땐 써야 하는 거야.”
쓸데없이 그럴싸한 소리지만, 이 녀석이 말하면 설득력이 확 떨어진다. 혹시나 해서 천후는 물었다.
“그래서?”
“그러니! 이 돈은 유원지를 가는 데에 모두 사라집니다…!”
“그, 그러냐?”
모 만화에서 인간은 하루하루를 섬광처럼 사는 거라더니만, 완전히 그대로 실천을 하고 있다. 그래도 강호에게 들은 바론 둘이 돈을 그렇게 물 쓰듯 쓰는 건 아니라고 했는데, 갑자기 신빙성이 확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너희 놀이공원 진짜 좋아하는구나.”
“이브만 좋아하는 거야. 난 그렇게 안 좋아해.”
새초롬하게 에바가 그렇게 말하자, 이브는 이를 드러내고는 에바를 노려보았다. 생긴 건 옷만 똑같이 입혀놔도 판박이인 녀석들이지만, 성격적인 차이가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그걸 보고 쓰게 웃은 천후가 물었다.
“그런데 이번엔 누구랑 가는 건데?”
“어~. 이번에도 반 친구들. 이그네스도 같이.”
“왜 또 말도 없이 같이 가는 걸로 결정된 거냐…….”
저쪽에서 책을 보고 있던 이그네스는 이브가 당연하단 듯이 자기 이름을 거론하자 피곤한 목소리를 냈다. 세트메뉴도 아니고 왜 자꾸 끌고 다니는지 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이그네스는 그래도 더는 궁시렁대지 않았다. 이게 나름 그녀들이 자신과 어울리는 방식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럼 언제 가게?”
“내일! 휴일 겹쳤으니까 샤샥!”
“그런가….”
고개를 끄덕인 천후는 뭔가를 생각하다가 말했다.
“흐음. 그럼 너희 괜히 돈 쓰지 말고 다른 데에 묻어갈래?”
“응? 뭔 솔? 오빠도 같이 간단 거야?”
“음. 그런 건 아니고. 어디에서 단체로 가기로 하는 돈을 대신 내주기로 해서. 너희도 그냥 거기에 껴서 가지그래? 다신 같이 움직이진 않게 해줄 테니까.”
“오오오…. 그럼 같이 가는 애들도?”
“몇 명인데?”
“우리 셋까지 합쳐서 여섯 명!”
“뭐 그 정도야.”
“아싸아!”
돈 굳었다는 소리에 신이 난 이브는 당장에 핸드폰을 들고선 저쪽으로 달려갔다. 당연하지만 어린아이들 지갑 사정으론 놀이공원 입장료는 대단한 거금인 것이다. 특히 자유이용권은 오늘 받은 3만 원으론 부족하니 더욱 그렇고.
그 뒷모습을 보고 피식하고 웃은 그 역시 핸드폰을 찾았다.
연락해야 했기 때문이다. 추가 인원이 생겼다고.
DS 보호시설 쪽에 말이다.
*
천후는 보호시설을 만든 이후, 시간을 낼 수 있을 때마다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발걸음을 할 때마다…. 기운이 없는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천후는 이번에 어린이날을 맞아서 차도가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놀이공원에 가는 이벤트를 기획했다. 거기에 아이들 표값 계산과 차를 얻어 탈 수 있게 말해둔 것이다.
그리고 천후는 아이들이 노는 동안 DS 보호시설에 강호와 함께 가기로 했다. 그 말을 들은 강호의 얼굴은 환히 밝아졌다.
“정말이냐?”
“전부터 같이 가자고 했었잖아. 지금까진 시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던 거고.”
“으, 응. 그렇지.”
살짝 홍조마저 띤 그녀는 가만히 그의 팔 하나를 꼭 끌어안아 왔다. 괜스레 부끄러워진 천후는 볼을 긁적이다가 차 키를 꺼내며 말했다.
“그럼 갈까? 같이 탈 거지?”
“응.”
그녀는 군말 없이 옆자리에 착석했다. 천후는 안전띠를 매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기분 탓인가? 오늘따라 선배가 긴장한 것 같아.’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아직 알아채지 못한 천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
어린이날에 바로 연달아 붙은 휴일이긴 하지만 아이들은 교육시설에 나와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최대한 많이 모였을 때가 집안에 서넛씩만 있을 때보단 미세하게나마 커뮤니케이션을 더 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식사문제 등을 생각해보면 한데 모아놓고 관리하는 게 더 수월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저 왔습니다.”
“어머나. 오신다고 말씀을 하시지. 준비라도 해두는 건데.”
“아니에요. 괜히 그러면 더 번거롭게만 하는 걸요.”
강호와 함께 차에서 내려 시설로 들어선 천후는 원장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잠시 놀라는 듯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 아이들 놀이 공원 비용을 내주신 거 감사드려요. 말썽꾸러기들이 아주 좋아했답니다.”
“그런가요?”
엘모세와트의 아이들 중에서도 비 마법사들은 정신이 좀 더 온전해서, 그중에는 보통 아이들 수준으로 개구쟁이들도 있는 편이었다. 오늘은 그런 차도가 있는 아이들만 모아서 놀이공원에 보낸 건데, 호응이 꽤 좋은 모양이었다.
“후후. 그럼 오랜만에 오셨으니 천천히 있다 가세요.”
“네. 수고하십니다.”
다시 한 번 인사한 천후는 시설을 돌아다녔다. 보호시설은 언제나처럼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가 교실 안으로 들어서자 분위기가 약간 변했다.
“어…….”
“형아다.”
“오빠….”
그를 발견한 아이들이 멍하니 그렇게 말하더니 그에게 모여들었다. 천후는 그런 아이들을 하나씩 안아주면서 자리에 앉았다.
“부럽구나….”
강호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엘모세와트의 아이들은 라즈베리 말고도 천후에게도 조금씩 반응을 보였다. 그녀보다는 덜했지만, 적어도 그를 보고 먼저 능동적으로 행동하곤 했다.
천후는 그녀들을 통제하던 마법사, 모리나 그윈들링의 마지막으로 남긴 사념 때문에 그를 친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추측했다. 어찌 되었던…. 긍정적인 일이었다.
그녀가 그와 함께 이곳에 오고 싶어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나 라즈베리와 함께 이곳에 오면, 아주 잠시나마 시설에 생기가 도는 것이다.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다 보면 가슴에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강호는 아이들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얼굴에 표정 하나 없던 아이들이…그를 보는 순간 웃으며 다가와 안기는 것을 보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이 분위기에 섞여서 그녀는 아이들을 보듬곤 했다. 그러면 평소엔 안아도 멍하니 있던 아이들이 이때만은 가만히 힘을 빼거나, 좀 더 안겨오거나 하곤 했다.
그 광경을 옆에서 가만히 보던 천후는 미소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느낄 수 있게끔…….
*
몇 시간 동안 여러 교실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하나씩 다 만나고 난 이후에야 시설을 나온 천후는 그녀와 함께 근처의 카페에 들어왔다. 돌아가려고 차에 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멈춰 서서 한참 그녀를 진정시킨 천후는 그녀를 자리에 앉히고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좀 진정됐어?”
“응….”
그녀도 자신이 왜 갑자기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부끄러움에 귀까지 시뻘게진 그녀는 힐끗힐끗 카페 안을 돌아보았다. 이게 또 공교롭게도 그 카페는 이전 주희와 만났던 그곳이었다.
“에효. 미안해. 좀 더 자주 시간을 내서 같이 왔어야 했는데.”
“아, 아니다! 네가 바쁜 걸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 오늘은 갑자기 북받쳐 올라서 그랬을 뿐이다! 왜, 여자는 그럴 때가 있다지 않느냐?”
천후가 자책하는 것 같자 강호는 황급히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천후는 조금 전 눈물이 흘렀던 볼가에 손을 가져갔다.
“이제 자기를 여자라고 생각할 정도는 됐어?”
“아…….”
스윽. 그는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눈가를 엄지로 스윽 문질렀다. 그 손이…너무나 따뜻하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 조금 다른 의미로 붉어졌다.
“조금 더 가라앉으면 나가자. 여기 차 맛있네.”
“으, 으응….”
세 살이나 연상인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편하기 그지없다. 분명 그녀 쪽이 한참은 누나인데도, 그의 앞에 서면 왠지 어려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도 있었지만….
‘내가 천후를 그만큼 의지하고 있구나.’
그와 함께 있다 보면…자기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게 된다. 이런 평상시에도. 잠자리에서도….
그가 자신을 돌아봐 주었으면 했다. 언제나 소중히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그런 욕심이 노출되며, 그도 그녀의 그런 태도에 맞는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좋다.
이런 어리광쟁이인 자신을 받아주는 그가 좋았다.
정말이지 언제까지고 함께 하고 싶을 정도로.
그의……. 분신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새삼스레 가슴이 뛰었다. 순간, 그녀는 생각했다.
‘때가 온 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누군가는 먼저 꺼냈어야 할 이야기. 그 첫 발걸음을 때야 할 때가 온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망설임이란 단어를 모르는 것처럼 살아왔던 그녀조차…한순간 목에 걸린 말을 내는 것을 주저했다.
그렇지만…평생 가지고 살아온 성품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한 번 떠오른 말을 그만두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 한 번은 이미 지났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찻잔의 손잡이를 엄지로 훑으며.
“천후야.”
“응?”
말을 꺼냈다.
“앞으로 희주와는…어쩔 생각이냐?”
*
한창 바쁠 때부터 강호에게 시설에 함께 가보자는 요청을 받았던 천후는 오랜만에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본 천후 역시 기뻤다.
그러나 돌아오는 도중. 그녀는 무슨 일인지 눈물을 보였다. 아이들의 처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생각한 천후는 차를 멈추고 그녀를 진정시켰다.
이 이강호라는 여자는…자기는 평생 거친 길을 살아왔으면서도, 그 가슴 속에 여린 감수성을 남기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를 지켜주고 싶단 생각을 하곤 했다.
정말이지 평생 내 곁에 두고 싶단 생각을 할 정도로…….
그렇게 새삼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가 물어왔다.
처음 그 질문을 들었을 때. 천후는 바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니, 머릿속에선 바로 답이 나왔지만, 말이 입안에서 돌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그는 그 대답을 내놓았다.
“결혼할 생각이야.”
아주 예전부터……. 트란제비야를 맡기 전부터. 강호와 이런 관계가 되기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었다.
홍희주. 그녀와는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평생 내 여자가 되어달라고.
그 말을.
그녀에게 몇 번이나 건넸던가…….
그러나 그때마다 돌아온 답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분명. 희주는 자신을 사랑했다. 그건 누가 보더라도 일목요연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녀는 석연찮은 망설임을 그에게 보이곤 했다. 그것이 천후가 현재 가지고 있는, 유일하게 불안하게 여기는 점이었다.
그런데 오늘 강호가 그걸 물어온 것이었다.
그는 정면으로 강호는 바라보았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