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파국>
“형……?”
천후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가장 의지해왔던 세 사람 중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고개를 돌아볼 순 없었다. 자신의 꼴이 대체 어떤 상태인지…감히 고개조차 뒤로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몸이 그의 의지와 따로 놀았다.
고개는 아래로 꺾이고, 다리에서도 힘이 빠져나갔다. 눈앞에 있는 희주의 얼굴도 이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고는 어둠 하나. 이제 시각으로는 아무것도 판별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는 동안….
뚜벅. 뚜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그 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정말이지 어렵게, 천후는 입을 움직였다.
“대체…무슨 소리야……?”
쥐어짜 낸 목소리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영천후는 천천히 자신의 체온이 낮아져 가는 것을 느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천천히 얼음장처럼 식어간다. 이런 감각을 그는 몇 번인가 맛본 적이 있었다.
과거. 텐타클 뱀파이어에게 심장을 관통당했을 때.
드래곤과 겨루며 팔 하나가 박살 나고 척추가 전부 우그러들었을 때.
이강호에게 칼을 맞았을 때.
순간 천후는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아. 나는 지금 죽어가는구나.
그 실감을 가르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직 의식은 남아있었나요? 이거 참. 끈질기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희주 씨가 손속에 사정을 둔 건지…. 아아. 뭐 후자겠지. 어리석은 것.”
“도대체…….”
무슨 소리야? 당신이 하는 말은 아무것도 알아먹을 수가 없어. 어릴 적부터 그랬던 면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지금은 특히 그래.
하고 싶은 말이 입안에서만, 아니 거기까지 가지도 못하고 의식 안에서만 맴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올라오던 냉기는 이제 팔목을 지나 팔 전체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팔 뿐만이 아니다. 발가락 끝. 신체의 말단에서부터 싸늘하게 식어가는 이 감각은 말 그대로 죽음으로 향하는 감각.
천후가 이것을 여러 번 느끼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기적적인 힘, 혹은 우연의 산물들에 가까웠다면……지금은 그 어느 것도 작동하지 않았다.
검은 세자매도. 이런 때가 찾아오면 언제나 들려오던 노이즈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죄인 된 심정으로 울면서 용서를 비는 여자의 목소리만이.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그제야 천후는 자신이 어떻게 서 있는지 알았다. 자기 힘으로 서 있는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앞에 있던 그녀의 몸에 간신히 기대어, 몸을 완전히 맡기고 있어서 서 있는 것 같았을 뿐이다.
이미 그의 다리에 힘은 완전히 풀렸다. 그녀가 받쳐 안고 있지 않았다면 진작에 바닥에 널브러졌을 것이다.
의식이 점점 몽롱해졌다. 묻고 싶은 건 산더민데, 이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아무것도 없었다.
목소리만이 일방적으로 들려왔다.
“어쩔 수 없었어요, 영천후. 본래는 나도 좌시할 생각이었지만, 다수결의 결과가 이렇게 나왔으니까. 그에 따라줘야지. 그래도 조금 아쉽네요. 저 아이가 완전히 당신의 여자가 되기 바로 직전에 이렇게 일을 벌이게 되다니. 그 뒤가 더욱 극적이었을 텐데…. 안 그래요?”
대답은 할 수 없었다. 머리와 마음속에서 아무리 비명을 내지르고 호통을 쳐봐야, 죽어가는 이 몸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어느덧 그의 바로 옆까지 다가온 남자―
“오로지 당신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저 아이가 당신이 선택한 반려자라니. 우습기도 하지.”
고인규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의 의식은 완전히 가라앉았다.
*
사건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영천후가 희주와 회장을 비운 뒤. 파티는 슬슬 친목회 성격으로 변해갔다. 같은 일리미네이터라곤 해도 정규 공격대의 마스터와 직접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그건 공격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그네스 건에선 그들 역시 통합으로 통제해본 경험이 있지만, 그때 이후론 거의 얼굴도 보지 못했던 게 사실인지라, 태원과 레이나드는 패트릭과 제이나와 이런저런 대담을 나누고 있었다.
아이들끼리는 라즈베리를 중심으로 모여있었고, 이강호와 셀레나는 둘의 빈자리를 대신해 파티 분위기를 이끌고 있었다.
바로 그때….
덜컹! 호텔 로비에서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정체는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유그드라실의 직원들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놀란 이강호는 우선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제지했다. 그녀는 진리구현자. 그들이 갑자기 이상한 짓을 해도 혼자서 전부 상대해낼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그때, 그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뛰쳐나왔다.
“이강호 씨? 천후는? 천후는 어디 있죠?”
30대 초반에 백색 가운을 입은 여자. 강호는 그녀를 익히 알고 있었다. 이미연이었다. 영천후의 어머니나 마찬가지인 여자.
이전 사정이 있어 잠깐 불편한 관계가 된 적도 있었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그녀와의 관계도 결국 회복되었다.
“지금 천후는 최상층에 있습니다. 미연 씨가 오셨다고 말씀드리면 내려올 겁니다만….”
“아니요! 지금 찾아가야 해요! 지부장님!”
“1층에 고인규가 안 보인다. 이미 움직였군!”
그녀의 뒤에는 장년의 남자 역시 있었다. 그들을 본 강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보니 그 둘 모두 몸에 상처가 있었다. 최완은 이마가 깨졌는지 한쪽 눈이 피범벅이었고, 이미연 역시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함께 들어선 유그드라실 직원들 역시 모두 몸 성한 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몸을 이끌고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순간 강호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입니까?”
“설명할 시간이 없네. 지금 이 자리에선…자네 말고 도움이 안 되겠군. 내 손을 잡게!”
강호는 잠깐 망설이다가, 인상을 찌푸리곤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순간, 강호는 텔레포테이션 특유의 감각을 느꼈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할 정도의 짧은 시간. 그들은 어느새 앤체스터 빌딩 최상층. 천후와 희주가 머무는 프레지덴셜 스위트 룸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거실 안에서. 또 한 명의 사람이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거실 저편으로 보이는 테라스…. 두 남녀가 서로를 끌어안고서 속삭이는 광경을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며.
그녀의 옆에 있던 이미연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애한테서 떨어져, 천후야!!!!!”
강호는 순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오늘 이 파티는…궁극적으로 보자면 저 둘을 위해 마련한 자리다. 천후 뿐 아니라 희주 역시 마음을 굳힐 수 있도록.
그 누구라도 저 둘의 사이를 갈라놓을 순 없다. 아무리 이미연이라도 말이다. 그런데 대체 왜 저런 소리를 저렇게도 간절하게 외친단 말인가?
그 이유는 그다음 순간 알 수 있었다.
푸확……!
테라스에서 피가 튀었다. 보통 양이 아니었다. 마치 몸에 폭발물이라도 붙여서 터트린 게 아닐까 싶은 엄청난 양의 피와 살점이 천후의 등 뒤에서 터져 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
그 장면을 지켜보던 강호는 멀어져가는 현실감에 자기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천후가. 공격을 받았다.
누구에게? 희주에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홍희주에게?
그럴 리가.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강호가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릴 순 있어도, 희주는 절대 그럴 리 없다. 아무리 속이 상하고, 아무리 천후 때문에 가슴이 아파도 이불을 잡고 홀로 울 아이다.
그런데 그녀가 그를 공격했다고? 그것도 저런 살수를 써서?
판단력이 흐트러졌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그 사이….
“고인규, 네 이놈!”
“아. 가디언이 오셨군.”
옆에 있던 남자가 소리치며 달려나가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쿠웅! 기묘한 감각과 함께 강호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쓰러졌다. 갑자기 자기 체중이 몇 배로 불어난 것처럼 도저히 가눌 수가 없었다.
“꺅!”
“크윽!”
“지켜만 보십시오, 가디언. 뒤늦게 와서 뭘 막을 수 있다고.”
간단히.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손만 뻗는 그 동작 하나로 셋을 저지한 그는 천천히 천후에게 다가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말했죠, 영천후. 저는 언제까지고 당신의 편인 건 아니라고. 지상에 내려온 지 1년. 그동안 꾼 꿈은 즐거웠습니까?”
“아. 아직 의식은 남아있었나요? 이거 참. 끈질기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희주 씨가 손속에 사정을 둔건지…. 아아. 뭐 후자겠지. 어리석은 것.”
귓가를 어지럽히는 목소리가 들린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울먹이는 목소리도.
“어쩔 수 없었어요, 영천후. 본래는 나도 좌시할 생각이었지만, 다수결의 결과가 이렇게 나왔으니까. 그에 따라줘야지. 그래도 조금 아쉽네요. 저 아이가 완전히 당신의 여자가 되기 바로 직전에 이렇게 일을 벌이게 되다니. 그 뒤가 더욱 극적이었을 텐데…. 안 그래요?”
머릿속에 백열이 튀었다. 그 순간, 강호는 ‘힘’을 해방했다.
“네 이노오오오오오옴!!!”
후욱! 그녀를 억누르던 힘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순식간에 몸을 튕겨 일으킨 그녀는 손을 위로 뻗었다. 그러자 어느새 그 손에는 그녀가 일생 단 한 번밖에 사용해보지 않은 검, 난정이 쥐여있었다.
“응? 아, 이런. 진리구현자군요.”
고인규의 얼굴에 낭패의 표정이 스쳤다. 은색의 선이 되어 돌진해오는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손을 내뻗어 보인 그는 그러다 인상을 찌푸리고는 외쳤다.
“홍희주. 막아요.”
“뭣?!”
놀랄 틈도 없이…제 사랑을 끌어안고 울고 있던 여인이 움직였다. 시체처럼 늘어져 버린 남자가 쓰러지는 것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그녀는 월하홍취를 쥐고서 그녀의 초격을 막았다.
“희주, 네가!”
“…….”
마주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강호는 한눈에 그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검은 머리칼 사이에 드러난 눈동자는 평소의 흑진주와 같은 검정이 아니라, 녹여둔 황금처럼 일렁이며 빛나고 있었다. 그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입에서는 사과의 말이 귀곡성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걸 보고서 그녀가 평소와 같은 상태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뭔가 사정이 있음을 간파한 강호는 단숨에 그녀를 제압하고 고인규를 치려고 했다.
그러나.
캉! 카카카카캉! 근력 차이를 이용해 손아귀에서 칼을 놓치게 한 후 어깨를 찌를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당하지 않고 그녀와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강호의 눈이 커졌다.
‘말도 안 된다.’
DS 본사를 차린 이후. 영천후 전용 훈련 시설도 갖춰진지라 그녀가 천후의 대전 상대를 해주는 일은 없어졌다. 당연히 그녀가 칼을 다시 잡을 일 역시 거의 없었다. 당연히 실력이 낮아졌으면 낮아졌지, 높아질 리가 없었다.
그런데…이건 이전에 붙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둘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순수한 완력 차이는 별수 없지만, 그것을 제하고 나면 완벽하게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게다가….
킥! 키기기기긱! 칼날과 칼날이 맞부딪힌 후 미끄러진다. 발걸음으로 옆으로 빠지면서 부드럽게 다시 목을 그으러 오는 것이다. 강호는 그에 대응해 움직이고선 그녀를 밀쳐내고서 노려보았다.
‘학습하고 있다.’
그걸로 모자라, 강호의 검기들을 흉내 내 고스란히 체현하고 있었다. 저건 이전에 알던 홍희주는 절대로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가만히 서 있는 마네킹 상대도 아니고, 이강호를 상대로 시도할 수 있을 만한 힘이 그녀에게는 없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완전히 위협권에서 벗어난 고인규는 빙그레 웃었다.
“아. 위험했습니다. 역시 진리구현자는 변수군요. 그 사이에 신역도 어느 정도 무효화시키게 되었나요? 괴물이 따로 없군요. 이대로 계속하면…좀 피곤해질 것 같으니. 이쯤에서 물러나지요.”
“누가 놔줄까 보냐!”
그 말에 노기를 띤 강호는 억지로 희주를 힘으로 밀쳐내고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고인규는 그런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저도 딱히 놔달라고 하진 않았는데요?”
덜컥. 순간, 그녀의 몸이 잠시 우뚝 멈췄다. 그걸 본 고인규의 표정은 질렸다는 듯이 일그러져있었다. 아무래도 이 정도 효과를 바란 게 아닌 듯 싶었다.
“진짜 귀찮네…. 죽었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말해두죠.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그녀와 처음 만난 곳으로 오라고 하세요. 그녀를 되찾고 싶다면 말이죠.”
그 말을 남긴 그는 옆에 있던 홍희주를 채가듯이 손을 끌더니, 테라스 밖으로 몸을 날리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는 방 쪽으로 던졌다.
그것은 약병.
“저건?!”
불길한 느낌 그대로, 그것은 깨지면서 디제스터가 되어서 그녀를 덮쳐왔다.
척도는 파급. 이제 와서 그녀의 상대가 될 녀석은 아니다. 강호는 단숨에 그것을 베어 넘겼지만…….
그때는 이미 고인규도, 홍희주도 사라진 뒤였다. 그제야 간신히 몸을 일으킨 이미연과 최완은 바닥에 쓰러진 천후 옆에 다가가 있었다.
강호는 그런 둘을 바라보다가…최완의 멱살을 잡고서 노성을 토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똑바로 말해보시죠.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을 죽여 버리기 전에…!”
그녀의 두 눈에서도 어느덧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300화입니다. 지금껏 함께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챕터 2 중반 즈음에 말했듯이, 저는 이 글을 해피엔딩으로 끝낼 생각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 고난은 있겠죠.
이제 얼마 안남았네요. 계속 가보겠습니다. 완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