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마지막을 향해>
그가 막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돌아와 실의에 빠져있을 때 일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생존해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했지만, 그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바로 그때.
DS 쪽을 통해서 한 통의 연락이 왔다.
고인규의 저택에서.
“뭐…라고요?”
전화를 해온 것은 고인규의 하녀들이었다.
그가 만든 인조인간…. 생체 인형이라 불러야 할 그들은 고인규의 지시가 없으면 평생 그 저택을 돌보면서 살아갈 뿐인, 입력된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일엔 아무리 침울해져 있던 그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진정으로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살아있었어….”
슥. 유리관을 매만진 천후는 그 안에 들어있는 희주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유리관은 고인규가 과거 그녀들을 ‘배양’할 때 썼었던 기구였다. 그녀들에게 마법적으로 명령을 주입하고, 몸을 길러냈던 장소.
말하자면 그들에게 있어선 태내와 마찬가지인 장소였다. 또한, 그녀들을 ‘재조정’할 때 쓰는 장소이기도 했다.
하녀들은 산중에 쓰러진 그녀를 회수해서 그녀를 이 유리관 안에 넣어뒀던 것이다. 움직이지 않으니, 언젠가 자신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녀를 새로 움직이게 할 수 있도록.
물론 완전히 죽어버린 인형을 이런 곳에 넣어둘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숨은 붙어있었다.
“그때….”
천후는 그녀를 보자마자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막 고인규를 끝장냈을 때, 신의 대자는 그녀를 회복시켰다. 물론 그 당시 그녀는 완전히 숨이 끊어져 있었지만….
애초에 그녀에게 ‘생명’이 부여된 것 자체가 그와 뒤섞였던 자신을 접해서다. 인간의 생사를 관장하는 그가 다시금 생명을 불어넣지 못할 리 없었다.
“정말…다행이야….”
그녀의 생존은 최완의 유언과 더불어 그에게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는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다만, 그녀는 그날 이후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미연을 불러서 상태를 보았지만,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후우….”
그는 그 유리관을 매만지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고인규 저택의 하녀들에게 약간의 ‘판단력’이 부여된 것은 분명히 그녀의 영향인 것 같았다.
그녀들은 그 뒤 저택에 있던 고인규의 연구 자료들을 모아서 DS에 가져왔다. 이 지푸라기 하나라도 필요한 상황에서 그건 큰 도움이 되었다. 본래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놀라서 물었더니 그녀들은 이렇게 답했다.
“저희에겐 그녀의 의사가 들립니다. 저흰 그저 그 말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순간 천후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과거 모리나 그윈들링을 통해 구현되었던 정신 링크가 그녀들 사이에서도 활성화된 것이다. 그 중심은 당연히 홍희주였다.
“당신은 이런 상태에서도 나를 도와주고 있군요.”
이것만큼 든든한 일도 없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다시 눈을 뜨기 위해서 무진 노력을 하고 있을 터였다. 아마 그렇게 깨어난다면…당장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춰오겠지.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천후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방법은…있다.’
과거. 루스트 그윈들링을 자처한 기계 인격이 라즈베리를 인류 통합 사념체로 삼아 그 힘을 한데 모아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홍희주가 발휘한다면…인위적이 아니라 신과 직접 맞닿은 그녀라면 훨씬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그야말로 신을 칠 수 있는 인간의 검이 되어. 그러나 그것은 곧….
“…….”
툭. 유리관에 이마를 가져다 댄 천후는 희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세상 모르게 두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그런 당신을 희생할 순 없어….”
그날. 그녀가 그의 품에서 숨을 멎었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 그 광경을 다시 재현할 순 없다.
이렇게 그녀가 다시 그의 곁으로 온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녀를 살렸던 신의 대자와 대적을 하는 것이니, 이제 다시 그런 기적을 바랄 순 없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생각해보자.”
스윽. 관에서 이마를 뗀 천후는 그렇게 등을 돌리고 쉘터를 나섰다.
시간은 촉박하고, 방도는 한정되어있다. 그렇지만, 시도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있었다. 천후에게 있어 이번 시도는 후자였다.
쿵.
쉘터 문이 닫히자, 그 안은 조명이 꺼지며 어둠의 영역이 되었다. 빛이라고는 유리관에서 내비치는 희미한 녹색 빛뿐.
그 빛 속에서.
“…….”
여자의 눈이 한 번 떠졌다 감겼다.
*
악시스 문디가 활동을 잠시 멈추고 있는 사이, DS와 정부 측에서 힘을 쓴 것은 유그드라실 수리였다.
워낙에 큰 구체가 완전히 관통당해 지상으로 떨어졌으니 도저히 고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유그드라실에 배치된 수리 머신들과 마법사, 기술자들이 들러붙으니 불가능이 없었다.
<유그드라실 성층권 비행 성공. 큐브 엘리베이터 정상 사용 가능. 하지만 유그드라실 전체 출력은 과거의 64%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그 영향으로 유그드라실 불가시 모드는 사용 불가. 텔레포트 역시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그 수리는 완전하지 않았다. 유그드라실의 메인 프레임은 SA 랭크 마법사들이 만들었는데, 거기에 부여되어있던 마법 자체가 많이 날아가 버려서 그건 복구할 길이 없었다.
그렇지만 일단 하늘에 떠서 큐브 엘리베이터를 운용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다행이었다. 위성 자료뿐 아니라, 직접 하늘에 올라 악시스 문디를 포착해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단 점이 특히 그랬다.
<신급 디제스터 악시스 문디의 줄기 중앙에서 커다란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중심핵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심핵이라…. 과거에도 악시스 문디에게서 이런 반응이 있었어?”
<부정. 얼마 전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럼 아마도 신격이 임한 곳인가 보군.”
천후는 미미르가 언급하는 ‘중심핵’이 신의 대자가 임한 장소임을 직감했다. 이에 대해 미미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직 미미르 자신에게 판단 근거가 부족한 탓이리라.
“긍정적으로 봐야 할지, 부정적으로 봐야 할지….”
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악시스 문디는 무적의 생명체였다. 적어도 인간에게는 말이다.
실체와 비실체의 중간 영역에 있는 이 세계수는 영천후와 신의 대자가 합쳐져 있는 이상 불멸이었다. 하지만 이제 천후에게서 신의 대자가 나옴으로써 실체화되었고, 중심핵이라는 ‘약점’까지 생겼다.
하지만 이걸 과연 약점으로 봐도 좋을지는 모르겠다. 약점이란 건 쳐서 죽어야 약점이지, 칠 방법조차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법. 지금 악시스 문디의 상황이 그랬다.
“그렇지만…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악시스 문디의 활동이 시작되는 때는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먼저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위해 이 유그드라실 위에 올라있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이들 역시도….
천후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유그드라실의 홀. 지금까지 강력한 디제스터들이 나타났을 때 일리미네이터들이 대기하던 이곳은 이제 완전히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노블레스 클럽의 모든 A랭크 일리미네이터, 정규 공격대, 그 외 B 랭크 이상 일리미네이터들이었다.
그들 뿐 아니라 지금 이 유그드라실의 본래 주인인 유그드라실 직원들까지 해서 지금 이 안에는 1만이 넘는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결연했다.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이미 모두 숙지하고 있었다. 별의 화신이 낳은 신과 같은 존재를 쓰러뜨리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천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들 잘 모여 주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인류는 최악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뭄바이 한가운데 솟아있는 세계수, 악시스 문디가 폭주하여 날뛰려 하고 있습니다. 놈이 활동을 시작하면 인류 문명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겠죠.”
꿀꺽하고 누군가 자기도 모르게 침을 넘기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책망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될 수 있으면 이런 사태는 전 세계의 군이 해결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가능한 이야기더군요. 저 악시스 문디를 지키는 수많은 디제스터들이 화력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싸움에서도 저희는 참가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도 저 괴물들 틈바구니 한복판으로.”
그렇게 말하며 천후는 화면을 띄웠다. 악시스 문디 주변의 화면이었다.
악시스 문디가 활동을 정지한 동안, 그곳에는 전 세계에 출몰하던 디제스터가 이제는 그곳 인근에만 출현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지금. 옛 뭄바이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지표면이…악시스 문디가 만들어낸 황무지와 초원이 보이지 않았다. 땅이 있어야 할 곳은 빼곡하게 이형의 괴물들로 가득했다. 놈들은 마치 뭔가를 기다리듯,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하늘 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놈들이 시선이 어딜 향하는지는 누가 말해줄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그 안에서 마주 보고 있지 않은가?
“현재 뭄바이 내에 디제스터의 수는 ‘측정불가’입니다. 미미르는 악시스 문디가 위기를 느낄 경우 추가 소환의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악시스 문디는 신급 디제스터. 지금까지 나타났던 디제스터 자료를 토대로 생각해보면, 멸급이나 천급 디제스터를 퇴치되자마자 계속 소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말이죠.”
그 이하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최악의 경우…지금 저 광경에서 아무리 싸워도 변함이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그들은 그런 사지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이에 우리가 가진 대책은 하나뿐입니다. 어떻게든 악시스 문디에게 재래식 병기 화력 면역을 부여해주고 있는 멸급 디제스터들을 빠르게…되도록이면 동시에 처리한 다음, 그 순간 현장을 이탈. 인류가 가진 병기를 모조리 쏟아 붓는다.”
화면엔 예상도가 떠올랐다. 미국, 중국, 러시아, 유럽…수많은 국가에서 탄도 미사일을 발사해 악시스 문디에 쏟아 붓는 모습이. 인근 국가에서 포격을 가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이 뒤 중심핵이 노출되면…그땐 그 중심핵을 타격할 수 있는 사람들만 투입해 중심핵을 끝장낸다. 그동안 여러분들은 다시 디제스터와 싸우게 될 겁니다.”
중심핵만 남아도 하급 디제스터는 소환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지켜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이렇게 했을 때…미미르가 예상하는 승률은 10% 미만입니다.”
10%. 1/10.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낮은 확률의 도박에 응해서는 안 된다. 패배하라고 있는 확률이니까. 그렇지만…이제 걸 수밖에 없다!
도박수라도 남아있을 때!
“이런…말도 안 되는 지옥에 여러분들을 불러들이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이 모든 내용을 사전에 밝혔음에도 이 자리에 모여주신 여러분의 용기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여기에 모인 이들은 ‘이런 싸움’이 될 걸 알고 모여 준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벅찼다.
이 자리에는 이 일을 일으킨 천후 살해파 유그드라실 직원들 역시 있었다. 하지만 천후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인식을 내려놓기로 했다.
인간인 이상 천후도 그런 이들과 다시 손을 맞잡고 싶진 않지만, 그들이 세상을 구해내고 싶다는 마음 역시 진심이란 건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대신 천후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 일리미네이터의 마지막 싸움이 될 것입니다. 승리한다면, 아마 디제스터도 없어질 테죠. 패배한다면 아예 우리가 세상에서 사라질 테고…. 그러니 뭘해도 실업자가 될 거라면, 이깁시다, 여러분.”
그렇게 아주 잠깐. 스치듯이 미소 지었던 천후는 그러다, 곧바로 눈매를 날카롭게 하며 선고했다.
“그럼. 현 시간부로…마지막 레이드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