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307화 (307/324)

307화

“아….”

고인규의 명령에 따르는 희주의 모습을 보고 천후는 오한을 느꼈다. 어쩔 수가 없는 건가?

‘아니야!’

아직 확인했다고 할 수 없다. 최완의 말처럼 희주가 고인규의 손에 ‘특수하게’ 만들어진 존재라고 한다면, 그의 명령에 완벽하게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적인 관측에 불과했지만, 천후는 그 지푸라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희주 씨!”

“…….”

천후의 외침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그녀는 그대로 검을 그를 향해 뻗었다. 저 동작이 뭘 의미하는지 그녀와 여러 번 대련을 해왔던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흑표.”

예감과 동시에 공격이 온다. 차르르르륵! 검이 갑자기 늘어난다 싶더니, 검편이 되어서 날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다. 하지만 이 뒤는 예상을 벗어났다.

슈슈슈슉…! 늘어나던 검편이 갑자기 두 갈래로 갈라지더니, 그 색상이 검게 물들면서 검은 가죽 같은 재질로 변해갔다. 두께 역시 검날 두께 수준이 아니라 진짜 디제스터의 촉수처럼 두꺼워지는 게 아닌가?

“아니?”

마치 이 능력의 모태가 된 디제스터, 블랙 레오파드의 촉수 그 자체를 보는 듯했다. 물론…그 자체가 지금 여기에 직접 나타난다고 해도 천후의 적은 아니었다. 손날을 든 천후는 날아오는 그것들을 향해 정확하게 두 번 휘둘러서 맞받아쳤다.

스컥! 스컥! 손날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촉수가 끊어져 나갔다. 하지만 희주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 자리에서 검을 휘둘렀다.

“흑표. 공도.”

“!”

이번엔 촉수가 공간이동을 타고 날아온다. 후두부와 복부. 그래도 반응속도 면에서 비할 바가 아니다. 스텝을 밟아 그것을 피해낸 천후는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일부러 거리를 유지하려 들고 있었다. 접근전에서는 천후도 그녀를 함부로 공격은 못 한다지만 제압을 못 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먼 거리에선 방법이 없다. 말로 설득이 먹히지 않는다면 뭔가 다른 조치가 필요했다.

그렇게 생각한 천후는 채찍이 다시금 덮쳐오는 것을 팔로 쳐내 가면서 그녀에게 접근해갔다. 바로 그때였다.

전격처럼 빠르게 다가오는 그를 향해 그녀는 검을 다시 본래 모습으로 변화시키며 다시금 읊조렸다.

“혈식血食, 용기식龍氣息.”

순간 월하홍취의 검날이 짙은 핏빛을 띠기 시작했다. 불길함을 느낀 천후는 그 즉시 회피 동작을 취했다. 그 선택은 정답이었다.

즈…으으으으응…. 푸확!!!

검날에 응축되던 커다란 핏빛 기운이 그대로 쏘아져 온 것이다. 놀란 천후는 그것을 하늘로 날아오르며 피했다.

쿠화아악! 검에서 뿜어져 나온 그 기운은 그대로 하늘 위로 쏘아져 나가, 대기권을 뚫고 저 우주 밖까지 튀어 나가 버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천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드래곤 브레스?”

예상되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하지만 드래곤의 피는 월하홍취에 먹인 적이 없을 텐데? 아니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 위력은 뭐란 말인가?

과거 드래곤이 직접 나타나서 뿜어낸 것에 버금가는 위력이다. 위쪽으로 피했기에 그쪽으로 검날의 방향을 바꿔서 망정이지, 그대로 지면을 따라 날아갔다면….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린 천후는 덕분에 그녀가 다음 동작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공도. 혈식, 칠두룡화七頭龍火.”

“!”

그와 동시에 그의 주변 일곱 방위에서 공간 균열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화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오로치의…!’

다 놀라기도 전에 불길이 그를 덮쳤다. 단숨에 겁화를 뒤집어쓴 천후는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리 부분 신위를 이루었다지만, 그의 기본 상태는 A랭크 강화 상태. 이런 걸 정면으로 받았다만 몸이 남아나지 않는다.

“아―――”

단번에 그를 지키는 검은 세 자매가 나타나 그를 치료했다. 그나마 이 점은 다행이었다. 월하홍취의 힘을 빌려서 공격을 당할 때는 그래도 그녀들이 나타날 수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직접 찔린다면…아마 이야기가 달라지리라.

“큭….”

게다가 천후가 걱정하는 부분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부분뿐이 아니었다. 방금 드래곤 브레스와 오로치의 화염을 구현해낸 희주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월하홍취의 술에 혈관을 찔린 그녀의 입술의 평소의 분홍빛이 아니라 보라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창백한 안색은 이제 시체처럼 보일 정도였다.

‘생명력을 소모하면서 쓰고 있나?!’

그 모습을 본 천후는 치를 떨었다. 원래부터 월하홍취는 사용 횟수에 한계가 있는 마도 병장이었는데, 지금은 그걸 넘어서서 아예 사용자의 피를 빨아먹으며…그 생명을 소진해 기술을 쓰고 있는 것이다.

멸급 디제스터의 기술이다. 한번 쓸 때마다 얼마나 큰 소모가 일어날지는 가늠이 되질 않았다. 천후는 이를 악물었다.

‘다가가야 한다.’

지금까진 자신의 안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안전까지 생각하면서 그녀의 공격을 피해냈지만…이제 그럴 때가 아니었다.

고인규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천후를 죽일 방법이 홍희주 밖에 없다면서도 그녀가 죽어도 상관없단 식으로 굴고 있었다. 저기 저 하늘에 뜬 채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그저 여흥 거리처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분하게도…천후에겐 그렇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그녀가 그 힘을 다해서 쓰러져서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럴 순 없다. 그렇다면…각오를 해야 한다!

“혈식. 용기식.”

“하아아아아아!”

푸확!!! 그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신위. 아직 완벽에 다다르지 못해 홍적으로 불타오르는 불꽃이 된 그는 핏빛 기운을 바라보다가, 각오를 굳히곤 그대로 마주 쏘아 들어갔다.

“으, 윽…!”

과거 천후는 드래곤 브레스를 신위의 빛으로 밀어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몸에 걸친 신위로 이걸 직접 뚫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입으로 뭔가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검은 삼 자매의 비명과 함께 몸이 부서지다 재생되다를 반복하고, 마지막에 가선 그녀들도 버티지 못해 다시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제야….

“희, 희주 씨….”

그는 신위뿐 아니라 강화마법조차 완전히 풀려버린 만신창이가 되어서 그녀의 앞에 설 수가 있었다. 이미 옷은 대부분 찢어졌고, 온몸엔 그을음과 불탄 상처가 가득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는 그녀 앞에 섰다.

“…….”

간신히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그녀는 말없이 검을 들어 보일 뿐이었다. 더 다가오면 베어버리겠다는 것처럼.

그러나……. 그 덕분에.

천후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시선이 사로잡힌 듯. 한곳을 바라본 그의 입가엔…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하. 하하….”

지금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떠오른 웃음이었다. 그녀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듯, 금안은 번뜩이며 그대로 검을 내질러왔다. 그 움직임이 매섭다. 사전 동작조차 없는 빠른 찌르기.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그래도 어설프다. 이강호. 그녀였다면 단숨에 사람이 죽을만한 장소를 노렸을 텐데, 희주는 반격을 예상하고 예봉을 꺾으려 어깨부터 찔러온다.

공방을 주고받을 거라면. 그걸 맞고서 사람이 물러설 거란 전제하에서는 훌륭한 선택이다. 그렇지만!

저벅.

그는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월하홍취로 인간 이상의 초자연적인 힘을 얻은 그녀의 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어깨를 완전히 관통해버렸다. 그렇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나아가,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덮었다.

“아.”

이것은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는지, 그녀는 낮은 소리를 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빛나는 황금안 안쪽은 또 다른 빛. 수많은 빛으로 천변만변하고 있었다. 과연…인간의 몸으로 신에 닿게 한다더니. 그 모습이 과연 별의 화신과 판박이였다.

그렇지만. 지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깨가 관통당한 아픔도.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경이도 지금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그녀를 어떻게 되돌릴까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걸로 최완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지만, 결국 둘은 답을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천후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녀가 신인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자신과의 조우였다. 그렇다면 그때 있었던 행동을 반복한다면…적어도 그녀와 제대로 된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더 창백하다. 월하홍취의 영향이다. 입술은 보랏빛으로 변색되어 추운 것처럼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열기로 덮었다.

“음?!”

순간.

머릿속에서 섬광이 터졌다.

*

그날.

그녀는 빛을 보았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빛. 그 최초의 모든 것에서 갈라져 나온 일부를 영접했다. 그녀는 그것에 홀렸다.

그다음 눈을 떴을 때. 그녀는 한 저택에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은 ‘마이스터’였다.

그녀의 제작자.

그녀를 ‘실패했다’며 묘지에 버렸던 남자.

엄밀히 따지자면…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 역시 본래는 그곳에 있던 수많은 실패작 중 하나였다. 육체는 만들어냈지만, 영혼이 깃들지 않아 그냥 몸만 덩그러니 있는 육체 덩어리….

그것을 사람들은 다른 말로 시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그녀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이다. 불가능한 일. 그러나 빛이 그녀에게 삶을 주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세상을 살아갈 자격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그녀의 ‘주인’을 섬길 수 있게 되는 것. 그리고 그녀의 삶의 주인은 이미 그녀를 만들어 낸 자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자 역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그는 당분간 세상에 내려올 수 없어요. 그동안은 이곳에서 살고 있도록 하세요. 그리고…그가 세상에 내려왔을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을 것 같군요.”

그건 예상외의 이야기였다. ‘그분’에게 부족함이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곧 그녀는 깨달았다. 이 인간의 육신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이상. 그 누구도 완벽할 순 없다.

수많은 요인에 의해서 인간의 형形이 결정된다. 그리고 그녀가 평생을 모시기로 결정한 그분은…제작자에게 들은 대로라면 모든 것이 부족한. 미숙한 사람이리라.

그것은 안타까우면서도.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기도 했다.

쓸모없는 자신이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는 것이.

이미 신역에 부분적으로 닿은 그녀는 못하는 것이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는 이미 할 수 있었다. 육체적으로 한계가 있어서 아예 시도하기 어려운 일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녀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서포터가 되어 그를 기다렸다.

유그드라실. 인간 세계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저 천상의 감옥에서 내려온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모른다.

그분께…처음 안겼을 때도.

하지만….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희미한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언젠가 내가 저분께 누가 될 거라는 직감. 그것에 사로잡힌 나는 보험을 만들었다.

어차피 나는 주인님이 세상에 계시기만 한다면 만족할 수 있다. 그분께 최고의 사랑을 받는 게 내가 아닐지라 하더라도….

그러니 내가 없어도. 언젠가 사라지더라도 저분이 살아갈 수 있도록. 부족함이 없도록.

그렇게. 그렇게 살아왔는데….

반지를 받았다.

그날.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나를 반려 삼겠다 하셨다. 이전부터 하셨던 말씀. 하지만 그 심지가 굳음을 알았을 때. 그 얼마나 기뻤는지…….

울었다.

그가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 나는 기쁨에 홀로 숨어서 길게도 울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나는 부끄럽고 부끄러워, 차마 눈앞에서 말씀드리진 못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당신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건 제 쪽입니다.

“아….”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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