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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292화 (292/324)

292화

그리하여 어버이날.

이름은 어버이날이지만 휴식이 필요한 어버이들이 그래서 쉬는 날이냐면 그렇지 않은 그냥 평일.

퇴근 시간에 맞춰 돌아온 천후는 아이들에게 무서운 소리를 들었다.

“오빠. 우리 오늘 하루 호텔에서 자고 올게.”

“…….”

여기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천후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일단 잠깐. 아주 솔직히 한 10초 정도 생각한 모르는 놈팽이가 꼬여서~ 루트는 일단 아닌 듯했다.

라즈베리를 비롯해 어린이 일당이 짐을 싼 채로 하는 말인 걸 보면 말이다.

“음……. 대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냥. 오늘 하루는 어른들끼리만 있을 시간을 줄게.”

엣헴 하고 가슴을 펴며 하는 말에 천후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게 무슨 뜻일까, 도대체? 그 뜻은 에바가 해석해줬다.

“그렇게 하면 동생이 생긴다고 들었어.”

“누구냐?! 그런 쓸데없는 지식을 불어넣은 건! 라즈베리 너구나!”

“헉! 모함입니다! 뭐만 있으면 저를 범인으로 생각하는 건 나쁜 버릇이지 말입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라즈베리는 눈짓으로 이그네스를 가리켰다. 그쪽으로 눈을 돌리자,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농담으로 한 소리였는데 진지하게 들으니 어쩔 수가 없지. 뭐어…. 엔체스터 호텔에서 하루 정도 놀다 오마. 그 정도야 상관없지 않느냐?”

“그야 그런데.”

엔체스터 호텔에선 이미 보름 이상 묵은 적이 있었다. 천후 가족은 호텔에서도 이미 VVIP여서, 가기만 해도 알아서 방을 내줄 터.

묵는 비용이야 라즈베리의 호주머니를 털어도 되고, 천후가 대신 내줘도 될 문제니 상관없었지만,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되었단 말인가?

“으음. 너무 깊게 묻지 마라. 그냥. 아이들 나름의 배려라고 생각하면 된다. 조, 좋지 않으냐. 오늘 하루는 아이들 눈치 안 보고 헤븐 데이다.”

“아니…….”

은근 얼굴이 빨개져서 말하는 게 참 쥐어박고 싶다. 빤히 노려보자, 그녀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먼저 밖으로 쪼르르 나가버렸다.

“그럼 우리도 갈게! 편히 쉬어!”

“정 뭐하면 저는 남아도 됩니다만.”

천후는 괜히 비장한 말투로 말하는 라즈베리를 꾹꾹 밀어서 내쫓아버렸다. 그녀는 ‘왜 나만~’하고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는 가차 없이 문을 닫아버렸다.

“에효. 저 말괄량이들 진짜.”

“하하. 영 걱정되면 내가 같이 가줄까?”

같이 집으로 왔던 강호는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체 그렇게 말해왔다.

“그래줄래요? 뭐 라즈베리 있으니까 괜찮겠지만, 저건 같이 말썽이나 부릴 것 같아, 어째.”

“너무 그 애를 어리게 볼 필요는 없겠지만. 그런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 좋다. 나도 아이들하고 진득하게 있어본 적은 오래되었으니 그럼 오늘은 다녀오마.”

맑게 웃은 강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발걸음이면 아마 저들을 금세 따라잡고도 남으리라. 이걸로 걱정은 좀 덜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싹 사라지고 나니, 집 안이 단숨에 조용해졌다. 평소에는 늦은 밤을 제외하곤 사람 목소리가 끊임이 없었는데, 그 목소리를 낼 사람들이 없어지니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고 있는 동안 차를 끓여온 희주는 찻잔을 그의 앞에 내려놓고는 옆에 앉았다. 지금까지 발소리 하나도 제대로 내지 않았지만 그녀는 엄연히 처음부터 집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럼 오늘은 희주 씨랑 단둘이 있는 건가?’

생각해보면 굉장히 드문 일이다. 물론 외국에서 공식 행사를 할 때는 둘이서 간 적이 없던 건 아니지만, 집에서 둘이 남아본 적은 또 오랜만이다. 천후는 갑자기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어라?’

왜 긴장이 되는 건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것은 이제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인데 왜 갑자기?

가슴의 고동이 멈추질 않는다. 당황한 천후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렇게 굳어있었다. 바로 그때.

띠리리리.

침묵을 깨는 휴대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천후는 빠르게 발신인을 확인했다.

“아. 셀레나네.”

그 이름을 확인한 순간 긴장감이 훅하고 날아갔다. 생각해보면 그녀도 일이 끝나면 이쪽으로 올 게 아닌가? 그럼 단둘이 아니게 되니 긴장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생각한 천후는 작게 숨을 내쉬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천후야. 어~. 이런 말 굳이 하는 것도 그렇지만, 오늘 나 집에서 자고 올 거야.>

“으. 응? 그래?”

<그럼. 어버이날이잖아. 오늘은 집에 가서 용돈도 드리고, 외식도 좀 하고 그러려고. …애초에 이걸 보고하는 것도 좀 그런데 나도 참. 하여간 그럴 테니까. 내일 봐, 쪽~.>

셀레나는 그렇게 자기 용건만 쏟아내 놓고는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덕분에 천후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는 굳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가 하는 말은 지당했다. 천후처럼 양친이 돌아가신 것도 아니니, 하루 정도 집에서 지내는 거야 사실 미리 이야기할 거리조차 아니다. 결혼한 것도, 심지어 정식으로 동거하는 것도 아니지 않던가?

그러니 그것까진 이해가 가는데…….

“그럼…오늘은 단둘이서 보내겠군요.”

“그, 그렇네요.”

희주가 느릿한 목소리로 한 말에 천후는 움찔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찾아온 긴장감이 사라지질 않는다.

대체 왜 이리 긴장한 걸까? 천후는 그 이유를 생각하다가, 순간 한 가지를 떠올렸다. 바로 며칠 전 강호와 나누었던 대화를….

“…….”

그녀와의 관계를 좀 더 ‘진지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긴장했던 것이다.

그 자각과 함께 천후는 희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언제나처럼…그의 옆자리에서 가만히 앉아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

보통 때였다면.

얼마 전 강호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면.

일을 시작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날이 왔을 때 좋다고 그럴싸한 말로 그녀를 침대로 끌어들여서 다음 날 아침이 올 때까지 진득하게 즐겼으리라.

사실 그런다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할 나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오늘은 조금 달랐다.

이전부터 조금씩 생각하고 있던 ‘진지함’은 이제 그의 가슴 가득히 깃들었다. 그렇다 보니 지금…그는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무작정 사랑한다고 말할 뿐이라면, 그녀는 분명 자기도 그렇다며 안겨올 터였다. 그럼 그때부턴 아마 이성이 날아가겠지. 지금까진 이런 패턴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여자의 유혹에 그렇게 대단히 강하지 않았다. 그게 특히 희주의 유혹이라면 더더욱. 참을 필요조차 없는 내 여자의 유혹이 아닌가?

“으음….”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희주는 말없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올려 왔다. 팔에는 손을 대고서…….

‘아….’

희미한 체향이 그를 자극했다. 이대로 끌어안고 싶다. 어떻게 말 한마디 안 했는데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흔들리게 하는지 모르겠다.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팔을 들어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스륵.

가볍게 고개를 들어오는데, 그 눈동자가 평소와는 달리 아주 약간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빛인지를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욕망’이리라. 그렇게 분홍빛의 입술을 작게 벌리고 있으니, 이건 도저히 참기 힘들다.

츱….

이성보다 빠르게 몸이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그녀는 마치 바랐다는 듯이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단숨에 남성의 신호가 오며, 손은 그녀의 옷 위를 더듬었다.

물컹하고 마치 정확하게 맞춤으로 재단한 듯 딱 들어맞는 풍만한 가슴이 양손에 가득 쥐어졌다. 그걸 난폭하게 주무르던 천후는 그러다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이래서야 평소랑 똑같지 않은가? 입을 떨어뜨리자, 그녀는 걱정하는 듯이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불안감을 줬단 죄책감이 가슴을 휩쓴다. 안심시켜주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니 어느새 다시 입이 겹쳐져 있었다.

‘아아…. 미치겠다.’

이대로 계속 그녀를 탐하고 싶다. 강호와 말한 중요한 문제는 조금 더 시간을 들여도 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 그게 중요하긴 한 걸까? 지금 그녀가 눈앞에 있고, 그녀가 나를 바란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 한편에선 또 하나의 욕망이 들끓는다.

‘그렇게 사랑하는 그녀이기에 확답을 듣고 싶다.’

좀 더…. 좀 더 그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

눈에 보이는 그녀뿐 아니라. 그녀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과거를 캐고 싶단 게 아니다. 부모님이 있다면 부모님을 찾아뵙고 싶고, 없다면 없다는 말을 그녀에게 직접 듣고 싶다.

스물이 되기 전에 그 많은 자격증은 어떻게 다 땄고, 그 이전의 마스터였던 고인규는 어떻게 알게 되었고….

생각해보면. 그녀에 대해선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나에게 왜 이렇게 헌신적인 거야?’

‘왜 처음부터 나에게 이렇게 잘 대해줬던 거야?’

‘왜 나를 사랑하는 거야?’

‘왜… 너 혼자서 나를 가지려 하지 않아?’

그것은 영혼의 갈구였다.

너를 알고 싶어.

너에 대해서 알고 싶어.

너의 마음을 보여줬으면 해. 눈에 확연히 보이게….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이 그에겐 이제야 제대로 깃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성장을 의미하기도 했으며, 그가 좀 더 확실한 인간성을 확립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다만 천후는 지금까지 이 질문을 그녀에게 직접 하는 것을 피해왔다.

언젠가 그녀가 먼저 말해줄 거라고 피해온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알고 만다.

알게 되고 만다.

그녀는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몰라도, 그녀는 그런 이야기를 쉽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아마 이후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사랑하고, 곁에 두고 살아가는 건 굳이 묻지 않더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게 과연 그녀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아니. 다른 잡스러운 건 다 치우자.

그냥. 그래.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 대해서. 나는 다른 누구보다 더 자세히 알고 싶어.

그것뿐이야.

“희주 씨.”

“네…….”

긴 입맞춤을 맞춘 천후는 진지하게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의 눈은 마치 불타오르듯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갈구와 욕망의 표출이었다.

그것을 마주 보아서일까? 그녀는 여전한 무표정임에도 가느다랗게 몸을 떨고 있었다. 마치…희열에 잠긴 것처럼.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던 천후는 그러다…아주 힘들게 운을 떼었다.

“전. 희주 씨를 사랑해요.”

소리 없이. 그녀의 얼굴만 붉어졌다.

스륵. 입을 맞추느라 뒤로 넘겨두었던 머리카락 한 올이 흘러내렸다. 그 직후…. 그녀는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오직 그에게만 보여주는 아주 아름다운 미소를 보였다.

“감사합니다.”

머릿속이 한차례 날아갔다.

이대로 안아버리고 싶다.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게 졸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미소를 볼 수 있다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든 아무래도 상관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걸 정말 간신히….

초인적이라고 부를만한 정신력으로 이겨낸 천후는 그 미소 지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더욱…희주 씨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싶어. 누구보다 더.”

깜빡. 깜빡. 그녀의 눈이 말없이 몇 번인가 감았다 떠진다. 그 안의 눈빛은 방금 보이던 그것보다도 한 층 더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니…말해주겠어요? 이제부터 내가―”

천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움직여 그의 입을 다시 한 번 덮었다. 볼을 쓰다듬던 손에 그대로 자신의 손을 가져와 깍지 껴온 그녀는 완전히 자기 몸을 던지듯이 그와 밀착하여 입을 겹쳤다.

순간.

아슬아슬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그의 정신은 그대로 날아갔다. 그는 욕망의 짐승이 되어 그녀를 탐해갔다.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결국 그녀에게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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