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영원연정의 피앙세>
고인규가 그를 불러낸 곳은 그와 홍희주가 처음 만난 곳. 강원도에 있던 그 숨겨진 시설이 있던 위치였다. 유그드라실 측에서는 그 혼자서 찾아올 것을 요구했다.
“기억을 되찾지 않았으면 아예 찾아가지도 못할 뻔했군….”
몇 겹으로 봉인처리가 되어있던 그의 과거 기억은 굉장히 부실했다. 여전히 드문드문 결손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희주 관련의 기억을 되찾은 것은 오히려 기적이었다.
아마 그 기억을 찾지 못했으면 최완 역시 모든 것을 말해주는 걸 주저하고 위치를 알려주지도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찾아가는 방법은 간단했다. 대한민국 내의 텔레포트 시스템은 건재하다. 그를 강원도로 날려주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에게 인사를 마친 천후는 그렇게 강원도 산간에 나타났다.
“여긴….”
그렇게 찾아온 장소는…꽤 이미지가 변해있었다.
겉으로는 화공 약품 창고로 위장되어있던 이곳은 이제 모든 시설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나무들이 자라있었고 그 안쪽에는 저택이 보였다.
2층 구조의 단독주택이었다. 집 밖으로는 적당히 넓은 마당이 있는 집. 하지만 천후에겐 유독 그 모양새가 익숙했다. 당연했다.
지난 1년간 지내왔던 집이었으니까.
“…….”
이그네스가 각성해서 불타버리기 직전까지 살았던 그 집과 똑 닮은 저택이었다. 고인규가 넘겨주었던 집. 그것을 깨달은 천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누굴 만나러 왔는지 확고해지는 순간이었다.
“후우.”
마음이 복잡한 건 그를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흑막이란 걸 알았다 하더라도…. 그는 지난 10년간 그에게 성심성의껏 형 역할을 해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형태로 그와 대적하게 되다니.
그렇게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군요.”
목소리는 저택 위의 허공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또렷하게 귓가로 파고들어 온다. 천후는 눈을 부릅뜨고서 그쪽을 노려보았다.
거기에는 백색 가운을 걸친 남자, 고인규가 나타나 있었다.
“고인규!”
“하하. 이제는 형이라고 부르는 건 그만뒀나요?”
“……!”
맑은 웃음소리에 천후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 모습을 본 고인규는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띠며 말했다.
“뭐어. 저도 별로 바라진 않았습니다. 타인이 지정해준 인간관계라니. 귀찮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꽤 재미있는 사람이었어요. 연구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생각해보자면.”
그것은 지금까지 그를 대해온 모든 태도가 그저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는 확고한 선언과도 같았다. 마음속으로 가지고 있었던 아주 희미한 믿음조차 날려버린 천후의 목에선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희주 씨는 어디 있어?”
“하하. 급하기는. 하긴. 지금 당신에게 보이는 건 그것뿐이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무사히 저택 안에 있으니까….”
“그거라고 하지 마!”
철저하게 인간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명칭에 천후는 분노했다. 그렇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당신에겐 어떨지 몰라도, 저에게 그건 그냥 도굽니다. 그것도 당신을 끝장내기 위한 도구죠. 잘도 그걸 아직도 인간 취급하고 있군요? 그런데 영천후. 지금은 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뭐라고?”
반문하기 무섭게 고인규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영천후의 주변에 수많은 약병들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그것이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선 당연하단 듯이 디제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말이나 나눌 시간을 끝났다는 겁니다.”
“크윽!”
파급에서부터 경급에 이르는 디제스터들이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가 동시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천후는 곧장 강화마법을 끌어올려서 그것들에게 대항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일방적인 양상이었다. 이미 부분 신위를 각성한 그에게 경급 디제스터는 이제 몇 초나 더 버티냐의 문제가 되어있었다. 수가 많다 한들….
등 뒤에서 촉수가 날아온다. 그것을 보지도 않고 피해낸 천후는 그대로 그것을 손으로 잡아서 디제스터를 몸째로 휘둘러 다른 놈들에게 던졌다. 투포환이 탄환이 놈은 다른 놈과 부딪히며 박살 나버렸다.
화염을, 냉기를, 전격을 쏘면 쏘는 대로 그대로 맞받아 상쇄해버리고는 다가가 손으로 두개골을 짓눌러버렸다. 그것만으로도 놈들의 머리통은 무슨 지점토처럼 우그러지며 박살 났다.
크기 차이는 수십 미터가 나더라도 그가 다루는 힘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귀신같은 움직임으로 괴물들을 역으로 쓰러뜨리는…말 그대로 괴물 학살자!
“꺼져라!!!!”
파직! 파지지직! 오른팔에 백열을 집중한 천후는 그대로 그것을 횡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에 한 번 백색 섬광이 일어나더니, 그 중심점부터 폭발이 일어나 경로에 있던 모든 괴물들을 쓸어버렸다.
“아아. 이런.”
그 경과를 지켜보고 있던 고인규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혀를 찼다.
“무슨 짓입니까? 기껏 모은 콜렉션이 엉망이 되는군.”
“콜렉션이라고?!”
“하하. 그래요. 콜렉션. 기껏 모은 거라고요. 서브 퀘스트급 디제스터를 직접 제압해서 마법적으로 배양한 거죠. 서브 퀘스트 시절에 그렇게 병에 봉인된 녀석들은 스스로는 뛰쳐나오지 못해요. 그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는 그래서 저에게도 미지수죠. 등급은 알 수 있지만. 그 즐거움으로 모으고 있는 거였는데 이렇게 금방 끝장내다니.”
머릿속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이걸 만든 제작자 역시도 이놈이었단 말인가? 엘모세와트 때 이것들 때문에 얼마나 큰 피해를 보았는지 떠올린 천후는 분노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당신을 끝장낼 방법론 중 하나였으니까요. 하지만 이 방법으론 멸급 디제스터를 만들어내는 것도 어렵더군요. 그거 가지곤 어림도 없어서 결국 취미 삼아서 모으고 있다가 써봤는데 이런 꼴이 되다니.”
“이 자식!”
어느새 고인규가 풀었던 모든 디제스터를 처리한 천후는 그대로 그에게 쏘아져 나갔다. 이대로 방심한 사이에 그를 끝장내고 희주를 돌려받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
처음으로 그의 공격이 막혔다.
그의 1m 남짓 되는 거리에서 내지르던 주먹이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더는 전진하지 못한 것이다.
“크으으윽!”
“흠. 이러면 안 되죠, 영천후. 아직 메인이벤트는 치르지도 않아놓고선 나부터 노리다니. 매너 없기는.”
“닥쳐!”
일갈한 천후는 다시금 부분 신위를 끌어올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방어벽을 후려쳤다.
카직.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기괴한 소리가 그것을 깨졌음을 알렸다. 천후는 그대로 다시금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어디 이건 어떨까?”
“?!”
그의 안면으로 주먹을 내지르던 천후는 그러다 흠칫하고 그것을 멈춰 세웠다. 어느새 그의 앞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던 것이다.
하녀복을 입은 여자였다. 눈에 생기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 홍희주는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었지만…그렇다고 그녀를 관통하고 그를 칠 수는 없었다. 그 잠깐의 망설임 동안.
“하하하. 여전히 어설프긴.”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난다 싶더니, 갑자기 그의 몸 앞에서 충격파가 터졌다.
“크악!”
그대로 영향권에 들어간 천후는 땅으로 내려꽂혔다. 고인규는 그 모습을 내려보면서 비릿하게 웃었다.
“멍청하군요. 그대로 내질렀으면 나에게 상처 하나쯤은 입혔을지도 모르는데…. 이깟 인형에 그렇게 동요하다니.”
빙글빙글 웃은 그는 뒷 목덜미를 들고 있던 그 여자의 목을 잡고 그대로 저택 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그녀는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저택 지붕에 부딪힌 그녀는 몇 번인가 몸을 움찔거리다가 그 움직임을 멈췄다.
“……!”
그걸 본 천후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사람을 저런 식으로 다루다니? 그런 그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고인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착각하지 말아요. 저건 사람이 아니니까. 저건 그냥…그녀를 흉내 내려다 실패한 인형이에요. 배양한 인간의 육신에 영혼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실패작. 말하자면 육체만 인간인 안드로이드예요. 뇌를 연산장치로 사용할 뿐, 입력한 명령 외엔 아무것도 못 하는 껍데기뿐인 것. 저런 걸 생명으로 생각하는 건 넌센스죠.”
그렇게 말하는 고인규의 표정은 정말이지 진지해서, 거짓이라곤 터럭도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을 죽였단 죄책감 따윈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그저 필요에 따라서 일회용 도구를 쓰고 버렸다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고인규가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당신. 엘모세와트의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다죠?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나 모르겠어요. 뭐 비마법사 아이들은 그렇다 치고…대비 없이 신역에 접한 이들은 이미 영적으로 망가져 있습니다. 그릇만 남은 거죠. 그 아이들에게 남아있는 영혼은 말하자면 잔류사념이나 마찬가지예요. 기적적으로 그중 한, 둘 정도야 돌아올지도 모르지만 나머지는 그냥 그렇게 평생을 살 겁니다. 그게 무슨 인력 낭비, 돈 낭비입니까?”
“닥쳐, 이 개자식아!”
저 자식이 나불대는 걸 더 들어줬다가는 미쳐버리기 딱 좋을 것 같았다. 놈은 천후가 지금껏 아껴왔던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있었다.
삶을 망가뜨린 것만으로도 불구대천의 원수라 불러도 될 놈이 저런 소리를 하니 정말이지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끓었다.
“방법을 찾을 거야. 네가 아무리 호언장담을 하더라도!”
“흐음.”
그 말에 고인규는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안경을 검지로 추어올린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하긴. 당신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악시스 문디와 생명 연결이 된 몸. 사실상 현인신이니 당신을 통해서 시간을 들여 연구를 하면 가이아의 힘, 그 근원에도 좀 더 다가가 그 아이들의 영적인 회복도 도모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류의 입장에서 보면 영천후라는 존재는 정말이지 최고의 연구소재라 할 수 있었다. 과학만으로는 이룰 수 없었던 초자연적인 힘의 근원적인 존재.
신과 맞닿아있는 원천 존재이니, 그의 협조만 얻어낼 수 있다면 엘모세와트가 그렇게 그리던 전 인류 마법사화도 꿈이 아니다. 다만….
“다만 그동안 인류는 점점 멸망에 가까워지겠죠? 당신이 살아있으면 말입니다. 당신을 아무리 연구해봐야 다른 악시스 문디를 멈출 방법 따윈 나오지 않을 테니까…. 이미 당신을 가지고 10년을 연구해온 우리는 확신했죠. 그러니까. 당신의 모든 생각은 그냥 망상입니다.”
그가 지키고 있는 엘모세와트의 아이들을 되돌리는 것도.
고인규가 만들어 낸 영혼 없는 하녀들에게 혼을 부여하는 것도.
그리고…. 홍희주를 구해내는 것조차.
“왜냐면, 오늘 당신은 여기에서 돌아가지 못할 테니까.”
그 말과 함께 고인규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겼다. 충격파 공격을 예상한 천후는 곧장 방어를 준비했지만, 이번의 행동은 다른 의미였다.
“자. 그럼 영천후. 조금 이르지만 오늘의 메인이벤트입니다.”
그 말에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곳엔…고인규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창백한 인상의 여자였다. 검은 먹물을 뿌려놓은 것처럼 아름답게 흘러내리는 흑발의 주인.
“희주 씨!”
방금 지붕으로 떨어진 다른 여자처럼 흰 카츄사에 하녀복을 입은 그녀는 천후의 부름에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금빛 안광이 흘러나오고 있는 눈을…….
“와라. 월하홍취.”
나지막한 고운 목소리가 울린 이후. 그녀의 손에 한 자루의 검이 나타났다.
월하홍취. 그녀가 늘 사용하던 마도병장. 그러나…이 뒤에 일어난 일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대로 검을 치켜든 그녀가 흘린 말 뒤에 일어난 일은.
“혈식마장血食魔裝.”
푸푹! 슈르르르륵! 월하홍취 끝머리에 달린 장식용 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갑자기 바늘처럼 꼿꼿이 서는가 싶더니 그녀의 팔에 있는 혈관을 찔러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월하홍취는 지금껏 보인 적 없는 핏빛으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죽이세요.”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은 고인규가 고하자.
“네. 마이스터.”
인형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