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운명의 때는 다가와>
영천후는 마음의 준비와 물질적인 준비를 모두 끝내두었다. 이제는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 시기도 잡아두었다.
희주의 생일. 그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별일 아니니 오늘은 조촐하게….”
희주는 아침부터 그런 소리를 꺼냈지만, 그녀의 발언은 평소와는 다르게 단칼에 거절당했다.
“안~돼!”
“선생님은 오늘 완전 휴무야!”
풀썩. 희주를 밀어내서 강제로 소파에 앉힌 그녀는 그녀가 절대로 부엌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동안 아이들은 콧소리를 흥얼거리면서 미역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위험합니다. 손질을 잘못하기라도 하면….”
“괜찮아! 우리 이제 이런 거 잘해!”
“휴무야! 휴일이야!”
걱정되는 마음에 다시 일어나려는 것을 틀어막은 둘은 그대로 다시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들어 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강호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오늘은 쉬어라. 애들도 보답하고 싶어서 저러니까.”
“보답 받을 만한 일은 한 적이 없습니다만.”
“아이들에겐 여기에 살게 된 것만으로도 고마운 거지.”
“그건 제가 아니라 주인님께 고마워할 일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네가 같이 허락해준 건 맞지 않느냐? 그리고 천후에겐 항상 표현해도 너에겐 그게 아니니까.”
“…….”
희주는 창백한 얼굴을 약간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특유의 무표정을 한 그녀는 그때부턴 정말로 소파에 앉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네킹으로 착각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그녀를 사람이라고 알아볼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입을 움직여 말을 꺼낸 덕이었다.
“둘 다 학교에 가야 하니 너무 오래 준비하진 마세요.”
“네~.”
“어제저녁에 다 준비해놔서 얼마 안 걸려요~.”
말마따나 순식간에 요리를 끝낸 둘은 사람들을 불렀다. 아이들 덕분에 희주는 자기 생일에 자기가 미역국을 끓이는 사태는 맞이하지 않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을게요.”
그렇게 말한 희주는 국에 수저를 가져가 한 모금을 입에 물었다.
“맛있네요.”
그 말에 아이들은 코밑을 쓱쓱 문질러댔다.
“히히.”
“저녁도 우리가 다 준비할 거예요.”
“네? 하지만 그건….”
“사양하지 마라. 네 생일인데 우리가 아무렴 아무 준비도 안 했을까? 오늘은 순순히 주는 대로 받는 걸 즐겨라.”
강호의 말에 희주는 천천히 시선을 천후에게 옮겼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일이라 모두 출근하고 등교를 해야 하지만, 오늘 저녁에는 당연히 그녀의 생일 파티를 하기로 되어있었다.
“오후까진 회사에 같이 오세요. 파티는 저녁에 할 생각이니까.”
“너무 공을 들이게 하는 것 같아서….”
“에이~. 선생님은 너무 사양해요!”
“괜찮아요! 공들이게 해도!”
오늘따라 별이라도 먹은 것처럼 강경한 아이들의 의견에 밀린 희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였다면 특유의 분위기로 자기 뜻을 밀어붙였겠지만. 생일날 축하를 거부하는 건 쉽지 않았다.
천후는 그 실랑이를 보면서 빙그레 웃으며 주머니 안쪽에 들어있는 것을 손으로 더듬었다.
‘오늘…저녁.’
*
이렇게 하루가 길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천후는 온종일 반지함만 만지작거리며 얼른 저녁이 오기만을 계속 바랐다.
라즈베리의 본 실력이 드러나고, 이강호의 랭크까지 오르면서 그가 직접 현장에 향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다.
신위의 부분해제가 가능해진 그는 사실상 멸급 디제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출동하는 게 다른 이들의 수입을 갉아먹는 수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다급하게 경급 디제스터를 잡아야 하는 경우엔 -언제나 다급하지만, '더욱’다급할 때- 나서긴 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천후는 아이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아예 자택으로 돌아와 버리려고 했지만, 그건 이그네스에게 막혔다.
“이것저것 장식하는데 시간이 걸리느니라. 네가 오면 희주도 따라오려고 할 테니 회사에 있다가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오너라.”
“…….”
중간에 나도 도와주면 될 거 아니냐고 말하려는 것까지 원천 봉쇄해버리는 것이 과연 그녀다웠다. 단박에 입을 다문 천후는 결국 마음을 졸이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저녁이 되었다.
천후의 저택 거실에는 금빛과 은빛의 색종이 끈들과 꽃들, 아이들이 손으로 만든 온갖 장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들은 각자 머리 위에 고깔모자를 쓰고서는 케이크에 불을 켠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자자. 언니 어서 이리 와서 앉으시지 말입니다.”
퇴근하며 같이 돌아온 라즈베리는 분위기를 파악하고선 그녀의 어깨를 잡고선 미리 초를 밝혀놓은 케이크 앞에 앉혔다.
깜빡. 깜빡.
커튼을 치고 불까지 꺼놓아 어두운 거실 안에 긴 초가 둘, 짧은 초가 하나. 그 앞에 앉은 여자의 흑진주와 같은 눈동자는 그대로 그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
스륵. 스륵. 희주는 고개를 돌려 양옆으로 돌려보는 모양새를 보였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걸 보고 꺄르르 웃은 아이들은 케이크 앞에 서더니 합창하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희주 언니~. 생일 축하 합니다~.”
“선생님, 후!”
허공에 세게 입으로 바람을 불어 보이는 이브의 모습을 본 희주는 다시 촛불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후우 하고 작은 숨을 내쉬었다. 촛불은 그것만으로도 빛을 잃었다.
그와 동시에 거실에 불이 들어오며, 팡, 팡하고 아이들의 손에서 폭죽이 터졌다.
“선생님~. 생일 축하해!”
“…….”
머리 위에 폭죽에서 터져 나온 형형색색의 종이들을 뒤집어쓴 희주는 잠시 멍하니 그것들에 손을 가져가 보고 있다가…아주 약간 입가를 구부렸다.
“고맙습니다.”
“오. 웃었다. 대성공!”
“나쁘지 않았군.”
훗 하고 피에로의 빨간 코를 붙이고 있던 이그네스가 빙긋이 웃었다. 희주의 미소를 보고서 같이 웃은 천후가 말했다.
“사실 좀 더 큰 회장을 잡아서 할까 하다가 아이들이 직접 축하해주고 싶다기에 이렇게 했어요.”
“네. 감사합니다. 저도 이쪽이 더 좋습니다.”
희주의 성격상 호텔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리는 것보단 차라리 이렇게 가족끼리 보내는 걸 좋아할 것 같았다. 그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그 뒤. 케이크와 아이들이 직접 차려놓은 음식들로 저녁 식사를 마친 그들은 하나씩 그녀를 위한 선물을 꺼내 들었다.
아이들은 그동안 짬짬이 만들어두었던 목도리였다. 짜기 시작한 게 겨울이었다 보니, 겨울에나 쓸만한 아이템이 되었다던가?
이그네스는 자신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소설책 한 권을 그녀에게 주었다.
라즈베리는 예상과는 다르게 평범하게 향수를 가져왔다.
“언니한테 제 취향 물건을 드리긴 쫌….”
이런 말을 남기면서 말이다.
강호는 그녀에게 웬 열쇠를 넘겼다. 희주가 뭐냐고 물으니, 바이크 키라고 했다.
“면허는 있는 걸로 알고 있으니, 전용으로 탈 것 정도는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천후나 라즈베리에게도 은근슬쩍 권장해오더니, 그녀 역시 바이크 파로 끌어들이려는 야욕을 보이는 것 같았다.
셀레나의 경우 친란의 선물까지 같이 건네주었다.
“란은 직접 오질 못한다고 배송으로 보내왔어.”
그녀가 넘긴 것은 검은색의 이브닝드레스와 에메랄드로 된 귀걸이였다. 그걸 본 다른 이들은 당장 입어보자며 그녀를 안방으로 납치해 가버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다시 거실로 나올 수 있었다.
어깨뿐 아니라 쇄골까지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는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가만히 그 파인 곳에 손을 가져가 보였다.
머리를 평소와는 달리 틀어올려서 모양을 잡았는데, 그것만으로도 그녀에게 느껴지던 앳된 분위기가 가시고,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걸 넋 놓고 보고 있던 천후는 그러다 그녀의 옆에 선 셀레나가 희주를 향해 손짓하는 것을 보았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신호인지는 분명했다.
“흠. 허흠.”
두 번 헛기침을 한 천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이 시간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런데 막상 찾아오니 그도 사람이다 보니 긴장이 되었다.
‘차라리 디제스터를 잡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하지만 천후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그녀의 앞에 섰다.
“아름다워요.”
“……감사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하는 칭찬엔 아무리 그녀라도 부끄러웠던 걸까? 백옥같던 그녀의 얼굴이 아주 약간 달아올랐다.
이대로 끌어안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간신히 참는다. 지금은 그것보다도 훨씬.
훨씬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니까….
오늘을 위해 준비해왔던 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오니, 그 모든 것이 날아가 버렸다. 그 덕분에 천후는 몇 번이나 입을 열길 망설였지만….
그래도.
말했다.
“희주 씨. 희주 씨를 만나고서 지금까지…오랫동안 생각했어요. 희주 씨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희주 씨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해주지 않았으니까….”
“…….”
“그렇지만 이미 제 마음속에서 대답은 아주 예전부터 나와 있었어요. 시간이 지나도…다른 사람을 만나도 그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어요. 오히려…더 간절해졌어요. 당신이 항상. 내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내 옆에서 함께 해줬으면 한다는 마음이….”
지금까지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차있던 거실은 순식간에 진지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라즈베리나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양손을 입으로 틀어막은 채 초롱초롱한 눈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고, 강호와 셀레나는 서로 나란히 서서 웃고 있었다.
그 모두의 시선 앞에서, 천후는 요 며칠. 닳아 없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도 없이 만지작거린 반지함을 꺼내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그러니…희주 씨. 희주 씨의 마음이 저와 같다면. 이걸 받아주겠어요?”
“아…….”
반지함을 본 희주는 자기도 모르게 낮은 소리를 내며 눈을 옆으로 돌렸다. 셀레나와 강호가 있는 쪽으로.
그들의 미소를 발견한 그녀는 다시 반지함을 내려보았다.
그건 마치. 상상조차 하지 못한 물건을 대면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주인님. 이건….”
“…….”
여기서 다른 말을 꺼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굳게 입을 다문 체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양손이 떨리면서 올라왔다. 그녀는 그의 손 위에 올려진 반지함을 소중히 양손으로 감싸들었다.
천후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아졌다.
“비켜줄까?”
“그럴까….”
셀레나와 강호 사이에선 그런 짧은 말이 오갔다. 오늘은 말 그대로 둘만의 날로 해줄 의향이었다. 둘이서 술이라도 함께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상황은 기쁘게만 돌아가지 않았다. 희주는 간신히 반지함을 받아들었지만, 도저히 그것을 열 생각은 못 하고 있었다.
그저 그것을 내려다보며, 투명한 두 줄기의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저 같은 천것에게…. 하지만….”
다시 든 그녀의 얼굴에 깃든 ‘표정’을 본 천후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얼굴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두려움이라고 하는…….
기쁘고 기뻐서…울음이 나올 정도로 기쁜데.
그럼에도 기뻐만 하지 못하는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놀란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요.”
“……!”
“희주 씨. 당신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던. 왜 그렇게까지 자신을 낮게 여기는지…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무서워하지 마요.”
“주인님….”
“그럴 필요 없는 거야. 이건 당신을 위한 반지에요. 무슨 일이 있었던.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던.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아. 내가 당신을 버릴 일도, 당신이 나를 떠나게 될 일도 영원히 없어. 그러니까…무서워하지 마요. 걱정하지 말라고.”
“아…….”
희주의 몸이 크게 떨린다 생각했다. 그것은 잠시 지나 흐느낌이 되었다가……천천히 진정되었다.
어느덧 그녀는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천후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꺼내보는 건…조금 더 시간이 걸려도 되니까. 받아줘요. 당신을 위한 거야. 내 바지 속에 더 넣어두고 싶지 않아.”
“네…….”
얌전하게 대답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아이들이 다 보는 앞이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와 입을 겹쳤다.
길게.
더없이 길게.
다시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일념을 담아.
그녀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