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311화 (311/324)

311화

<서력을 끝낼 자>

“오랜만에 세상에 나오는군.”

처음으로 그가 입에서 낸 말은 그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팍 위에 올려져 있는 발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하하.”

‘변했다.’

고인규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에게 느껴지던 분위기. 희주의 시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서 얽매여있던 그런 인간적인 기색이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아. 세상에 하나뿐인 신의 대자이시여.”

“우리의 주인이시여.”

“드디어 이 세상에 나시었나이까?”

언제나 그가 상처 입었을 때 회복시켜주던 검은 세 자매가 제 형상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흑색에서 백색으로, 그러다 이윽고 사람의 형상을 취한 그것들은 남자의 곁에 서서 그의 몸과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들은 마치 영혼처럼 하반신 아래가 희미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사람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저들은 과연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아니, 사람일 수가 없으리라.

저자 앞에서 사람이 무사할 수는 없으니까.

“드디어 나오셨군요. 별의 적자. 신의 대자. 종언의 마법사여.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를 바라보는 고인규의 눈빛은 천후에게 향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의 얼굴엔 어울리지 않는 홍조가 맺혀있어 그가 흥분해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인간이 준비한 모든 간계를 이기시고 이 자리에 섰으니, 이제 당신의 힘을 보여주십시오! 단죄의 힘을!”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지켜보기만 했던 연예인을 직접 본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환희로 가득 찬 그는 마치 연설하듯 그의 앞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기실 그것은 그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그가 지금 홍희주를 움직인 것도, 직접 천후를 상대한 것도 인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딴 마음은 있지도 않았다. 있을 리가.

오히려 그는 인간을 저주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숙명을 저주한다고 해야 하리라.

*

날 때부터 SA 랭크 마법사로 태어난 그는 탄생과 동시에 제약을 받았다. 다른 SA 랭크 마법사와 시원의 마법사, 랑크 메이거스에게 제압당해, 인류를 위협하지 않고 그들의 번영을 돕겠다는 맹약을 해야 했다.

행동조차 완전히 자의로 할 수 없었다. 유그드라실에서 벌어진 투표 결과에 연연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것에 따르는 것만이 그가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삶이었다.

그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지? 왜 이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저 개미 같은 인간들을 쓸어내지 못하고 그들에게 연연해야 한단 말인가?

어째서 저들이 이 행성의 주인행세를 하게 하느냔 말이다. 이미 마법을 얻은 인류가 나왔다. 그들이야말로 신인류가 아닌가? 모든 것을 쓸어내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인류에게 부여된 마법이란 힘 자체가 ‘부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었으니까.

본디 시원의 마법사, 랑크 메이거스 한 사람에게 주어져야 할 힘이 수 세대에 걸쳐서 인류 전체에 퍼지고 있는 것이 마법이란 초자연적인 힘의 정체였다.

별의 화신, 가이아는 인간이 이 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을 미리 정해두었다. 열세 번의 시련을 이겨내는 동안만 살아갈 수 있도록.

다섯 번은 이겨냈다. 하지만 여섯 번째엔 이미 한계에 봉착했다. 가이아는 이에 미리 인간을 멸하고 별에 다음 지적 생명체를 만들어낼 준비를 한다.

그것이 신인류인 시원의 마법사 랑크 메이거스였다. 그녀는 지상에 현인신만을 남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의도를 배신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자신의 다섯 제자들과 나누고서, 그 제자들로 하여금 인간이 치러야 할 시련을 대신 극복하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내려온 힘을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 전체에 흩어지게 했다.

가이아는 이에 격노하였지만, 이것 역시 인간의 방식이라는 그의 말에 설득되어 열세 시련을 그대로 치르게끔 하였다. 그렇게 인류는 천 년을 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앙골모아를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은 끝났다. 그녀는 이제 진정으로 종언을 원하고 있었다. 또한, 랑크 메이거스 때의 ‘실패’를 교훈 삼아 완전히 자신의 뜻에 따를 진정한 대자를 낳았다.

진정 인류에 멸망을 고할 자를.

그것이 바로 11년 전, 대참사를 일으킨 소년이었다.

SA 랭크 마법사, 랑크 메이거스의 힘을 가장 크게 나눠 받은 그들은 언제나 그의 영향력에 속박당할 수밖에 없었다. 고인규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절머리난다!’

고인규는 그 부조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수도승이 아니었다. 어째서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행위를 할 수 없단 말인가?

마법사 전원에게 심어져 있는 인류를 해하기를 거부하는 트리거. 이것조차 그, 랑크 메이거스의 힘을 이어받아 가지는 천형이었다.

그나마 랭크가 낮은 자들은 그것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지만, 그처럼 SA 랭크쯤 되면 그건 완벽하게 족쇄로 작용했다.

그런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그의 마법부여사로서의 사부였던 사하르였다. 과거 마법사가 인간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품었던 그는 SA 랭크와 메이거스에게 그 계획을 분쇄 당하고 혼령이 되어버렸지만, 그가 가진 가치관은 일치했다.

‘어차피 인간의 삶은 마법사가 지키고 있다! 인간은 마법사에게 지배당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함께 멸망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과연 그랬다. 그렇지 않은가?

어차피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 자체가 시련을 대신 치러준 마법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조차 디제스터를 막아주고 있는 게 누군가?

그런데도 인간 위에 설 수 없다면…그래.

차라리 전부 끝장나버리고, 지금껏 마법사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였는지 그들이 통감하게끔 하는 게 더 나으리라!

우리의 보호가 없을 때 너희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깨달아라! 나약한 것들!

그런 그에게 홍희주의 존재는 철저한 이레귤러였다. 의도치 않는 병기가 자신의 창작물에서 튀어나왔을 때 그가 얼마나 아이러니를 느꼈는지….

그렇기에 그녀가 실패했을 때. 차라리 그는 안도를 느꼈다. 이걸로 그가 걸어놓은 금제는 지킬 만큼 지켰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사라진 지금이라면 그를 직접 칠 수 있다.’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공격의사가 사라진 순간, 그는 직접 영천후를 쳐도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았고…….

드디어 꿈에서도 바라마지 않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모든 인류를 멸할 확실한 보증수표를.

“자! 어서 모든 인류를 멸해주십시오! 저 꼴도 보기 싫은 나약한 것들을! 그걸 위해 제가 모든 힘을 다해 당신을 깨웠으니까!”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해달라는 그 말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메이거스의 영향력이 소용돌이친다. 그러지만 그는 입에서 피를 뿜어내면서도 외침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지면에 발을 딛고 선 신의 대자는 그런 그의 목소리를 듣고도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저 산간의 저 먼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이 별에 펼쳐진 풍경을 한눈에 넣어두겠다는 듯이….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별의 모습을 보면서 감명을 받았을 뿐.

그는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 남자의 시선이 고인규에게 돌아갔다.

“바란다면 그렇게 해주마.”

그는 첫 희생양을 정했다.

*

“아?”

순간, 고인규는 자신의 몸이 의도치 않게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눈을 치켜뜬 그는 온 힘을 다해서 저항했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게 무슨…!”

“나와 어머니의 기준으론 너희도 엄연히 인간 안에 들어가거든. 그리고…오랜 친구의 의뢰도 있으니.”

싸늘하게 웃은 그는 천천히 그를 향해 손을 들더니,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갑자기 주변 공간이 이지러지더니, 그 안쪽으로 고인규의 몸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그의 온몸이 마치 거대한 손으로 쥐어짜듯이 망가진다. 커다란 압력을 버텨내지 못한 근육은 터져나가고, 뼈는 말할 것도 없이 산산조각 났다. 당장에라도 눈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꼴을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았다.

“너만은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 달라더군. 후후…. 나는 인간에게 들이대는 선악의 기준이 너희와 다르지만, 기껏 세상에 나오게 해줬는데. 그 정도는 못 해줄 바도 아니지.”

“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른 고인규는 발작을 하며 그에게 마법을 쏘아댔다. 빛과 번개와 화염이 허공에 터져 나와 남자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그것 중 어느 것도 그에게 닿지 못했다. 그저 허공에 허무하게 흩어질 따름!

그걸 보던 남자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10년 전과 별다를 바가 없군. 네 실력은. 메이거스의 뒤꽁무니에 숨어서 살아남았던 놈이던가.”

“!!!”

“후후…. ‘이 녀석’에게도 걸리적거리는 것만 없었으면 제법 재미있는 싸움이었을 텐데. 물론 네가 그 정도로 이 녀석을 미치게 만들었으니 내가 나올 수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은인인가?”

그렇게 말은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 고마움 따위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이라곤 역겨움뿐이었다. 그의 입에서 차가운 일갈이 터져 나왔다.

“네놈 같은 은인은 필요도 없었지만 말이다. 쓰레기 같은 것. 가거라!”

뿌직! 뿌지지지직! 남자의 외침과 함께 고인규의 육체가 그대로 내부로 말려들어 가기 시작한다. 내장도 근육도 으스러지고, 눈알은 튀어나와 땅을 구른다. 그렇게 부서지고 부서져, 주먹만 한 고기조각이 된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줌의 핏덩이가 되어서 사라졌다.

“흥. 답답한 것. 이렇게 쉬운 것을.”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혀를 찼다.

몸을 공유하고 있는 이상, ‘녀석’이 처했던 광경은 전부 그도 느낄 수 있었다. 시스템의 영향으로 잠들어 있는 시간이 길긴 하지만, 방금은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녀석’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 반대도 성립했다. 인간의 정신과 오랜 시간 융합되어있던 그는 녀석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함께 진노했던 것이다.

주도권을 얻자마자 저걸 끝장내버릴 생각부터 하고 있던 그는 즉시 실행에 옮기고 나서야 후련한 기분이 될 수 있었다.

“하하. …응?”

그렇게 한차례 맑은 웃음을 짓던 남자는 그러다 다시금 인상을 썼다. 그의 시야 한구석에…또 하나 거슬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하나의 시체였다. 등이 완전히 갈라져 죽어버린 여자의 시체.

“아…….”

그것을 본 순간 그의 인상은 험악하게 굳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순간 그의 머릿속이 지끈지끈 울렸다. 그는 그 이유를 쉬이 알 수 있었다.

“마지막 미련이라 이건가? 흥.”

그녀를 보자 정신이 완전히 뒤바뀌었는데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가슴이 뛰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것이 ‘녀석’이 그에게 남겨놓은 마지막 잔재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괴로워하는 숨을 내쉬었다.

“큭…. 좋아. 이게 마지막 소원이라면 못 이뤄줄 것도 없지.”

그렇게 거칠게 내뱉은 그는 시체 쪽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여자의 완전히 헤집어진 등이 순식간에 아물어버렸다. 함께 찢어진 옷조차 돌아와, 그 자리엔 인형 같은 인상의 여자가 그저 누워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그걸 내려 보며 뱉어내듯 말했다.

“멍청한 것. 어차피 나의 사명을 시작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을.”

쯧하고 한 번 혀를 찼던 그는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냥 보기엔, 그곳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의 눈에는 보였다.

눈.

그 남자의 제자들이 세상에 남겨놓은 세상을 감시하는 눈이.

그걸 본 남자의 입가엔 그제야 웃음이 돌아왔다.

“자. 그럼 일을 시작해볼까?”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하늘에 떠 있는 눈.

유그드라실 안에서는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영천후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던 마법사들이.

고인규에게 계획을 맡겨두었던 그들은 이후 일어난 일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상에선 절대 그들이 바라지 않았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끝장이다…. 서력이…끝난다.”

아무도 그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인간의 때를 끝낼 자는 그렇게 움직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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