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하아…. 그래서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
“아. 그러세요?”
어버이날 건 이후. 결국은 이성을 잃고 저질러버린 천후는 침울해져서는 상담 상대를 찾았다. 하지만 이 건으로 상담할 사람은 손에 꼽았다.
나름대로 부모포지션인 최완? 하지만 그는 독신으로 산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고 했다. 이제 와서 이런 걸 물어봐야 좋은 대답이 나올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미연에게 묻는 건 더 그렇고…. 부하 직원들에게 상담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고르고 고르다 보니….
“그래서 희주 문제를 나하고 상의하려고 하다니. 너도 참.”
“다른 사람이 없었어….”
인근 카페로 함께 나온 여자, 셀레브리아 로즈 루셀은 딸기 에이드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고선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톰한 입술을 살살 움직여 빨대를 굴려대는 모습이 나이에 맞게 귀엽다.
오늘은 매일 입고 다니던 정장 대신 허벅지 중앙까지만 오는 짧은 원피스 차림에 카디건만 걸친 그녀는 테이블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뭐 확실히 이 문제로 다른 사람하고 상담하긴 좀 그렇긴 하지만 말야. 나하고 이야기하는 건 좀 잔인하지 않아?”
“미안해, 그건.”
볼을 부풀리며 항의하는 모습에 천후는 순순히 사과했다.
다들 사이가 좋은 편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단둘이 있을 땐 자신만을 봐줬으면 하는 게 여자의 마음인 법이다. 기껏 혼자만 불러내기에 기대하고 나왔던 그녀는 흥이 조금 식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꿍한 모습을 보이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빨대에서 입을 때면서 말했다.
“하긴, 뭐.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긴 했지. 관계 정리 부분은.”
“그럼….”
“그래. 뭐 대단히 도움은 안 되겠지만, 일단 이야기는 해볼까?”
“고마워. 셀레나.”
“됐네요. 나쁜 남자 같으니.”
입술을 한번 삐죽 내밀었던 그녀는 후우 하고 숨을 한 번 골랐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 건데? 희주 과거가 의심스러워? 어떤 거? 남자관계? 아니면 돈? 혹은 다른 어떤 거?”
“의심스럽다는 게 아니라…. 희주 씨에게서 직접 듣고 싶은 것뿐이야. 왜 나를 좋아해 주는지. 처음부터 나에게 왜 그리 호의적이었는지.”
“우와….”
그 말에 셀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팔을 벅벅 긁었다. 막 온몸이 간지러워 죽을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좀…. 그러지 말지? 그거 되게. 엄청 부끄러운 거거든? 꼭 들어야겠어? 그, 그냥 첫눈에 반한 걸 수도 있잖아?”
“아니. 음….”
그 말에 천후도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녀 말이 맞았다. 굳이 이걸 못 들어서 안달 날 필요가 있을까?
그저 그녀가 첫눈에 반했고, 그녀가 이전부터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그가 여러 여자를 품길 바라는 조금 특이한 성격일 뿐일 수도 있지 않은가?
천후 역시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왔다. 하지만…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는 종종 느끼곤 했다.
“‘그런 게’ 아니야. 조금 달라.”
“응? 뭐가?”
“뭐라 말로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달라. 조금.”
그렇게 말하는 천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제야 셀레나 역시 약간 심각해졌다.
여태까지 몇 번 봐왔지만…그의 감은 잘 맞는다. 종종 그건 감의 영역을 넘어설 때조차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이상…조금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한참을 생각해보던 셀레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남자관계는…뭐 가, 같이 확인했었잖아. 그런 건 없었고.”
“그건 알지.”
“그러니 그쪽은 좀 머릿속에서 지우고! 음…. 그렇게 그 이유란 걸 알고 싶으면, 결국 한 번 더 단둘이 있을 기회를 만드는 수밖에 없지. 뭐. 진지한 분위기에서 네가 직접 물어보는 것 말고 답이 없잖아.”
“그렇긴 하지.”
천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비록…그때 나올 답이 대체 무엇일지 두렵긴 하지만 시도해볼 수밖에 없다.
“얼마 있으면 희주 생일인 건 알고 있지?”
“그건 당연히 알고 있지.”
5월엔 이런저런 일이 몰려있었다. 일단 천후가 지상으로 내려온 지 1주년 되는 날이 그것이었고, 그 바로 며칠 전이 홍희주의 생일이었던 것이다.
천후는 셀레나를 마주 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때…. 반지를 주려고 해.”
“…….”
셀레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잠시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양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물었다.
“드디어?”
“드디어라니….”
“드디어지. 나나 강호 언니는 대체 네가 언제 정식으로 프러포즈 할까 내기까지 한 적이 있었는데.”
“…….”
그 말에 천후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여자들 사이에서 그런 소리가 오갔을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한편, 이야기를 들은 셀레나는 빨대를 손가락으로 휘저었다.
“그렇구나…. 프러포즈라아. 희주는 좋겠다아. 반지도 받고.”
부러움이 담긴 목소리에 천후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너한테도 줄 거야. 처음이 희주 씨인 거지.”
“어? 진짜?”
“당연하잖아. 이제 와서….”
내가 널 놔줄 리가 없잖아. 격하게 튀어나오려는 뒷말을 간신히 삼킨 천후는 말없이 그녀와 눈을 맞췄다.
이글이글 소유욕으로 타오르는 눈길을 받은 그녀는 약간 얼굴을 붉히더니,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그, 그렇구나. 나한테도 줄 거구나. 헤헤.”
“그래.”
그 확답에 한참 기뻐하는 티를 내던 셀레나는 그러다가 속삭였다.
“저기, 천후야.”
“응?”
“그럼 반지는 이미 고른 거야?”
“아니. 아직…. 보석 쪽을 잘 모르기도 해서 좀 힘들더라.”
“그럼…내가 같이 가서 골라줄까?”
그 말에 천후는 잠깐 움찔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줄 청혼 반지를 함께 고르자는 건 조금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지만 셀레나는 자기가 더 설레는지 기대하는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아…. 그래. 그럼 부탁 좀 하자.”
“후후. 좋아. 이 이야기는 고르러 가서 하자.”
“뭐어?”
“어차피 날짜는 잡혔잖아. 뭘 해야 할지도 정해져 있고. 그럼 여기 있기보단 얼른 보석이나 보러 가자구.”
“에휴…. 못 살겠다.”
평소엔 그렇게 깐깐하게 일을 잘하면서도, 특유의 장난기 어린 모습을 그녀는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아마 이건 평생 가지 않을까? 그런 즉흥적인 면이야말로 그녀에게 끌린 이유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천후는 결국 그녀의 보챔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들이 향한 곳은 국내조차 아니라, 중국 상하이에 있는 귀금속 전문점이었다.
VVIP 위주로 운영되는 그 매장 안에 들어선 둘은 내부를 돌아보며 희주에게 어울릴만한 것을 찾아다녔다.
워낙 즉흥적인 마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지라 그들의 복장은 허술하기 그지없었지만, 매장에 들어설 때 그들을 막아서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이 도시에 내려섰을 때부터 이미 비상이 걸린 것이다.
둘의 옆에는 알아서 사람이 붙어서 시선이 향하는 것마다 하나하나 입이 부르틀 때까지 설명하곤 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셀레나의 눈이 한 곳에서 멈췄다.
“와아….”
마치 어린아이 같은 탄성을 내지르는 것을 보고 천후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곳엔 천연 사파이어를 보석 장인이 공들여서 커팅해둔 반지가 있었다.
“저게 마음에 들어?”
“응? 아~. 그냥 예쁘게 생겼길래. 그래도 희주랑은 별로 안 어울리네.”
“상관없어. 너한테만 어울리면.”
“응?”
셀레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자, 천후는 옆에 붙어있던 남자에게 말했다.
“몇 달 정도 보관해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때에 변심이 있을 순 있는데, 그때는 보관료를 따로 지불하고, 다른 것을 이곳에서 구매하도록 하죠.”
“네! 물론이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본래 이런 곳은 최소 일주일에서 길면 보름에 한 명 정도의 고객에게 상품을 팔아서 운영되는 곳이다. 워낙 고가의 상품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이런 조건 정도는 그들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팔 수만 있다면야!
“어? 잠깐만! 여긴 희주 거 고르려고 온 건데 그러면 좀….”
“뭐 어때. 뭘 받는지 아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조금 늦게 줄 거지만.”
“응….”
정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는 그 모습에 셀레나는 얼굴을 붉혔다. 이 ‘순서’ 문제는 어차피 도저히 뒤집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건 그와 희주, 그리고 희주와 그녀들 사이에서 이미 사전부터 합의되어있던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니 그 새치기는 도저히 할 수 없지만…그래도 그가 그녀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히 보여준 것이다.
“…….”
꼬옥. 그의 팔을 감싸 안은 그녀는 그때부턴 좀 더 집중해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둘은 매장을 나올 수 있었다.
“어때? 만족스러워?”
“내가 보기엔. 희주 씨가 좋아할진 가봐야 알겠지만.”
“좋아할 거야. 네가 주는 거잖아.”
그의 손에는 보석함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걸 보고 빙그레 웃은 셀레나는 그러다 앞으로 뛰쳐나와 그의 앞에 섰다.
“나도 기뻤으니까, 희주도 좋아할 거야. 분명히.”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로.”
천후는 보석함의 겉을 쓰다듬다가 그것을 품에 넣었다.
그녀의 생일까진 아직 며칠 남았다. 그날까지 이건 그녀조차 모르게 잘 숨겨둘 요량이었다. 그걸 웃으며 바라보고 있던 셀레나는 그러다…지금까지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천후 네 생각이 맞아. 희주가 너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건 아마…사실일 거야.”
“셀레나?”
한 줄기 바람에 금발이 흩날린다. 그녀는 그걸 손으로 간신히 정리하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희주를 안지도 일 년이 다 돼가네…. 워낙에 내색을 안 하는 애니까, 솔직히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어. 구체적인 대답은 항상 피하거든. 하지만 확실한 건, 아마 희주는 불안해하는 거라고 생각해.”
“불안해?”
“뭐 때문에 불안해하는지는 모르겠어. 희주 자신 때문에 그러는지. 아니면 너 때문에 그러는지…. 다만 희주 행동을 보고 있다 보면, 하나는 알 수 있지. 희주는 대비하고 싶어 한단 걸.”
“무엇을?”
그 질문에 셀레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가…이윽고 입을 열었다.
“자기가 없어졌을 때를.”
*
셀레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희주는 정말이지…천후가 없으면 죽고 못 산다. 그가 없으면 세상을 살아갈 수나 있을까 걱정될 정도로 그를 사랑한다.
그런 여자에게 독점욕이 없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표출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그렇지, 그녀 역시 천후의 곁에 자신만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다른 애인을 붙여주면서도, 잠자리를 함께하는 것 자체가 그것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그런데도 왜 저런 행동을 보이는지, 셀레나는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녀는 천후와는 달리 훨씬 직설적인 성격인 만큼, 희주에게 직접 물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희주는 제대로 답해주지 않았다. 다만, 이런 말만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저 같은 것이 주인님을 독차지할 순 없습니다.’
뼛속까지 파고든 자격지심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서포터, 일리미네이터 관계를 무너뜨릴 마음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게 만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는 건지는 그녀로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의도적으로 그녀가 만드는 거리감은 심각해서…보고 있자면 언젠가 그녀는 제풀에 천후를 떠날 수도 있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난 말야. 희주가 무서워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뭔가 자기만의 사정이 있겠지. 있겠지만…. 내 생각엔, 천후 네가 할 건 그 아이의 사정을 듣는 게 아니라. 그게 어떤 것이든 네가 잡아주는 거라고 생각해.”
“…당연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녀가 내 곁을 떠날 수도 있다고? 아니면…내가 그녀를 버릴 수도 있다고?
전자도, 후자도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 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의 영역이다. 완벽한 허구.
“절대 놔주지 않아. 희주는 내 여자야. 무슨 일이 있어도 잡을 거야.”
‘아. 여기까지 와야 희주라고 부르네.’
빙긋이 웃은 셀레나는 그의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럼 행동으로 보여야지. 희주한테.”
“그래.”
천후는 품속에 넣은 반지함을 움켜쥐어보았다. 그녀의 생일까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날…….
네 불안감이 가짜였다는 걸 알려주겠어. 홍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