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숨겨왔던 것>
2,059일 기록을 다시 한 번 재생합니다.
일이 터졌다. 이걸…. 여기에 대체 뭐라고 남겨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은…. 나도 사건을 정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으니. 기록을 남긴다.
오늘은 녀석이 유그드라실 직속 일리미네이터로서 처음으로 디제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지상으로 파견된 날이었다.
노친네들. 정말 안달이 나서는! 빨리 상황을 정리하고 싶어서 미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처음 상대하는 것도 파급 디제스터. 녀석의 기본 랭크로는 버거운 적이었다. 단련을 했다지만.
나타난 곳은 대한민국.
강원도 산간에 있는 연구단지였다.
처음엔 이곳이 대체 뭐하는 곳인지 아무도 몰랐다. 연구단지라는 것 자체도…. 겉으로는 화공 약품 저장소로 위장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화공 약품 저장소는 굉장히 흔한 편이다. 대도시에도 공공연하게 염소나 황산을 대량보관하는 판에, 강원도 산간지방에 뭘 보관하고 있는지까지 파악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특이사항이 있었다면, 그 인근에서 디제스터가 나타나자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 아주 급하게 일리미네이터 파견을 요청해왔다는 것이었다.
민가에서 거리가 꽤 있는 곳이었다. 디제스터 발생률은 인구밀도에 비례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저런 사람도 없는 곳에 나타난 경우는 천운에 가까웠다. 일리미네이터 없이 군인들이 알아서 퇴치해볼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일리미네이터들이 기업을 차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군이 디제스터를 퇴치하지 못할 거라고 믿는 국민들이 많다. 그 의문을 종식하기에 이만큼 안성맞춤인 상황도 없는데 굳이 일리미네이터를 요구하다니?
의아했지만, 의뢰를 받은 이상 중계를 한다. 그게 우리들의 일이었으니까. 워낙 빠른 일 처리를 바랬기 때문에, 유그드라실 직속 일리미네이터인 녀석이 나서게 되었다.
뭐…. 그래도 거기까진 좋았다.
이미 C 랭크 이상의 강화마법을 쉽사리 사용하던 녀석은 디제스터를 몰아붙여 갔다. 역시 이날만을 기다리며 밥만 먹고 디제스터 잡을 궁리만 했던 녀석답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늑대와 황소를 반쯤 섞어놓은 괴물을 천천히 함락시켜나간 녀석이 마무리 공격을 준비하던 때였다.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싸움이 계속되면서 둘이 싸우는 장소는 그 예의 연구단지 깊숙한 곳으로 바뀌었다.
군과 관련된 시설이었는지, 위장되어있었던 절벽 벽면이 무너지면서 철문이 나타났는데, 천후는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디제스터를 그 안쪽으로 메다꽂아버렸다.
그때였다.
진짜 사건이 터진 것은.
*
어렸을 적의 나. 영천후라는 인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정적인 부분에서 무미건조한 인간이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외면에 표시하는 경우가 적었다. 그건 대참사가 있었던 10살 무렵 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청소년기가 되어서도 쭈욱 그래 왔다.
의사소통을 길게 표시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하나. 디제스터를 쓰러뜨리기 위해 단련한다. 그것 하나만을 존재하는 것처럼 나는 자신을 칼처럼 깎아가며 살아왔다.
그렇게 열다섯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첫 일이 들어왔다.
파급 디제스터 처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B 랭크 강화마법도 자유롭게 다루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파급 디제스터를 잡아오라는 것은 ‘죽어라’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별 내색도 하지 않고 지상으로 내려갔다. 다른 사람이 보자면 죽으려고 환장한 꼴이었지만, 그때 나에겐 그냥 디제스터를 잡는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명감조차 아닌, 할 게 그것밖에 없으니 하는 인형과도 같은 마음.
큐브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내려간 곳은 대한민국 강원도 산간지방이었다. 허술하게 철조망이 쳐져 있는 곳 안에는 드럼통들이 잔뜩 쌓여있었는데, 그 안쪽에서 늑대와 황소를 섞어둔 것 같은 디제스터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근처에 민가가 없었으니 습격할 인간조차 찾지 못하고 그냥 멀뚱히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종종 근처 드럼통이나 부서뜨리면서.
그러던 녀석은 나를 발견하자 좋다고 달려들었다. 나 역시 용건은 녀석에게 밖에 없었으니 곧바로 싸움을 시작했다.
‘귀찮다.’
처음 느낀 감상은 그것이었다. 놈의 거체를 보고서 두려움을 느낀 것도 아니고, 살아남을 방법을 짜낸 것도 아니다.
그저 여러 번 후려쳐도 튼튼하게 버티는 것 자체가 귀찮았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놈의 발톱을 피해서 파고 들어가 두개골을 때리자 머리통이 갈라지면서 충격으로 주저앉았지만, 놈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빨을 들이대 왔다.
그 터프함 자체가 귀찮음으로 다가왔다. 죽이는데 오래 걸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다. 나는 아직 사냥에 미숙한 맹수처럼 놈을 쉬이 마무리하지 못하고 싸움을 질질 끌고 있었다.
“크르르…….”
강력한 재생력을 가진 디제스터 역시 계속해서 일방적으로 공격당하자 두려움을 느꼈는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오로지 인간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디제스터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공격성을 잃지 않지만, 그래도 공포를 느끼긴 했다. 오히려 이상한 쪽은 내 쪽이었다.
미숙한 강화마법의 영향으로 팔이 몇 번이나 부러졌었음에도 나란 놈은 그냥 무작정 놈을 두들겨 패고 있었고, 그건 정말 죽자고 작정한 꼴이었다.
그렇게 놈을 몰아붙이고 있을 때였다.
콰아아앙! 화공 약품이 굴러다니던, 터져 나오던 신경도 쓰지 않고 놈을 몰아붙이던 나는 결국 산을 끼고 지어진 시설의 막다른 곳까지 놈을 밀어붙였다.
그렇게 공격을 맞고 날아간 디제스터의 몸이 산비탈에 부딪혔을 때…….
갑자기 그곳이 무너져 내린다 싶더니, 그 안쪽으로 금속 문이 드러났다.
“…….”
물론 나에겐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기 때문에, 그저 토사물에 파묻힌 놈을 마무리하러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다음 일격으로 놈은 닫힌 철문을 뚫고는 안쪽으로 날려져 버렸다.
“…….”
그제야 아주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디제스터의 크기는 상당히 큰 편인데, 이놈이 통째로 들어갈 수 있을만한 넓은 복도가 있는 지하시설이라니? 화공 약품 이상으로 위험한 것들이 저장되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도 모를 놈을 그냥 놔둘 수도 없는 법. 나는 그 시설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보았다.
시설 내부는 나와 디제스터의 충돌 여파로 화재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불길 너머로…수많은 수조가 보였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들어있었다.
아니. 당시의 나는 그것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건…말하자면 포르말린에 절여져 있는 개구리 같은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를 보관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이마에 시체라고 써 붙인 것도 아니니 한 번쯤은 그들의 생존을 의심해봐도 좋으련만, 신기하게도 나는 그들을 보는 순간 그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이를 지나 발걸음을 옮기니, 저 안쪽에 상처 입은 괴물이 보였다. 그런데 놈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뒤에서 쫓아오는 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놈은 다른 것에 시선을 빼앗겨 포효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선 기회에 지나지 않았다.
순간…내 몸에서 빛무리. 근래 와서야 간신히 통제할 수 있게 된 부분 신위의 빛이 맴돌았다.
섬광이 터졌다.
그 상태에서 힘을 한 번 방출했을 뿐인데 천장에는 구멍이 뚫리고, 디제스터는 그대로 재생력조차 끊긴 채 시체가 되고 말았다.
난 그 시체의 머리를 짓밟으며 그 위에 올라섰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보았다.
그녀를.
“…….”
“아…….”
하얀 나신의 소녀였다. 지금 여기에 쭉 깔려있는 수많은 수조들. ‘시체’가 들어있는 수조에서 막 나온 듯한 그녀는 깨진 유리조각 사이에 몸을 누인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 역시 태양을 등진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이라곤 정말 손톱만큼씩 밖에 내보이지 않던 시기였다. 당시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나는 그녀를 보고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어야 했다. 눈앞에서 알몸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당시의 나는, 불쾌해 하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그녀는 이질적이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불가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죽은 여자가 왜 살아서 움직이고 있단 말인가?
그런 내 생각을 알 수 없는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는 수조가 깨져서 유리조각 천지다. 당장 그녀의 몸 이곳저곳에도 덕지덕지 붙어있어, 언제 피를 볼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런 위험성을 아는지 모르는지…한 걸음 한 걸음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질적인 것의 접근. 있을 수 없는 것이 다가온다.
새하얗기 그지없는 흰 피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 나이에 걸맞게 봉긋하게 솟은 젖가슴이 여과 없이 드러나 보였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나에겐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것보다도…좀 더 본질적인 것이 보인다.
그것은 깜깜한 흑암이었다. 소년이었던 ‘나’에게는 생소한 것. 날 때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순간 나는 그녀가 왜 다가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불쾌감이 아니라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뭐라고 불러야 할까? 연민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동질감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
그녀와 나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완성된 존재였다. 그냥 생존해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귀결이 끝난 존재들.
그러나 그것은 존재 그 자체로는 완전할지 몰라도, 생명체로서는 부적격이다. 그녀는 그 결격을 채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스륵. 나신의 소녀가 천천히 내 팔에 목을 감아왔다. 무표정의 나는 무표정의 그녀를 가만히 내려 보았다.
광점 하나 없는 눈동자가 보였다. 여기에 빛이 깃들게 할 방법은 나는 알고 있었다. 그건 분명. 그렇게 어렵지 않은 행동.
그렇기에. 행했다.
나는 온몸이 유리조각 투성인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며, 그 붉은 입술에 입을 겹쳤다.
그러자…….
“아…. 아아아아아아아아―”
머릿속에서. 섬전이 지나갔다.
지금까지 ‘나’에게 전혀 없었던 것들. 아니, 없다기보단 ‘막혀있던’ 것들이 그 순간 해일이 되어 덮쳐왔다.
그것의 이름은 감정이요, 인간성이었다. 지금까지 더디기 짝이 없었던 그의 감성적인 부분들이 둑이 터진 것처럼 한꺼번에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커다란 내적 변화에 아울러, 외적인 변화도 찾아왔다.
나의 몸은 백열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그네스와 겨뤘을 적, 단 한 번 체화한 적이 있었던 진정한 ‘신위’의 형상이 그 자리에서 구현되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타 죽어버릴 강력한 백열. 하지만 소녀는 비명을 내지르는 내 몸을 끌어안고서 그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마치 그 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것처럼….
그리고………….
*
눈을 뜨자, 사람이 보였다. 처음엔 흐릿했지만, 조금 지나자 그 형상이 잡혔다. 천후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다. 이강호였다.
“천후야!”
외침 소리와 함께,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보였다. 셀레나, 친란, 아이들…….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처음에 든 것은 이 생각이었다. 그러다…그의 눈에 또 한 명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미연.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여성이었다. 그녀에겐 지금 이날까지도 감사하고 있다. 그렇지만…지금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아…저씨. 있죠? 여기에.”
“그래.”
이 남자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몇 마디 한 것만으로 벌써 의식이 멀어지려 한다. 그걸 간신히 다잡은 천후는 그에게 물었다.
“그날……. 날 쓰러뜨리고 나서……. 희주 씨는 어디로 보냈던 거야?”
최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