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기억을…되찾은 거냐?”
옆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 속에는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지만, 지금 천후는 그것까지 전부 헤아려줄 수 없었다.
다만 ‘되찾았다’는 말에 분노할 뿐이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뻔하니까.
꺼져버릴 것만 같은 의식의 저편. 어둠을 넘어서면 거기서는 언뜻언뜻 과거의 잔영이 보인다.
태양 빛이 내리쬐는 하늘 위에서 두 개의 오오라가 선이 되어서 맞선다. 그때마다 울리는 충격파로 대기가, 하늘이 떨렸다.
다행히도 그 싸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췄다. 승자가 정해진 것이다.
하늘에서 백열하는 빛줄기 하나가 마치 운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타오르며 땅으로 낙하한다. 그 낙하의 결과물도 비슷했다.
땅에는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겼고, 거기에 박혀있던 천후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하지만…기억나지 않아. 그 뒤로 난 희주 씨를 본 적이 없어.”
그날. 그 장소에서 보았던 여자아이는 분명히 홍희주였다. 그 뒤로 몇 년이나 지났지만, 천후는 알 수 있었다.
그날 그녀와 접촉하여 빛의 화신이 되어버린 그는 결국 최완에게 제압당했다. 거기까진…뭐 좋다. 그대로 광인이 되어서 계속 날뛰었다면 그 역시 이후 괴로워 했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때 일어난 일은 대체 뭐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대체…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응? 아저씨?”
덜컥.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천후는 그 와중에도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고 짜내어 한 손을 들어서 그의 멱살을 잡아채 그를 얼굴 앞까지 잡아끌었다.
“기분이 좋아? 속이 시원해? 아저씨가…나에게 진실을 숨기고 있었던 결과가 그래서 고작 이거야?!”
“…….”
눈동자 옆에 있을 흰자 부분이 모두 시뻘겋게 변한 천후의 눈에서는 어느덧 피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희주는 내 곁을 떠나고, 나는 반병신 꼴이 돼서 이렇게 된 걸 보는 게 당신이 바랐던 결과냐고! 컥…커흑…!”
“천후야…!”
소리를 지르던 천후는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삐. 삐삐삐삐. 그냥 들어도 위험을 알리는 게 분명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함께 들어와 있던 여자들은 비명을 질렀고, 의사와 간호사는 급히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보며 최완은 처연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게 아니다…. 그런 게….”
이런 걸…. 이런 상황을 바랐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사건은 터졌다. 결과는 이렇게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최완은 두꺼운 손을 들어서 멱살을 잡고 있는 천후의 손을 움켜쥐며 말했다.
“일단은…지금은 자라. 넌 지금…일어나 있어도 되는 상황이 아니야. 다시 일어나면…말해줄 수 있을 거다. 아마도…거의 대부분을.”
그렇게 말하는 최완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약해져 있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하얀 천장이었다. 천후에겐 익숙한 광경이었다. 병원 천장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그렇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이렇게 눈을 떴을 때, 항상 그의 곁을 지키던 사람이 이제는 곁에 없다는 것.
의식을 잃고 막 되찾은 와중에도 천후는 곧장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원래 그녀가 있던 자리는 이제 이강호가 대신 앉아 있었다.
“천후야! 일어난 거냐?”
“네….”
짧은 대답에 긴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셀레나, 아이들, 그리고 미국에서 날아온 친란까지 의식을 회복한 그를 보면서 안도했다.
이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일부러…아주 힘들게 웃음을 보여서 그들은 안심시킨 천후가 물었다.
“그 뒤로 얼마나 지났지?”
천후는 일주일이 지났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뒤 천후가 곧장 찾은 것은 다름 아닌 최완이었다. 그 역시 유그드라실이 아니라 지상에 내려와 있었는데, 천후가 회복되었다는 소리에 함께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잠시 물린 천후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선 그에게 말했다.
“그럼…말씀해보시죠.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두 말씀하겠다고 했죠?”
“…그래.”
최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의 눈은 퀭하니 안으로 깊게 파여있었다. 아무래도 천후가 쓰러져있는 동안 그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전부터도…….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 일단 이것부터 할까. 네 수술 경과는 들었겠지?”
“네….”
수술 경과. 그 이야기가 나오자 천후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서 자신의 가슴 깨를 만져보았다. 희주에게 관통당했던 자리.
심장이 있던 자리.
“자연적으로 다시 생겨났다고 하더군요…. 심장이….”
이번 희주에게 당한 상처는 결코 심상치 않았다. 심장을 관통당했다면…사람은 당연히 그 순간 절명해야 옳다.
게다가 이번엔 그가 즉사의 위기에 빠졌을 때 늘 나타나던 검은 세자매도 나타나지 않았고, 심지어 이미연의 마법조차 통하지 않았다.
천후는 이전 이런 일을 한 번 겪은 적이 있었다. 이강호에게 칼을 맞았을 때와 증상이 비슷했다. 그리고 그때는 유그드라실 측에서 사후조치를 해서 몰랐지만…이제는 당시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재생력.
디제스터나 가지고 있을만한 자기 수복능력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깨달았다.
“저는 정말…인간이 아니군요.”
최완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자신이 보통 사람들보다 특별한 존재라는 것 정도는. 하지만 이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천후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후우…. 좋아요. 그런데 지금 제 몸 상태와 지금 유그드라실의 행태가 관련이 있는 겁니까?”
“크게 있지. 유그드라실은 그 문제로 지난 10년간 줄곧 고민해오고 있었다. 너를 죽여야 할지, 살려둬야 할지를 가지고.”
“하.”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하지만 최완의 태도는 더없이 진지했다.
“끝까지 들어라. 10년 전. 우리는 대참사가 일어났던 땅에서 한 소년을 회수해왔다. 그러나 그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대표적인 문제로는 힘의 폭주 문제였다. 이 부분을 손본 것이….”
“메이거스….”
이름을 거론하는 것만으로 간신히 맑아진 정신이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전만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말할 수 있었다. 최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랑크 메이거스…. 지난 10년 간 사람처럼 살 수 있었던 건 그의 봉인이 있었던 덕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또 하나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메이거스는 이쪽 역시 대비해두었지만, 그의 수단은 너무 불안하고,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한 것이었지.”
“대체 그 문제가 뭐란 말입니까?”
천후를 마주 보던 최완은 잠시 말을 망설였다. 천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여기까지 와서 숨길 생각은 하지 마시죠. 지금…제 마음을 짐작하신다면.”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렇다면 마음을 단단히 하고 들어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최완은 또 하나의 문제점.
“그건 바로 네가 악시스 문디와 생명연결이 되어있다는 점 때문이다. 네가 살아있는 이상, 악시스 문디는 확장을 멈추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들이 끌어안아 온 최악의 딜레마를 입에 담았다.
*
“뭐…라고요?”
“말한 대로다. 네가 대참사에서 홀로 살아남은 건 네가 마법사였기 때문이 아니야. 거기서 죽어간 사람의 수만 1,200만 명이다. 적게 잡아도 마법사가 천명은 넘게 있는 곳이었지만, 거기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 너 혼자뿐이지.”
“…….”
“그 이유가 바로 저거다. 가이아가 낳은 문명 파멸의 나무, 악시스 문디는 처음 자라날 때 너와 생명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연결되어있다. 이건 이미 너를 구해냈던 첫날부터 메이거스가 밝혀낸 문제였다.”
“그런!”
“들어라. 그렇지만 그 뒤로 악시스 문디는 그 크기만 점점 커지고 있었을 뿐, 그 문명 파멸의 힘을 확장하진 않고 있었다. 그러나 메이거스가 예견했듯, 가이아가 나타난 이후 악시스 문디의 영향력이 넓어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수백 년 내에 인류와 인류 문명은 멸절하겠지. 지구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악시스 문디 자체를 꺾을 순 없다. 저것은 그냥 보기에는 그저 나무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걸쳐있는, 말 그대로 신이 만들어낸 절대 생물이다. 저것을 직접 공격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뭄바이 한가운데에 악시스 문디가 나타났을 때, 이미 묘묙일 적부터 인도 정부에선 핵을 제외한 모든 병기를 쏘아봤지만,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다만 유일하게 저것의 행동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생명력이 연결된 자, 바로 너를 죽이는 거다. 네가 사망하면 악시스 문디도 활동을 멈춘다. 다만 자연사할 경우엔 연결이 다른 자에게 넘어가고, 무조건 인위적으로 살해해야 한다.”
“…….”
“유그드라실은 지난 10년간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해왔지. 지금까진 의견이 분분했어. 악시스 문디도 더 활동을 하지 않았으니까 더더욱. 그렇기에 유그드라실에선 지난 10년간은 언제나 네 생존 여부를 두고서 치르는 다수결에서 네 생존에 손을 들어줘 왔지.”
세상을 멸망시킬 인자를 품고 있다지만 그래도 보통 소년인 그를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이것을 가지고 그들은 10년이나 고민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 이것만으로도 이미 의견이 크게 기울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그가 너를 죽이는 쪽에 손을 들었다. 그게 결정적이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인규…말입니까?”
“그래.”
천후는 고개를 떨궜다. 그는 지난 10년간 자신이 가장 믿어왔던 사람 중 하나였다. 단순히 정신과 의사일 뿐만이 아니라, 의지할만한 든든한 형이자, 희주를 자신에게 보내줬던 사람….
“이상해요. 대체 왜 이제 와서 저를 죽일 생각이 든 거죠?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얼마 전 이그네스 사태 때 리미터 문제를 해결해주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최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갑작스러운 게 아니야. 이런 투표 국면에서 그는 언제나 너를 죽이자는 쪽에 속했었다. 다만…그에겐 미학이 있지. 이렇게 이뤄진 다수결에서 패배하면 거기에선 깨끗하게 승복해서 그 누구보다도 너를 잘 돌봐왔던 거다.”
“허…허허….”
그 말에 천후는 지금껏 자신이 있던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맛봤다.
마음 어딘가에서…그의 호의는 고마우면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관계라고, 혼자서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가진 호의와 천후가 생각하던 호의의 차이는…무서울 정도로 달랐다.
“그렇게 발생하는 갭은 옆에서 지켜보던 나나 미연이도 놀랄 정도였다. 너도 알다시피, 사실 네 생활 개선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건 그였으니까.”
“네…….”
지속적으로 의견을 제시한 것은 이미연이었지만, 확실한 결과를 낸 것은 인규 쪽이었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더욱 고마움을 느끼곤 했는데…….
“돌아와서…. 결국 그의 주도하에 이번에는 너를 죽이겠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박빙이었지만, 결국 패했지. 그 순간 유그드라실은 분열했고, 반대파는 감금되어 있다가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그가 여기에 있단 것만으로도 최완이 반대파였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천후의 안색이 아주 약간 밝아졌지만…곧 심각하게 변했다.
“잠깐.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를 죽이는 것만으로 악시스 문디를 끝장낼 수 있다면…평소 보였던 유그드라실의 태도를 생각하면 압도적으로 이겨도 이상하지 않아요. 아저씨와 미연 누나는 그렇다 치고, 왜 다른 이들까지 저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단 말입니까?”
사람을 죽고 살리는 일이지만, 거기에 인류 멸망이 엮이면…그게 정식 법정도 아니고 인민재판이라면 당연히 죽이겠단 쪽으로 의견이 기울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 대립각이 세워진다고?
그건 이상했다. 그 의문에 최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말이 맞다. 우리라고 무조건적인 선의로 너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지.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이유?”
“간단하다. 널 죽일 방법이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