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약속의 날>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는 선고.
아직 유그드라실과 일리미네이터, 그리고 세계 정상들만 알고 있는 이 선고는…그러나 아직 현실감이 없었다.
어떻게 멸망할 것인가에 대한 청사진은 나왔다. 악시스 문디의 문명 무효화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는 것이 포착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도 느렸다. 아마 저 속도대로라면 넉넉잡아 수백 년 이상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과정에서 인류는 무진 고통을 받을 것이다. 지구에서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땅이 점점 좁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한정된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였으니까.
현재 인류의 기술력을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인류가 지구 대신 살아갈 수 있는 행성을 찾아갈 힘은 없다.
테라포밍은 꿈도 못 꾸고, 심지어는 지구 안에 설치되었던 바이오 스피어2 계획조차도 무참하게 실패하지 않았던가?
유인 우주선은 있었지만, 그건 처절할 정도로 제한된 환경에서 최고의 인력이 모여서 달이나 궤도에 우주정거장을 설치해 거기에 머물렀을 뿐이다. 무슨 수천만 명을 싣고서 빠져나갈 수 있는 계획 같은 건…SF 소설에서조차 수많은 전제조건을 달고 나서야 가능한 꿈의 영역이었다.
수백 년 이내에 그런 기술이 갖춰지기를 바라면서 인류의 생존영역을 점점 줄여가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말뿐인 결론일 뿐.
아메리카 대륙에 사는 이들에겐 어디까지나 아시아의 사막화가 넓어지고 있는 상황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누가 주도할 것이며,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도저히 현세대에서 이뤄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멸망은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것은 느렸고, 도저히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또 다른 확실한 멸망의 전조를 느끼는 이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리미네이터들이었다.
*
“요즘 디제스터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
“빈도가 끔찍해. 쉴 시간이 없다….”
가이아가 나타난 이후. 디제스터의 등장 빈도가 월등히 늘어나고 있었다. 그것도 서브 퀘스트는 거의 없이, 파급, 경급 디제스터의 출현이.
마치 전 세계가 멸급 디제스터 전조 초기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정규 공격대가 있는 미국, 대한민국, 유럽이나 A랭크 일리미네이터를 보유한 국가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그렇지 못한 곳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피로도가 빠르게 누적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경급만 해도 정규 공격대에 도움을 정하는 나라는 얼마든지 있었다. 국가 내부 사정이 불안하거나, 독재 정권이 들어서 있는 곳, 근대화가 덜 된 국가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했다.
이런 나라들에서 디제스터 등장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하자, 일리미네이터 사상자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본래부터 몇 안 되는 인원이 간신히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일거리가 확 늘어나 버린 것이다.
메인 퀘스트 디제스터를 상대하고 난 뒤의 전투 피로는 크다. 그나마 일상적으로 고위 디제스터를 상대하는 공격대는 일상화되어있으니 그게 최소화되지만, 여전히 4인 드리블에 의존해 디제스터를 잡고 있는 이들은 한 번 파급을 잡고 나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녹초가 되곤 했다.
이 전투 피로는 오로지 휴식. 쉬고 또 쉬는 것밖에는 풀 방법이 없는데, 계속 초긴장 상태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
“뭔가 강력한 디제스터라도 출연하는 게 아닐까?”
“이번에야말로 천급이나 신급 디제스터가 나타날지도 모르겠는걸.”
일리미네이터 사이에선 이런 이야기가 공공연히 돌았다. 이 정도까지 대규모 전조단계 발현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과연 여기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그걸 예측할 수 있는 이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저 막연한 불안감을 가슴에 품은 채.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 영천후가 지상에 내려온 지 1주년을 맞은 것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였다.
*
유그드라실이 디제스터 발생 경보를 울린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하늘에 섬광이 터졌다.
아직 혼돈에서 완전히 형태가 다 만들어지기도 전에 나타난 것이다 보니, 마치 둘의 등장은 동시에 일치한 것처럼 보였다.
“꾸루루루….”
거대한 달팽이처럼 생긴 괴물은 머리 부분에 달린 두 개의 촉수를 까닥이면서 물컹 뭉컹한 온몸에서 더욱 가느다란 촉수들을 뻗어내고 있었다.
가느다랗다고는 하지만 놈의 몸 크기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사람 허벅지만한 촉수들이 수 미터나 뻗어 나가며 주변 행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저것에 닿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피만 빨아 먹힌다면 그나마 다행이지 않을까?
괴물의 등장으로 정체된 도로 위. 사람들은 촉수를 피해 차에서 내려 도망치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 와중.
“하아아압!”
놈의 머리 위에서 터진 백색 빛 속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검은 불길 두른 그것의 주변에는 번뜩이는 빛무리가 함께 하고 있었다.
몸에 불이 옮겨붙어 완전히 휩싸여버린 것과 같은 형상을 한 그것은 아래쪽의 괴물을 내려다보고는, 그대로 신형을 아래로 쏘아 내렸다.
그 순간.
퍼컥! 푸화아아악!
크기만으로 치자면 수십 분의 1도 되지 않은 그의 몸이 부딪히자, 폭음이 터지며 괴물의 몸이 속절없이 터져나갔다. 물풍선에 총을 쏘면 이런 꼴이 되지 않을까? 아니, 그것보다 더 깔끔했다.
흑염이 내려꽂혀 터져나간 괴물의 살덩이는 놀랍게도 땅에 닿기도 전에 검은 불길에 살라 먹히며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괴물은 최소한의 타는 살점조차 남기지 못하고,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 모습을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서서 지켜보던 시민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DS다! DS야!”
“그가 우리를 구해줬어!”
“와아아아!”
이 나라. 대한민국 안에서 그의 존재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이 나라에서 나타나는 모든 메인 퀘스트 디제스터를 홀몸으로 처리하는 초인, 영천후는 이미 이 나라 국민들의 우상이었다.
“후우.”
처리를 끝낸 영천후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기 전에 한 번의 도약으로 건물 위에 올라서서는 통신을 했다.
“퇴치완료. 디제스터 사체 처리반 출동해주세요. 혹시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사장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1주년 축하합니다.>
“음? 하하.”
통신을 받은 직원이 한 말에 천후는 웃음으로 답했다.
아무래도 그의 성장배경은 일리미네이터 중에서도 특이하다 보니, 오늘이 어떤 날인지 널리 퍼진 모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원래는 조촐하게 가족들끼리 치르려고 했던 축하 파티의 규모가 커져 버렸다.
천후는 약간 부담스러워했지만 그래도 그냥 어울려주기로 했다. 뭐라도 이유 삼아서 떠들썩하게 지내고 싶다는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즘 분위기가 워낙 가라앉았으니까, 이렇게라도 즐기게 해줘야지.’
적당히 희주와 사람들만 건져서 회장을 먼저 빠져나가 주면 될 일이다. 그럼 적당히 먹고 마시다가 알아서 파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천후는 씁쓸함을 느꼈다. 일리미네이터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그 역시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불안감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는, 이 업계에서 오래 일한 이들이라면 당연히 갖추고 있는 직감에서부터.
그건 텔레포테이션 시스템 구성을 위해 좀 더 자세한 디제스터 등장 빈도를 전 세계에서 수집하고 있는 DS에서는 좀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수치가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불안감을 잠시 해소해주는 것 역시 그의 일이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파티 규모가 좀 커지는 것 정도야 뭐 그리 대수일까?
당장 파티 당일인 오늘도 경급 디제스터가 나타난 걸 홀로 잡아낸 상황이었다.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가이아를 직접 대면한 천후의 경우 훨씬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또 다른 부분에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유그드라실이 너무 조용하다.’
이전. 친란에게 받은 해설자료를 생각해보자면…결국 마법사에게 힘을 부여하는 ‘신’이란 존재는 바로 그녀일 가능성이 높았다.
꾸준히 마법사와 신에 대해 연구해왔던 기관이 바로 유그드라실이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면 무언가 활동을 보여야 정상이었다. 그녀와 다시 접근하려고 들던가…아니면 정말 최소한 같이 멸망을 막아보려고 노력하는 티라도 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유그드라실의 활동은 경화되었다.
공격대원들이 해외 디제스터를 잡기 위해 큐브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때, 본래 모이는 그 홀에는 최소한 관리직원 몇 명은 대기하곤 했다.
그런데 요즈음엔 그런 것도 없이 미미르의 목소리만이 그들을 맞이해주고 있었다. 물론 어차피 공격대원들이 와서 유그드라실에서 도둑질할 것도 아니고…그냥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이용엔 문제가 없었지만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별일 아니길 바라야겠군.”
마침 오늘 파티에는 평소 유그드라실에서 친밀하던 사람들에게도 초대장을 보냈다. 그놈의 비밀 타령만 아니라면, 오늘 만나서 무슨 일인지 물어볼 수 있으리라.
그렇게 말한 천후는 변신을 풀고 아래서 소리 지르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 정도 디제스터를 하나 잡았으니, 아무리 이런 전조에 가까운 상태라도 좀 조용해질 것이다. 그럼 하루 정도는 느긋하게 파티를 즐길 수 있으리라.
그리고…그게 끝나면.
천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기대감으로 크게 뛰는 심장 고동을 느끼며.
약속한 것이 있었다. 오늘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발걸음이 좀 더 빨라졌다.
*
축하파티는 엔체스터 호텔 레스토랑에서 치러졌다. 그 자리에는 DS의 일리미네이터 뿐만이 아니라, 평소 친분 있는 이들 역시 모여 있었다.
“소식을 듣고 찾아와봤네. 늙은이는 방해만 되겠지만 말이야.”
“아닙니다. 대환영이지요. 들어오시죠.”
다른 정규 공격대의 공격대장뿐 아니라, 안소니 크라우저 역시 노구를 이끌고 찾아왔다.
그는 엘모세와트 건에서 직접 나선 이후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져서, 이제는 정말 완전히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찾아와준 것이라 그만큼 의미가 더 컸다.
“얘. 셀레나. 그래서 너는 시집 언제 갈 거니?”
“아으…. 그만 좀 해요, 이모.”
회장 한편에서는 머니 크래프트의 표면적인 마스터 제이나가 프리니와 함께 셀레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셋이 이렇게 서 있으니 정말 나이별 성장 사진 같은 느낌이 들 지경으로 빼닮은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나타나자마자 시집 이야기를 들은 셀레나는 질색하는 표정을 하면서 도망치려 했지만, 제이나는 그녀를 절대 놔주지 않았다.
“제, 제가 이런 데 와도 되는 건지….”
“괜찮아, 언니. 아무 상관 없어!”
“노 부담. 얼른 먹어!”
천후의 이종사촌인 세화 역시 초대를 받고 와있었는데, 아는 사람이 없어 쭈뼛거리던 것을 이브가 캐치해서는 끌고 갔다. 웬 외국인 꼬마 아이가 친한 척을 하자 그녀는 당황했지만, 곧 그녀들이 천후의 가족이라는 것을 듣고 나서야 안심하고 마음을 풀었다.
“인사드려, 예빈아.”
“안녕하세요.”
“아~. 따님이시라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레이나드는 성아와 함께 예빈을 데리고 회장에 와서 천후에게 인사를 시켰다. 세 사람의 사정을 익히 알고 있던 천후는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자연스럽게 셋이 함께 돌아다니는 모습이 이미 어엿한 가족처럼 보였다.
“좀 지나면 소식이 들리겠네요.”
“그러게요. 나는 언제…후우….”
평소엔 레이나드와 붙어 다녔던 정태원은 오늘은 튕겨 나와서 홀로 술을 홀짝이고 있는 것이 슬프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돌아보면서도, 천후의 시선은 종종 들어오는 입구 쪽으로 향했다.
오늘 이 파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역시 희주의 결정이었지만…그 전에 역시 가장 와줬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당최 얼굴을 비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에 천후는 약한 아쉬움을 느끼고 있을 때.
회장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세 사람 중 하나.
고인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