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자신을 지구의 화신, 가이아라 자칭한 소녀가 말했다.
인류에게 최후의 시련이 내려질 것이라고.
그러나 이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단 그녀가 일종의 신적 존재라는 것 자체는…모두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유그드라실은 그녀가 등장한 시점부터 그녀를 촬영했는데, 놀랍게도 그 영상을 본 소녀의 이미지는 하나같이 조금씩 달랐다.
아니 애초에 소녀가 아니라 성인 여성을 보았다는 자들도 있었고, 남성으로 보였다는 자들도 있었다. 이런 조화는 당연히 아무나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보는 순간 느끼는 것이다. 그녀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그녀는 ‘신’이다. 우리의 어머니이며 별의 화신이라는 것을 그냥 지성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순간 직관이 작용해서 알아챌 수 있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그녀가 남긴 말은 수수께끼 그 자체였다.
그녀는 인류의 종언을 고했다. 그러나 그게 어떤 방식으로 찾아오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정말로 별의 화신이라면, 이 지표 위에 살아가는 인류 같은 건 한순간에 멸절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영천후를 통해서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세계 정상들 역시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지금 농담하는 겁니까?”
미국 대통령부터가 이런 소리를 꺼냈다. 천후는 솔직히 당연하다고 느꼈다. 오히려 지금 이 소리를 듣고 그를 광인 취급 안하는 놈이 더 이상했다. 그렇지만 천후는 담담히 다시 한 번 설명해주었다.
“그런…. 지구의 신이라고? 그게 대체 무슨…. 확신할 순 있는 거요? 영상이 있다고? 오…. 세상에.”
그 역시 보는 순간 이게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턴 패닉의 연속이었다.
“이게…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들 마법사의 존재만 해도 우리에겐 굉장한 변수요. 디제스터도 그렇고. 그런데 이 무슨….”
“저도 당혹스럽습니다. 그렇지만 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 마이 갓….”
화상통화를 통해 정보를 들은 각국 세계 정상들은 일단 이 일을 민간에게 당장은 숨겼다. 이걸 지금 당장 알렸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일단 멸망의 전조부터 알아내야 합니다. 운석이 떨어질지, 화산폭발이 일어날지…. 아니면 그 다른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그때부터 정부는 전 세계의 지성들을 비밀리에 모아서 인류멸망의 전조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온갖 영화적인 상상이 제한 없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지구가 달걀처럼 깨져나가더니, 그 안에서 초거대 디제스터가 튀어나와 별 대신 존재하게 될 거라느니 하는 소리도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나마 다행히도. 그 전조는 그리 머지않은 시간 내에 포착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생각한 최고로 극단적인 시나리오보다는 그나마 나은 전개로 진행되었다.
악시스 문디 주변의 황무지가 넓어지기 시작하는 것으로….
*
같은 시각.
지상에서 모든 일을 내려다보고 있는 눈이 있었다. 유그드라실. 마법사들의 요람.
그것은 지상 모든 인류의 종언을 고했음에도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고고히 떠 있었지만, 그 안에서 기거하고 있는 8천의 마법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유그드라실 중심부. 그곳엔 그들 중에서도 가장 고위층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가야가 나타났소. 이미 활동을 시작해버렸으니, 이제 돌이킬 수 없겠지.”
“그러나 우리의 준비가 부족하오. 랑크 메이거스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않소?”
“언제까지 그자를 기다릴 셈이죠? 그런 안이한 방법론으론 안 돼요!”
그 안에선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논쟁이 오가고 있었다. 서로서로 패를 나눈 그들은 극도의 대치를 보였다.
“기다려야 합니다. 어차피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자는 그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준비는 불완전하지 않습니까?”
“성공 확률은 6할을 넘소. 시도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다가 실패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어차피 이대로 가도 인류는 끝장날 판이네! 그렇다면 차라리 가능성 높은 도박에 걸어야지.”
“애초에 진실을 너무 많은 자들에게 공유했어…. 아직도 여린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군. 이래서야.”
“천천히 고사 되어가느냐. 단 한 번에 끝나느냐의 차이일 뿐. 그렇다면 후자가 낫지 않나?”
그것은 멸망은 맞이하는 자세에 대한 문제였다. 여기에서 그들의 의견은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그 꼴을 바라보며 유그드라실 한국지부장, 최완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 절대적인 힘을 가졌던 다섯 명의 초인이 만들어낸 이 하늘의 요람 그 자체와는 다르게 이들은 결국 모두 사람이다. 각자 생각도, 사상도 다른 이들은 한 기관에 몸을 담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의견이 통합되어있지 않았다.
최완은 이 부분에서 답답함을 느꼈다.
유그드라실은 아주 예전부터 지금 같은 상황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벌써 10년 전부터….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들이 가장 힘을 쏟아온 것은 이 사태가 일어났을 때를 대비하는 일이었다. 엘모세와트가 준동하고, 일리미네이터가 마법사 대변자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것까지 용인해가며 매달려온 일의 정체가 이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물론 최완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들이 취한 ‘대비’라고 하는 것은 확률론적으로는 아주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앞으로 일어난 모든 불의의 사태를 최고의 운으로 모두 회피해내야만 성립 가능한, 실낱같은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건 사상누각과도 같은 것.
그런 것에 모든 걸 의지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오히려 더 말이 되지 않는다. 그가 실망한 것은 그 의사결정을 이제 와서야 내린다는 이 상황 자체였다.
포기할 거라면, 이미 파악했던 10년 전에 끝내야 했다. 반대로 도박을 할 거라면, 그것에 온 힘을 다 쏟아부어도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어느 쪽도 제대로 선택하지 못했고, 그 결과 대비도 포기도 제대로 하지 못해 때가 찾아온 이 와중에도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다.
‘한심하군.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최완이 이들을 비난할 수만은 없었다. 그 역시 총대를 메고서 이 상황을 수습하고 의견을 하나로 일치시키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가장 사건에 밀접하게 다가가 있는 몸인데도, 한걸음 물러서서 그저 상황이 흐르는 대로 방치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상황은 조금 예상외의 형태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회의실 한쪽. 이 시끄러운 와중에서도 말없이 앉아있던 인영 하나가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아~. 의견이 너무 중구난방이네요.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지요. 몸이 두 개는 아니니까…. 그러니 여기선 여러분이 좋아하는 다수결로 정하는 게 어떤가요?”
흰색 가운에 안경을 쓴 남자였다. 날카롭게 느껴지는 가는 눈에는 지금의 감정이 그대로 반영되어 웃음기가 머물러있었다. 그의 발언에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남자는 계속 말했다.
“투표로 정하자고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랑크 메이거스를 기다려볼 건지. 아니면 지금까지 우리가 10년간 별의별 수모를 다 당해가면서도 준비해온 것들을 사용해볼지…. 간단하지 않습니까? 이런 건.”
설렁설렁 말하는 것 같았지만, 그의 말에는 은근히 뼈가 들어있었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걸 그냥 그대로 포기해버릴 거냐는 비웃음이.
“그런 식으로 유도하지 마시죠.”
“워어. 알겠어요, 알겠어. 그렇지만 투표라는 수단 자체는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다들 민주주의를 좋아하잖아요?”
싱글싱글 웃는 남자의 말에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의 얼굴엔 납득과 동시에 일말의 불안감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남자가 제안한 투표에서 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것보단 발언한 남자에 대한 불안감이 좀 더 컸다.
“…그럼 당신은 다수결에 따를 건가?”
“음? 제가 다수결에 따르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아니지. 오히려…너무 잘 지켜서 탈이었지.”
“하하하.”
남자의 입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요. 맞습니다. 저는 다수결을 좋아하죠. 선택은 당신들의 총의를 모아서 하세요. 저는 그것에 따르죠.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이제 조금 더 기묘해졌다.
이 유그드라실 안에는 마법사만도 팔천 명이 산다. 그들 하나하나가 제각기 초자연적인 능력을 다룰 줄 안다. 그럼에도 그를 보는 이들의 시각은 알 수 없는 무언가. 사람 아닌 다른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걸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남자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자.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지.”
어차피 이대로는 시간만 소모할 뿐이다. 그들은 표결을 준비했다.
양측 모두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어떤 결과가 나온다 하더라도 어차피 반목은 또다시 필연적으로 튀어나올 것이다. 어쩌면 이 건으로 유그드라실 분열될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준비를 계속했다. 거기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다.
이 표결에서 이겨서 저 남자만 포섭한다면……. 다른 어떤 페널티도 감수할만하다고.
그 생각은 양측 모두가 가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그드라실 전체에 투표가 시작되었다.
의제는 이랬다.
<실험체 Type-A를 죽일 것인가?>
결과가 나왔다.
“하하하. 그럼. 표결에 따르도록 하죠.”
안경 쓴 남자, 고인규의 웃음소리가 회의장 안에서 크게 울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최완은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그의 주먹에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정상들과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천후는 거실에서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현실감이 없네…….”
막상 가이아를 직접 만나고 온 것은 천후 자신이었지만, 그녀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하더라도 바로 현실감으로 와 닿지 않았다.
악시스 문디가 만들어내는 황무지가 넓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속도는 정말 느려 터졌다. 과연 지구 스케일이라고 할까? 저런 식으로 인류가 모두 멸망하려면 수백 년은 걸릴 기세다.
물론 충분히 큰 문제긴 하지만, 사실 그가 죽을 때까지 인류가 멸절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얼른 현실감으로 와 닿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천후는 자신의 손이 천천히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악시스 문디 영향권 확장과는 별개로…정체를 알 수 없는 미증유의 불안감이 그를 떨게 하고 있었다.
왜 이러는지는 몸의 주인인 천후 역시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그 기색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주인님.”
스륵.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곁으로 다가온 여자, 홍희주가 그의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녀를 바라보자, 천후는 이 와중에도 입가에 미소가 돌아왔다.
아직 그녀의 확답은 듣지 못했지만, 빠른 시일 내에 답을 들려주겠다고 그녀는 말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와 몇 번이나 입맞춤을 나눴는지 모른다.
사랑스럽다. 언제라도 곁에 있으면 안고 싶은 느낌이 드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와 함께할 수 있다니. 천후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꼈다.
비록 이 별의 화신이 나타나 인류의 종언을 고했다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는 행복했다. 유그드라실에서 살 때는 도저히 느낄 수 없었던 커다란 행복이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스윽. 천후는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희주는 저항하지 않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희미하게 떨고 있는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체온은 분명 차가웠지만…그럼에도 그는 그 마음의 따스함에 고마움을 느꼈다.
천후는 고개를 숙여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부디 이 행복이…삶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오직.
그것만을 바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