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최후의 수호자>
유그드라실의 AI, 미미르는 ‘그것’을 포착한 이후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경고. 경고. Type-Apocalypse. 각성.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Type-Apocalypse. 각성.>
그렇지만 아무리 소리쳐봐야 대응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유그드라실에 탑승한 모든 마법사들은 그저 손을 놓고 지상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를 ‘처리’하기 위해서 투입되었던 자가 바로 인류에 남아있던 가장 강력한 마법사이자 유일한 SA 랭크 마법사였다.
시원의 마법사에게서 힘을 직접 나눠 받은 다섯 중 하나. 그가 손짓 한 번에 공간의 틈에 빨려 들어가 죽어버리는 광경을 보고서 그들은 모든 전의를 잃었다.
“어쩌다 이렇게…이렇게 될 일이 아니었는데.”
그저 당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홍희주는 분명 영천후를 죽일 수 있는 병기였다. 기적을 통해 신역을 접해 태어난 신인. 그러나 그것이 또 다른 기적과 그녀의 의지에 막힌 순간부터 계획은 어긋났다.
뭐 거기까진 좋다. 그렇다면 그녀를 다시 사로잡든가 해서 그를 가둬놓던가, 아니면 그녀를 재조정할 일인데…고인규의 행동은 완전히 예상을 벗어났다.
그녀를 죽여 버린 그는 일부러 그를 도발해서 저 신의 대자가 세상에 나타나게 해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그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얼마나 얄팍한 믿음 위에서 일을 진행해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고인규라는 저 남자는 어차피 유그드라실 자체에 소속감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SA 랭크 마법사로 태어나 벗어날 수 없는 천형에 얽힌 것을 제외하면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망설일 인물이 아니다. 기회가 온 순간 그는 저질러버렸다.
그렇게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 이가 세상에 강림했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오늘로 서력은 끝장이 나리라.
“하. 하하하하….”
미미르의 보고에 누군가가 웃음을 터트렸다.
인간 절명의 오오라.
11년 전 뭄바이 한가운데에서 펼쳐졌던 그 힘이 감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뭄바이에 남아있는 악시스 문디는 지금도 인류 문명을 무너뜨리는 힘을 확장하고 있었지만, 그 영역에 들어간다고 사람이 죽진 않는다. 입고 있던 옷이 빠르게 부식되고, 가지고 있던 물건들도 죄다 망가지고 흩어져버리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는 다르다. 그저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반경 수십km의 모든 인간이 사망해버린다. 신역에 접어든 몇몇 인간만이 그것에 저항할 수 있을 뿐. 나머지는 가차 없다.
그가 본격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면 인류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 모두 사라져버리리라. 사흘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경고. 경고. Type-A의 공격 의사를 포착. 유그드라실 전 인원은 신속히 퇴거해주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Type-A의 공격 의사 포착.>
“뭐라고?”
놀란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도망치기보다 화면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허공에 손을 치켜든 남자가 보였다. 영천후의 얼굴을 한 다른 누군가가.
“지긋지긋한 것들. 당장 하늘에서 내려와서 함께 심판받아라.”
낮게 일갈한 남자의 손에서 백열이 터져 나와, 빛줄기가 되어 하늘을 갈랐다.
그것은 정확히 유그드라실의 중심부인 ‘눈’을 관통해버렸다.
단 일격에 지금까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던 불가시 모드가 풀려버린 유그드라실은 불꽃과 연기를 내뿜으며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흥.”
그 광경을 보며 그는 다시 한 번 손에 힘을 모았다. 다음 일격으로 완벽하게 마무리를 지을 셈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그만둬라. 네가 할 일은 개인적인 분풀이가 아닐 텐데?”
“…….”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감각에 걸리지 않고 목소리가 들려올 범위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자는 흔치 않다.
그중 하나는 이미 죽어서 저기에 눈동자만 굴러다니고 있었으니, 그럼 예상할 수 있는 이는 하나뿐이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왔나? 수호자.”
“…….”
고개를 든 그의 눈에는 한 남자가 보였다.
중절모에 긴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얼굴에 막 기른 수염이 구레나룻과 합쳐져 있는 그 남자는 입에 시가를 물고 있었다.
나이는 40? 50쯤 될까? 중년에서 장년으로 넘어가는 나이의 그는 주름진 눈가를 찡그리고 있었다.
그는 저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녀석’과 함께 할 때 오래도 봐왔으니 말이다.
최완.
“슬픈 일이군. 이전 싸움에서 너무 많이 죽어 없어졌나? 인류가 남긴 마지막 수호자가 너라니.”
“…….”
최완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그 얼굴이.
영천후의 얼굴과 영천후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놈’을 본 최완은 부서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결국엔.’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수많은 약속과 맹세를 하고서 떠났지만, 결국 천후는 지켜내지 못했다. 그의 눈에 저쪽에 쓰러진 희주가 보였다. 마음이 어지럽고, 머리는 깨질 것 같았다. 하지만 신이 만들어낸 인간의 절망은 눈앞에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일갈이었다.
“네가 진정 인간의 파멸 그 자체라면 우리가 준비한 마지막 시도도 받아들여라. 신의 대자여.”
“음. 아~. 중국에 설치한 그것 말인가?”
그의 말에 최완은 침음성을 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별이 화신이자, 모든 마법사가 부리는 마법이란 힘의 진정한 근원. 가이아가 직접 낳은 적자다. 그가 이 별 위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일은 전부 인지하고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가볍게 웃은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시련을 맞이하는 자세로는 충분하구나, 최후의 수호자여. 너희의 마지막 발버둥. 확실히 전부 받아들여 주마.”
그것은 마치 인간이 준비한 그 어떤 시도도 자신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최완은 잠시 할 말을 잊었지만, 곧 중절모를 깊게 눌러쓰고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그’ 역시 아주 잠시. 희주 쪽에 시선을 던졌다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강원도 산간엔 다시 정적만이 남았다.
한동안 괴물이 나타나고, 폭음이 난무하던 이곳은 이제 싸늘하게 식은 한 여자의 시체만이 누워있을 뿐이었다.
……그랬을 터였다. 그녀들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하녀 복을 입은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나온 건물 옥상에 있는 시신을 조심스레 거둬들이고는, 일부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인형과도 같은 낯빛으로.
고인규에게 만들어진 생명인 것이 그녀들은 도구가 죽었을 때 회수하는 명령이 들어있어, 그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은 둘이 죽었다. 그것들을 거둬들인다. 그 뒤 장례를 치를지, 아니면 다른 식으로 처리할지는 그들의 주인의 마음에 달린 일이라는 판단으로.
그렇게 쓰러져 있는 여자를 천천히 들러 올렸을 때.
……움찔.
그들은 아주 작은.
그렇지만 있을 수 없는 움직임을 느꼈다.
*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위치한 타클라마칸 사막.
아시아 대륙 한가운데에 형성된 이 사막의 상공에 한 차례 빛이 터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선 두 남자가 나타났다.
하나는 이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190에 가까운 큰 키에 머리를 짧게 깎은 그는 가느다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장년의 남성이었다. 그는 청년과는 달리 굳은 얼굴로 청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청년 쪽이었다.
“잘도 이런 척박한 곳에 준비를 해두었군. 하긴…. 인간이 발을 들이지 않는 곳을 찾다 보면 아무래도 지역이 제한되겠지만.”
그의 말에 장년 남자, 최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장 최적인 건 역시 극지방이지만…이그네스 때처럼 극지방이 아예 녹아내리는 경우에도 재앙이 되어버린 선택한 장소다.”
“재미있군. 그럼 어디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선보여 보실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양팔을 벌렸다. 마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라는 듯이. 여유가 넘치는 그 모습을 본 최완은 이를 악물고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것이 신호였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수백, 아니 수천 개의 빛이 쏘아져 올라오는가 싶더니, 그것이 하늘에서 만나 터지며 흩어졌다. 연녹색을 띠는 그 빛은 곧 반구형의 형태가 되어서 그 넓은 지역을 감싸버렸다.
“호오.”
그 광경을 본 남자는 나지막한 감탄성을 내면서 그것이 불러일으킨 조화를 확인했다.
“과연 대단하군. 이날만을 위해서 이곳에서 계속 살고 있었던 모양이지? 이런 빠른 대처라니. 내 힘이 어느 정도 억눌려졌군.”
가이아의 힘을 직접 이어받은 그는 사실상 그 힘에 끝을 잴 수 없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이 결계가 펼쳐진 지역 안에서는 어느 정도 제한되고 있었다. 인간 절명의 오오라 역시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가볍게 웃은 그는 그러나 그것을 느끼면서도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확실히 11년 동안 놀고 있었던 건 아니군. 그렇지만 불완전한 걸…. 완성도가 떨어져. 원래 구상했던 건 이것보다 배 이상의 효과를 바랐던 것 같은데 말이지.”
“마법사의 수가 부족했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10년 이상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을 대비하고 있으라는 건 누구에게나 고통스럽지.”
“하하. 과연. 과연.”
그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뼉을 쳤다.
“인류가 멸망할 수 있는 위기를 대처하자는 것에도 그런 잣대를 들이댈 수 있군. 하긴. 개인이 끌어안고 가기엔 너무나 큰 희생이지.”
유그드라실이 공중요새에 8천. 그리고 지상에는 그보다 많은 마법사들을 포섭했다곤 해도, 그 모든 이들을 이 사막 한가운데에 박아 넣을 수는 없었다.
당장 최완만 해도…지금까지 그가 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니 대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상황을 유그드라실 모든 마법사에게 강제한다고?
그런 건 불가능하다. 지금 이 신역까지 포괄하는 결계를 만들어낸 것 자체만도 기적에 가까웠다. 비록 그 효과가 저자에게는 가벼운 아령을 든 정도에 불과하다 하다 해도 말이다.
“슬프군. 인류가 준비해왔던 마지막 힘이 겨우 이 정도였다니.”
“…….”
“그리고 슬픈 건 너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껏 잘도 마지막까지 진실을 숨겨왔었지. 악시스 문디와 생명 연결이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진정한 주체가 나 자신. 그 녀석 자신이란 것은 이때까지도 숨기다니.”
가이아가 남긴 최후의 시련의 정체는 악시스 문디가 아니라, 최완 앞에 있는 바로 이 남자였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인류의 멸망을 가져오는 자. 악시스 문디는 이 신의 대자가 봉인 당하며 남긴 힘의 편린에 불과하다. 최완과 유그드라실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을 영천후에게 숨겨왔다.
“금제가 걸려있었을 뿐이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가이아가 녀석에게 걸어둔 안배였으니까…. 그걸 입에 담았다면 너는 바로 부활했을 테지. 녀석의 몸은 메이거스와 가이아가 걸어둔 안배가 섞여 있는 폭탄이었다. 모든 진실을 알려줄 순 없었다.”
그 말에 남자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것뿐만은 아니었겠지. ‘아버지.’”
“…….”
덜컥. 최완의 말이 한순간 멎었다. 그동안 남자의 웃음은 계속되었다.
“물론 그것이 주된 이유.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었어. 만약 금제가 없었더라도 당신은 말하지 않았겠지. 당신은 바란 거야. 이 녀석이 계속 인간으로 남기를. 지금까지 계속. 그날 일어났던 대참사의 원인이 자기 자신이었단 걸 깨달으면 그 순간 이놈은 미쳐서 자살해버렸을지도 모르니까.”
최완에게서 답은 없었다. 남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자기 가슴.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미안해. 아버지. 결국엔 이렇게 되고 말았군.”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네놈이…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펄럭!
중절모와 코트가 하늘을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