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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295화 (295/324)

295화

삐익. 삐익.

긴 입맞춤을 나누는 사이에….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니었다. 이 집안에선 누구도 이런 벨 소리를 쓰지 않았다.

“이건….”

겹치고 있던 입을 땐 천후는 이 소리의 발원지를 알았다. 그의 품속이었다. 그가 만약의 만약을 대비해서 항상 가지고 다니는 그만의 유그드라실 전용 통신기.

이전에는 위치추적기 역할도 함께 했지만, 그가 DS를 만들고 유그드라실과 사이가 틀어졌던 때 그 기능은 떼버렸다. 그런 와중에 신호가 오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디제스터?”

이 통신기를 통해 먼저 연락이 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은 벌써 일 년 전. 지상에 막 내려왔을 때 이미연의 연락을 받았을 때. 그 뒤로는 천후가 썼으면 썼지, 자신이 먼저 연락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 당시엔 파급 디제스터가 나타나서 연락을 받았지만, 그때와 지금 천후의 위상은 천지 차이다. 지금 이걸 통해 연락이 왔다는 건….

인상을 쓴 천후는 희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생일이다. 어지간한 일이 있는 게 아닌 이상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희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일념이리라. 고마움에 다시금 그녀의 머리를 품어 안은 천후는 그렇게 통신기를 켰다.

“무슨 일입니까?”

<요청.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존재의 출현을 확인. 유그드라실 AI, 미미르는 자체적인 판단으로 영천후 당신의 소환을 건의하는 바입니다.>

“뭐…라고?”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미미르의 음성을 들은 천후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차라리 미연이나, 최완, 아니 그들이 아니라 유그드라실의 다른 누군가가 연락을 해왔다면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거절을 표했으리라. 오늘은 그만큼 그에게 중요한 날이었다.

그런데…미미르가 직접 연락을 해오다니? 이건 유그드라실의 마법사가 2차적인 판단을 내려 지령하는 것보다 더 빠른 움직임이 필요할 때나 보이는 일이었다.

“미미르. 신급 디제스터가 나타난 건가?”

천후는 이전 놀이공원에서 보았던 예란이라는 여자를 떠올렸다.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던 그 기이한 존재감을.

그들을 감지했다면 이런 선택을 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미미르가 전해오는 말은 달랐다.

<부정. 신급 디제스터는 출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나타난 존재는 디제스터 여부를 판단할 수 없는 개체입니다. 대신 그 존재의 곁에는 천급 디제스터 7체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뭐, 뭐?!”

“7체라고?”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던 셀레나와 강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나타난 천급 디제스터는 이그네스 엠프레스 하나였다. 그것도 사실 디제스터가 아니라 폭주한 마법사에게 일부러 디제스터 등급을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천급 디제스터는 아직 나타난 적이 없는 것이 맞았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나타난다면 분명 멸급 디제스터를 훨씬 넘어서는 괴물일 것은 자명했다. 그런데 그것들을 일곱 마리나 거느리고 있다면…대체 그것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건…….”

천후의 몸이 떨렸다. 그는 통신기와 희주를 번갈아 보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번 일은……. 위험하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천급 디제스터가 강력하고 어쩌고를 떠나, 지금 나타났다는 이 존재와 조우하는 행동 그 자체가 위험할 거라고 그의 감이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천후에게는 절대 명제가 있었다. 그의 숨이 붙어있는 한 이루고자 하는 목표.

세상에 나타난 모든 디제스터를 없애겠다는 디제스터 슬레이어의 명제.

언젠가 그의 힘이 쇠하고, 더는 현장에서 뛰지 못하게 되었을 때가 되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그의 삶. 그의 목적 그 자체.

지금 그것들 중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디제스터조차 아닌 녀석이라면, 오히려 디제스터의 근원 그 자체에 닿아있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의 뇌리에 스쳤다.

‘가야 한다.’

영혼이…울부짖는다.

그는 아주 먼 옛날. 기억을 가지기 시작한 10살 때부터 지금까지 그날의 꿈을 꾸고 있었다.

자신을 제외한 주변 모든 사람들이 한순간에 시체가 되어버리는 꿈.

인간이 이루어낸 모든 것이 무로 되돌아가 버리는 꿈.

그 사태를 시작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디제스터. 그것들의 뿌리를 뽑아버릴 기회가 그의 손에 쥐어진다면, 그는 자신의 모든 걸 던져버리고 이뤄내고 말리라.

그렇게 살아왔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살아왔다.

그러나…….

영천후의 눈이 천천히 희주에게로 떨어졌다.

희고 흰, 고운 얼굴로 자신을 올려보고 있는 여자.

아아…. 이 여자를 사랑한다.

사랑하고 있다.

그녀만 곁에 둘 수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뒤바뀌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로.

가야 한다고? 왜?

뭐하려고 이런 중요한 날에. 그녀의 생일에. 내가 프러포즈를 한 날에 그녀의 곁을 비우고 내가 목숨을 걸러 가야 하지?

싫다. 그러고 싶지 않아.

그냥 이렇게.

그녀와 영원히 있을 수 있다면 지금까지 영천후라는 인간을 이루고 있던 모든 요소를 던져버리라고 하더라도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아.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어느덧 통신기를 부서질 정도로 세게 쥐고 있었다.

모든 것을 끝낼 기회. 해결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면, 지금 가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두 가치가 충돌한다. 그것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며 그란 인간을 시험했다. 어느 쪽이 시험을 받는 것일까? 그것조차 알기 힘든 시험.

그 결정에 쐐기를 박은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쪽…….

눈앞이. 사람의 얼굴로 가득 찼다.

분을 바른 것처럼 새하얀 얼굴의 그녀는 양손을 들어 그의 양 볼을 감싼 채 속삭였다.

“다녀오세요.”

“하지만…!”

으직. 심장이 우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이 자리를 이렇게 쉽게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가득하다. 그러나…….

“주인님께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하세요. 그러시는 게…제가 사랑하는 당신입니다.”

“……!”

언제나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엔 아주 희미한 미소와 홍조가 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눈앞이 희뿌예졌다.

몸이 떨린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떨림이었다. 그는 다시금 그녀를 와락 안았다.

“고마워요…. 고마워. 정말로. 사랑해.”

“…….”

그녀는 말없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펄럭.

희주에게서 떨어져나온 천후는 입고 있던 양복 자켓을 벗어던지곤 현관으로 나가며 외쳤다.

“셀레나. 노블레스 클럽에 전원 소집 요청해. DS는 B랭크 이상과 공격대장 둘 전원 출격 대기! 현장에는 일단 나 혼자 먼저 접근한다!”

“…네!”

결정에 토를 달수가 없었다. 부분 신위를 이루어낸 천후는 사실상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일리미네이터. 그가 버티지 못하는 상황은 아무리 수가 많아도 버티지 못한다. 가장 위험한 곳에 그가 가장 먼저 향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정원에는 이미 큐브 엘리베이터가 떨어져 내려 있었다. 천후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

큐브 엘리베이터 안에서 천후는 미미르에게 현재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미미르가 그를 소환한 것은 그녀의 자체적인 판단이었다는 점. 유그드라실에선 아직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을 말이다.

평소엔 유그드라실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천후도 이번 상황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저런 존재가 갑자기 나타났는데 결정을 빠르게 내릴 수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관측됐다는 천급 디제스터만 7체다.

전 지구 최고의 전투 마법사가 다 모였었던 이그네스 엠프레스 레이드 때, 이미 인류의 한계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때 이그네스가 공격성을 조금만 더 드러냈어도 일리미네이터는 전부 전멸했을 것이다.

그녀의 당시 화력은 SA랭크 마법사가 현존하던 시절의 것이라고 했으니, 사실상 천급 이상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런 게 일곱이면……사실상 지구에 있는 모든 일리미네이터를 다 긁어모아도 잡아내지 못하리라.

그런 상황에서 일리미네이터를 불러봐야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일리미네이터 소집을 망설이며 발만 구르고 있을만했다.

<그 존재는 현재 공격성은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주변을 지키는 천급 디제스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그네스와 비슷한 케이스일지도 모르겠군.”

<긍정. 이그네스 엠프레스의 ‘소환’ 능력과 동일한 능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걸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미치고 환장해서 팔짝 뛰었을 것이다.

이그네스의 소환수, 이프리트들은 그녀의 힘이 다할 때까지 얼마든지 불러낼 수 있는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한 단계 더 높은 힘으로 구현할 수 있다면…그건 그냥 인류가 당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디제스터에 대해선 상상력에 한계를 두지 않은 인간 하나와 미지에 대해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은 AI만이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미미르. 저것과 조우했을 때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담담하게 그 말을 내뱉은 천후의 눈은 형형한 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말과는 다르게,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생존 욕구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미미르는 답했다.

<판단 불가. 자료가 너무나 부족합니다. 당신의 최초 조우가 그 자료로 쓰일 것입니다.>

“그렇군.”

큐브 안은 이윽고 조용해졌다. 얼마 지나면 그 존재가 있다는 곳으로 강하할 것이다. 그때까지 천후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죄송합니다. 영천후. 당신에게 너무나 어려운 일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

천후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걸렸다.

미미르는 AI. 인공지능이자, 인간을 흉내 낸 유사인격체이기도 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프로그래밍의 산물이기 때문에, 완벽히 인간처럼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미미르는 어디까지나 기계로서 사람을 대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과학과 마법이 융화해서 만들어진 기적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목소리의 톤 변화는 없지만, ‘사람답게’ 사과의 말을 꺼낸 것이다.

미미르가 천후에게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녀의 분신인 프레이, 프레이야와 데이터를 공유하는 그녀는 미연이 없을 때 그의 말상대를 해주던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때도 그녀는 결정적일 때. 감정이라 칭할 수 있을 편린을 보여주곤 했다.

“괜찮아.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인걸.”

미미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천후는 그것이 자신에게 마음의 대비를 할 시간을 주려는 그녀 나름의 배려라고 생각하고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침묵이 의미하던 바가 그가 생각했던 것관 전혀 달랐다는 걸 안 것은.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였다.

*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강화마법이 걸려있는데도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로 거센 바람.

이 정도의 기상 변화가 있다면 하늘 위 구름도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도, 신기하게도 하늘 위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맑은데도, 하늘 위에는 별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래에 넓게 펼쳐진 도심지가 밝히는 빛이 하늘의 빛을 모두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그걸 보고 있다 보면, 이 온통 암흑천지인 우주에 별이라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 하나만이 유일한 게 아닐까 하는 감상에 젖어버리곤 한다.

그리고…….

그의 앞.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첨탑 위에.

바로 그 고독을 닮은 소녀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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