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그날 너를 제압한 이후. 희주 씨는 고인규가 스스로 맡겠다고 자청했었다. 당시의 그녀는 지금 네 보호시설에 있는 아이들과 비슷한 상태였어. 그 역시 너 관련으론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던 자였다. 그가 따로 그녀를 조사하겠다는 말에 나는 별 의문을 품지 않았지. 사실 그럴만한 심적 여유도 없었다.”
“…….”
가슴이 허했다. 마치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 그것을 간신히 끌어안으며 천후는 최완의 말에 의식을 집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설 자체가 그와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그의 시설이었겠지. 그가 신인을 만들어내기 위한.”
천후는 그날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를 떠올렸다. 그곳은 말하자면 묘지였다. 실패작들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묻어두기 위한. 시체 상태를 굳이 유지한 것은 거기에서 뭔가를 건져내기 위해서일 뿐, 인명에 대한 경외 같은 것은 일절 찾아볼 수 있는 무미건조한 공간.
본래는 거의 들르지 않는, 버려진 공간이었을 터였다. 그런데 거기서 희주를 데려갔다는 건…. 그만큼 그녀가 ‘특별’했다는 증거이리라.
“그 뒤로 난 그녀에 대해서는 점점 잊어갔다. 중요하다는 인식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얼마 전. 그가 평소보다도 훨씬 강한 어조로 말했지. 너를 죽일 완전한 수단이 있다고. 그리고….”
“사건이 터졌다…….”
“그래.”
천후는 천천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소리를 지를 기력조차 없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끊임없이 침잠하는 자신을 마주할 뿐이었다.
“대체…그자는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정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천후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가장 강경하게 그를 죽이자고 주장하는 자신을 따르는 천후를 보면서.
그가 지상으로 내려갈 때 집을 내주면서.
그리고 희주를 보내주면서…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게 아닌가? 처음부터…희주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천후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모두 아는 상태로 그에게 손을 내뻗은 것이다. 대단한 선심 쓰듯이.
거기에 의존하고, 기뻐하는 천후를 보면서 그는 과연 기뻐했을까? 비웃었을까?
텅 비어 버린 가슴으로는 떠올릴 수 없었다. 다만 그러면서도…더 깊은 곳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의 정체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천후는 다른 것을 입에 담았다.
“희주 씨는….”
“응?”
“희주 씨는 원해서 이랬던 걸까요?”
그것은…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는 희주에게 심장을 꿰뚫렸다. 그가 이런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렇게 일어나있는 게 아니라 진작에 장례를 치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천후는 그녀에게 분노해야 옳았다. 아니, 지금까지 모든 진실을 알고 숨겨왔으니 증오해도 좋으리라.
그럴 터인데도….
그의 얼굴은 최완에게 지금까지 그 어떤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크게 일그러져있었다. 절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모든 걸 알고….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요? 고인규가 날 죽이라는 말을 할 때까지만 기다리고 있다가 오직 그것만을 위해 내 곁에 있었던 걸까?”
“…….”
“그건…그건 아니지 않을까?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천후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만약 그렇다면…난….”
그렇게 소리친 천후는 그 뒤로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마치 생명이 다한 것처럼 호흡의 기척조차 끊긴 채. 그렇게 늘어져 버렸다. 차마 바라보기 힘든 모습에 최완은 한숨을 쉬었다.
이 와중에도 그는 그녀를 믿고 싶어 했다.
어디까지나 고인규의 지시를 어길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바래서 이런 일을 저지른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그렇다면 어떻게든 그녀를 구해내면 된다고. 그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될 거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사상누각. 확신 없는 헛된 믿음만이 유일하게 지금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최완은 고민했다. 여기서 어떤 말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의 행동은 크게 달라지리라. 그는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어쩌면 최초이자.
최후일 수도 있는….
아버지로서의 조언을 했다.
“네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저씨….”
“맞을지도 모르지. 희주는 여전히 널 사랑하고 있고, 지금쯤 널 찌른 충격으로 너처럼 반 폐인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혹은…이지를 완전히 제압당해서 그럴 겨를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 말에 천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최완은 어느새 그의 앞에 바싹 다가와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하지만…어쩐단 말이냐? 만약 그렇다고 친다면 그렇게 사랑하는 너를 찌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에게 통제당하고 있는 거다. 그걸 뒤집을 수 있겠냐?”
“…….”
“그리고 만에 하나…. 이게 모두 착각이고. 모두 희주 씨가 자의로 한 행동일지도 몰라. 그건 그때 가서 직접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네가 구해냈다고 생각한 그 여자에게 자의였단 이야기를 듣고서. 넌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있냐?”
심장이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더 살고 싶단 생각이…과연 들까?
오늘 들은 소리는 아주 끝내주지 않는가?
이 지구의 화신이 작정하고서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악시스 문디다. 그런데 그만 죽어버리면 그게 멈춘다고 한다.
이 얼마나 직관적인 구조인가? 여기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조차 내가 죽길 바란다고 한다면…대체 세상 살아서 뭐 어쩌자고?
아무도 그가 살아가길 원하지 않는데, 뭐하려고 세상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과연 그게 가치가 있는 일인가?
그것은 이미 판단의 영역이 아니었다. 암담함이었다. 눈앞에 암흑밖에 펼쳐지지 않은. 개인이 맞이할 수 있는 최고의 지옥.
그것을 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유그드라실의 다른 이들이 너를 죽이길 반대한 이유는.”
그것은.
“너를 죽이지 않아도 악시스 문디를 멈출 수 있다는 확률이 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
“그런 방법이…있다고?”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까지 빛 하나 없는 터널 안에 발을 들인 느낌이었다. 그런데 앞쪽에 빛이 비춰진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그 빛을 손에 쥔 자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확률이다. 방법이라고 부를 것까진 못 돼. 그렇지만 다른 한쪽은 그 확률조차 낮지.”
“무슨….”
“고인규가 신인을 만들어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확실하게 통할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물론 지금 네 상태를 보면 가능했을 것 같아 보이지만…결국 그녀는 너를 더 공격하지 못했어.”
“…….”
“지금 네가 재생력을 발휘하는 이 상황조차 결코 안전하지 않다. 너를 정말 끝장내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여지를 줘서는 안 되지. 하지만 그 아이는 손을 멈췄다. 안정성이란 그런 감정적인 부분까지 합쳐서 생각할 수밖에 없지. 그런 관점에서 보면…그녀는 병기로서는 불완전하다.”
그녀는 분명히 영천후, 악시스 문디의 생명력 연결을 끊어버릴 열쇠 중 하나. 확실한 병기이지만…그것을 휘두르는 그녀의 의지는 불확실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희주 씨가 자의로 너를 공격한 게 아닐 거란 근거가 되기도 하지.”
“아….”
당시 상황을 떠올려보면 그녀는 맨손으로 사람의 피부와 갈비뼈를 앞뒤로 죄다 관통해서 심장을 뽑아버렸을 정도였다. 그건 조금만 더 손속을 잔인하게 썼다면 그의 몸을 아예 반 동강 낼 수 있었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힘을 쓰는 것을 자제했다는 것 자체가 희미한 희망을 던져줬다. 아주 일말의 희망이지만…….
그나마 천후의 눈에 빛을 돌려놨다.
“…너를 살린 채로 진행하는 방법은 어차피 지금 논해봐야 무의미한 거다. 고인규가 남기고 간 말은 전해줬지? 너는 어차피 그곳으로 가겠지.”
“당연합니다.”
돌려받아야 한다. 그녀를. 그렇다면 어떤 위협을 감수해서라도 갈 수밖에 없다.
“그래. 어차피 네가 그곳으로 가서 죽어버리면 모든 게 끝이다. 논해봐야 의미가 없지. 그러니. 이 이야기는 네가 돌아오면 계속하는 걸로 하자.”
“아저씨….”
그제야 천후는 그의 마음을 짐작했다. 희주를 만나보기도 전에 자살이라도 할 것 같은 그를 최완은 지금 언변만으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고마움이 사무친다. 올려보면 그의 얼굴엔 10년 전 처음 그를 보았을 때와는 달리 세월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중년이었던 남자가 장년으로 접어드는 표시가 그의 몸 곳곳에서 보였다.
그동안 그를 얼마나 마음고생을 시켰는지 생각하면 죄송스러울 뿐이었다.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사정이 이런…이런 이야기일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다 천후는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 물었다.
“아저씨. 괜찮은 겁니까? 금제가 걸려있다고 했잖아요?”
그 물음에 최완은 허허하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의 머리를 한 대 가볍게 쳤다. 아주 가볍게.
“빨리도 물어보는구나, 이놈아. 상관없다. 가이아가 나타난 이상 너에게 말 못할 금제는 이제 거의 없지. 아니, 이그네스 엠프레스 사태 때 이후 네가 부분 신위에 각성한 이후부터 이미…. 생각해보면 진작에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희주에 대한 부분까진 어쩔 수 없었겠지만, 적어도 고인규에 대해서 경계심은 가지게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최완은 그 부분이 아쉬웠다.
최완은 그의 머리에 올리고 있던 손을 내려서 천후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어릴 적.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았던 머리와 고사리 같던 손은 이제 완전히 자라서 어디가 됐던 자신보다 크다.
부쩍 큰 그를 보면 감회가 새롭다.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최완은 그렇게 손을 쥐고서 말했다.
“이번 일로 너를 묶어둘 수는 없겠지.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은…미안하다. 그렇지만 약속해다오. 어떻게 해서든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그러면 그때부터 다음 이야기를 나눠보자꾸나. 그럴 수 있겠지?”
천후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실의에 빠져있던 그의 얼굴에 아주 작은…흐릿하다고 할만한 웃음이 돌아왔다.
최완 자신은 모르리라.
아니…. 알더라도 확신할 수 없겠지. 하지만 천후가 보기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지금 그런 그의 모습을 본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네. 약속할게요. 아버지.”
당신이 느끼고 있는 그 감정이야말로. 부정이라고.
자식은 아비 앞에서 약속했다.
*
강원도 산간.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나가는 것만 해도 차를 타고 20분은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이곳에는 신기하게도 하나의 별장이 지어져 있었다.
평소에는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외관은 늘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어서 드물게나마 이곳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청소업체가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부자의 별장인가보다 생각하곤 했다.
그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곳은 분명 부자의 별장이었지만, 건물을 유지 보수하는 건 청소업체가 아니라…그 별장 안에 늘 살고 있는 여성들. 하녀들이었다.
분명 이 별장에서 사람이 나오는 걸 본 이들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들은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하나같이 하얀 낯빛에 조용한 그녀들은 분명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의사소통은 전혀 나누고 있지 않았다. 마치 그런 건 필요가 없다는 듯이. 덕분에 그들은 살아 움직이고 있음에도 별장 안은 유령 저택 같은 고요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별장 1층 안쪽 방. 별장의 ‘주인’이 머무는 방안에서는 들려왔다.
사람의 목소리가.
“왜 마무리를 짓지 않았죠?”
나긋나긋한 남자의 목소리. 백색 가운의 남자였다. 책상 앞 의자에 앉은 그는 다리를 꼰 채로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여자가 있었다. 별장에 있는 다른 하녀들처럼 하얀 카츄사에 검은 하녀복을 입고 있는….
“…….”
홍희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