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약속>
의자에 앉은 그녀는 물음에도 답이 없었다.
새하얀, 창백하다고 말할만한 인상의 그녀는 말없이 그저 바르게 앉아있을 뿐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마네킹과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런 모습으로.
어두운 방 안. 떠도는 먼지들이 그녀의 코 근처에서 움직이는 것이 희미하게 보이지 않았다면 그녀가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 방법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고인규는 웃었다.
“여전하군요. 당신의 그런 모습은.”
천후나 그의 가족들이었다면 희주의 이런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그녀는 분명 말수가 적긴 했지만, 그래도 꾸준히 이런저런 행동을 보이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이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인간에서 인형으로 돌아가 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고인규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반대로 그는 그동안 종종 만났을 때 보았던 희주의 모습이 생소했다. 그에게 홍희주란 존재는 지금처럼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모습이 가장 익숙했다.
“이렇게만 있으면 당신과 다른 자들은 구별 가지 않는데…참 신기하죠.”
자리에서 일어난 고인규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로 가져갔다. 그러자….
탁. 그녀의 행동이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의 손은 옆으로 튕겨나가 있었다. 그녀가 쳐낸 것이다. 얼얼한 그 손을 주무른 인규는 인상을 썼다.
원리적으로만 생각해보자면…그녀는 이 저택 안에서 일하는 다른 하녀들과 차이가 없었다. 어차피 그가 ‘만들어낸’ 생명. 그에게 모든 통제권이 있는 '인간과 닮은 인형'이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 달랐다.
그가 부여한 지식 외의 것을 가지고 있었다. 기적이 빗어낸 인형. 최고의 마법 부여사인 그조차도 다시는 만들어내지 못한 우연의 산물. 그 때문일까? 그녀는 ‘제작자’인 그의 말조차도 거부할 때가 있었다.
그저 이렇게 시체처럼 앉아, 그녀 스스로 정한 때를 기다릴 뿐….
‘그게 1년 전이었죠.’
그가 지상으로 내려왔던 때. 그에게 보내주겠다고 말하자 그녀에게 생기란 것이 부여되었다. 그걸 보고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마치 세상에 날 때부터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다는 듯. 그녀는 그에게 이끌렸다.
그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녀를 처음 데리고 왔을 때부터 그녀는 그만을 찾았으니까.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제작 당시에 새겨놓은 유일한 '임무'를 실행하게 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것은 정상적으로 작용했다.
남자가 인형에게 말한다.
“당신이 어떤 태도를 보여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때는 왔고…저는 당신을 쓰려고 했던 용도로 쓰면 될 뿐. 어차피 그는 당신을 찾으려고 이곳으로 오겠죠. 그동안 여기에서 얌전히 계세요.”
“…….”
희주의 미간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제야 인간이라 생각할만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지어졌다. 그것은 당장에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은 얼굴.
“응원해준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음?”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낸 말이었다. 고인규는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생각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그것은 말하자면 말버릇이었다.
그녀의 사랑을 응원한다는 말버릇.
“하하.”
이제 와서 꺼낸 이야기가 이런 말이라니 우습기 그지없다. 하지만 답을 주기엔 좋은 질문이었다. 고인규는 안경을 중지로 추어올리며 말했다.
“응원했지 않습니까? 1년 동안이나.”
“…….”
“그 정도면 충분히 길지 않았나요? 그 사이에 결혼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어리석군요.”
희주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고개가…덜컥하고 실 끊어진 인형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이걸로 이 여자는 완벽하게 의사소통을 포기했다. 그 모습을 보며 고인규는 훗하고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은 년이다. 그녀가 가진 마지막 방어기제만 제외하면…결국 그녀는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녀를 만들어낸 목적을 때가 올 때까지 기억에서 지워놓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는 그 불안감을 못 이겨 지금까지 그의 애정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니. 이 어찌 어리석음의 극치라 부르지 않을쏜가?
“후후…. 본의는 아닙니다만, 그녀가 나타났으니 어쩔 수가 없죠. 어차피 당신은 나의 창조물. 당신에게 심어둔 의무는 벗어날 수 없지요. 곧 그가 올 겁니다. 그동안…. 지금까지 있었던 즐거운 기억이라도 곱씹고 있도록 하세요.”
스윽. 그 말을 남긴 고인규는 그녀를 스쳐지나 방 밖으로 나섰다. 이제 이 안방은 그녀, 홍희주 혼자만이 남았다.
“…….”
지켜보는 자도 없다. 도망치려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 환경. 그렇지만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다른 이가 자신을 탐하려 드는 것은 저항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뿐.
그의 말대로 그녀는 그의 창조물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기적이 엮여 들어 아주 약간의 자유가 부여되었다고 한들. 그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녀 자신의 힘으로는…….
고개를 떨군 하얀 인형은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손으로…그를 찔렀다. 아마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똑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리라.
그것은, 그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주인님…….”
툭. 투둑. 손바닥 위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럴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그녀가 인형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처럼.
“하하. 멍청한 것.”
복도로 나온 고인규는 양옆에 따라붙는 하녀들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그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는 눈에 선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제작품’이 그런 모습을 내비치는 것은 한편으론 경이로웠지만, 인간의 정신을 꿰고 있는 그에게 있어선 결국 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희극 그 자체로 여겨졌다.
불가능한 확률을 넘어서 기껏 나온 신인이 결국 인간의 범주를 넘지 못하다니.
“아무리 울어봐야 바뀌는 것은 없지.”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저택의 지하였다. 수많은 병들이 전시되어있는 기묘한 방. 그 병 안에는 검은 기운이 병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듯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럼 나도 준비를 해볼까?”
*
천후가 희주에게 입은 상처를 회복하는 데는 며칠이나 더 걸렸다. 그동안 전 세계의 동향 역시 크게 꿈틀거렸다.
유그드라실에서 내분이 있었던 후, 영천후 살해파 쪽은 국가 정상들에게 접근하여 그가 악시스 문디와 생명연결이 되어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렸다.
유그드라실 본체를 그들이 장악해버린 이상 이것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반대파는 어떻게든 감금상태에선 벗어났지만, 유그드라실을 탈환하진 못했기에 모든 행동의 우선권은 그들에게 있었다.
이후, 최완은 천후에게 이런 말을 전해왔다.
“각국 정상 사이에서 화상 회의가 있었다는 모양이다. 이 사건에는 함부로 관여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전통대로’ 마법사의 문제는 마법사들끼리 해결해달라고 하더군.”
그것은 곧 영천후의 생살여탈권을 그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겠다는 소리였다. 그렇지만 천후는 정상들을 함부로 비난할 수 없었다.
그 하나만 죽으면 전 인류가 무사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듣고서 60억 인구가 모두 감수해줄 거란 생각을 한단 건…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아마 지금 영천후가 보통 사람이었으면 아마 미국이나 한국 정부 측에서 알아서 암살자를 보내서 벌써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사이에 그를 죽일 수 있다는 확실한 수단이 있다고 꾀어냈다고 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혹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쩔 수 없죠. 그럼 그 절 죽이겠다는 놈들에게선 아무런 말도 없었습니까?”
그 말에 최완은 대화내용을 메모해둔 종이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네가 회복할 시간을 더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더군.”
거기엔 영천후가 움직여야 할 시일이 적혀있었다.
사흘 후까지.
겨우 다섯 글자였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컸다. 이 시일에 맞추지 못한다면 분명.
“난리가 나겠군요.”
최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의 태도는 강경해. 아마 네가 움직이지 않으면 놈들은 엘모세와트 정도는 우스울 정도로 세상을 뒤엎고 다닐 거다. 유그드라실이 있는 이상 불가능할 것도 없지. 게다가….”
“희주 씨도…위험하겠죠.”
천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희주는 그들이 천후에게 쓸 수 있는 무기이기도 했지만, 유효한 협박 수단이기도 했다. 그녀가 정말로 이지를 제압당했다면 목숨만 붙여놓고서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이 시간은 그 유예인 것이다.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생각이냐?”
“가야죠.”
“거기까진 알고 있다. 하지만….”
최완이 하고자 하는 말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후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 가야 해요. 저도 마음 같아선 아저씨와 강호 선배까지 전부 함께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래선 희주 씨를 만나지도 못할 거에요. 아마 계속 위치를 옮기겠죠. 그리고 그때마다…참상이 반복될 겁니다.”
이미 극단적인 행동을 시작한 이들이 어떻게 폭주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마법사들이 그 힘을 제멋대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것만으로도 참상이 커진다.
당장도 큐브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디제스터를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었다. 이 상황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마법사 전체에게도, 천후에게도 좋을 것은 없었다.
상처는 거의 다 나아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새로이 생겨난 심장은 이전과 똑같은 성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과거 이강호에게 당했을 때도 이것보단 더 오래 고생했던 것 같은데, 재생력 역시 강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를 보호할 최후의 방어기제를 악시스 문디가 보강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이 몇 번 더 어그러진다면? 그때는 그들이 우려했던 사태를 맞이할 수 있으리라.
“정말 최악이네요. 내 몸 다치는 것 가지고 이런 상황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를 때가 속 편했는데.”
씁쓸하게 웃은 천후는 고인규가 말해주고 간 장소로 찾아갈 준비를 했다. 짐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몸뚱어리 하나 가면 될 문제다. 유그드라실은 쓸 수 없어도 국내의 텔레포테이션 시스템은 아직 건재했다.
그의 준비란 마지막으로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이브와 에바 두 아이들을 제외하곤 이 일을 완전히 공유했다. 그 소리를 들은 모두는 놀랐지만, 차마 그를 막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것 역시 운명일지도 모르겠구나…. 함께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강호는 그렇게 말하며 아쉬워했다. 그의 진리구현자 특성은 랭크가 오르면서 함께 강해져서 이제는 신역에 달한 힘조차 어느 정도 억누를 수 있었다. 천후는 지금의 그녀라면 혹여나 자신이 죽더라도 이그네스가 폭주하는 걸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죽는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라!”
버럭하고 소리를 지른 이그네스는 그러다, 그의 허리춤을 부여잡고는 작게 속삭였다.
“돌아온다는 말을 하란 말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남겨두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아이들이 슬퍼하지 않느냐?”
고개 숙인 그녀의 몸이 떨렸다. 천후는 그런 그녀를 번쩍 들어서 와락 끌어안아 주었다. 그런 그녀를 함께 위로해주던 친란이 말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생각도 못 했네. 하지만…이게 운명이라 해도 나는 자네가 극복할 수 있을 거라 믿네.”
“맞습니다. 마스터는 영웅입니다. 영웅은 시련을 극복하는 법입니다! 운명 따위 깨부수세요!”
그녀의 말에 맞장구친 라즈베리는 두 주먹을 꽉 쥐고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셀레나는 마지막으로 다가와 그의 한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영천후. 하나만 약속해.”
“어떤 걸?”
“너는 이전부터 이럴 때 꼬박꼬박 살아왔으니까, 이번에도 괜찮겠지? 불사신이라며. 그러니까 나는 그건 걱정 안 해.”
그 말에 모두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셀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나랑 할 약속은 이거야. 네가 살아오는 건 기본이고. 가서. 반드시 희주를 데려와. 반드시!”
그 말에 답은 필요 없었다. 대신 그는 그대로 그녀와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날.
천후는 홀로 사지로 떠났다.
등 뒤에 남은 자들은 그제야 눈물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