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317화 (317/324)

317화

<결전>

영천후가 공격받은 이후로 아직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다. 신의 대자가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시점을 기준으로 보자면 일주일도 되지 않는다.

본래 이 정도 시간 가지곤 전 세계의 힘이 한곳으로 모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지만 이번만은 이야기가 달랐다.

세계 각국의 모든 재래식 병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미국, 유럽의 함대는 인도양에 진을 쳤고,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인접 국가들의 지상 병력이 집중된다. 사거리가 되는 장사정 미사일은 모두 악시스 문디를 향해 조준되어있었다.

인류가 멸망한다. 이것은 직접적인 체감이었다.

당장 악시스 문디의 경계 확장으로 나비 뭄바이뿐 아니라 배들라퍼, 비라가 그 영역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제 도로도 남아있지 않았다.

당장 천후가 이전 악시스 문디에 찾아갔을 때 썼었던 바시브릿지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번에 힘을 모으지 않으면, 신의 대자가 눈을 뜬 이후엔 사흘 이내에 똑같은 꼴을 당할 거라는 예상에 전 세계는 전율하여 힘을 합쳤다.

그러나 합쳤을 뿐이다. 그 땅에 모여든 괴물들. 멸급 디제스터의 영향력으로 그들이 가진 재래식 병기는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저곳에 가장 먼저 발을 들여야 하는 것은 일리미네이터가 되었다. 그들이 먼저 들어가서 멸급 디제스터를 잡아주지 않으면, 현재 인류의 힘으론 악시스 문디에 상처 하나 낼 수 없다.

“그리고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정말 끝내주는구만.”

큐브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레이나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면 대신 디제스터 밖에 안 보이는 곳으로 알아서 걸어 들어가야 하다니.

“괜찮으십니까? 날짜 알아보신다더니….”

태원은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얼마 전 그는 건너 레이나드가 결혼 날짜를 알아보고 있단 소리를 들었다. 딸인 예빈이가 어렵게 허락해줬다던가. 그런데 이런 위험한 레이드에 다시 공격대장으로 나서게 되다니?

그의 물음에 레이나드는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거기엔 양 눈꺼풀과 콧잔등에 이어지는 기다란 할퀸 상처가 남아있었다.

일부러 남긴 상처 자국.

레이나드의 양 눈은 재생되었지만, 그는 극구 이 상처만은 남겨두었다. 그날을 기억하기 위하여….

“나는 이 괴물들이 나타날 때부터 싸워왔어. 그럼 그 마무리도 내 손으로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도리겠지.”

“형님….”

“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건 아니야. 성아 씨도, 예빈이도 허락해줬어. 예빈이는 역시 내 딸이더라. 이럴 때 빠지면 지금까지 해온 게 뭐가 되냐면서 나를 밀어줬어.”

“효녀네요.”

“그래. 그러니까 더욱 빨리 끝장내고 돌아가야지.”

그렇게 웃은 레이나드는 선글라스를 빙글 돌리다가 다시 썼다.

“그럼. 시작해보자고. 정태원 공격대장. 서포트 하지.”

“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 큐브 엘리베이터로 뭄바이로 강하 중이라곤 해도…이것 역시 인간의 창조물이다.

악시스 문디가 만들어내고 있는 영역 안에 들어가면 낙하하는 도중에 사라질 수가 있다. 통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평소에 항상 착용하는 소형 통신기 대신, 유그드라실 마법사들이 유지하는 텔레파시 링크로 대신 통제를 하고 있었다.

“그럼! 시작합니다! 전 인원 큐브 엘리베이터에서 이탈! 동시에 버스터 1, 2, 3팀! 발사!”

일갈과 동시에 하늘에서 1만이 넘는 인원이 튀어나오며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그들이 나오자마자 큐브 엘리베이터는 지금까지 유지하던 속도와 내부 중력 제어 기능을 잃고는 제멋대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유지될 수 있는 한계치를 정확히 예상한 것이다.

“키이이익!”

“쿠에에에에!”

불길에 휩싸여 떨어져 내리는 큐브 엘리베이터를 발견한 디제스터들은 적의 존재를 느끼곤 하늘 위로 적의를 내비치기 시작했다.

오직 인간을, 인간만을 살해하기 위해서 태어난 생명. 가이아의 의지와 별의 적자의 봉인된 힘의 잔재가 모여 만들어진 이 괴물들은 그대로 제각기 힘을 내쏘려고 하고 있었다. 그 필두에는 당연히 악시스 문디를 지키고 있는 멸급 디제스터가 있었다.

이놈들 하나하나가 국가 하나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괴물 중의 괴물. 보통 때였다면 놈 하나를 보고도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즈으으으응…!

상공에 힘이 모인다. 오오라라기엔 너무나도 광폭한 빛으로 번뜩이는 그것들은 얼마 후 해방되어 즉시 지상을 덮쳤다.

쿠확! 황무지 위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있던 큰 뱀이 그 빛기둥에 직격당했다. 세 방향에서 날아든 그 공격을 맞은 멸급 디제스터는 그 즉시 증발했다.

<멸급 디제스터 1체 소멸 확인. 다른 개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버스터 산개! 그리고 각 일리미네이터 팀! 교전 시작! 목표는 레이드 종료 시까지 버스터 유지!”

“네!”

싸움이 시작되었다.

*

일리미네이터들이 짠 계획은 굉장히 무모한 내용이었다.

물리적으로…지금 저 지상에 있는 모든 디제스터를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멸급은 몰라도 그 이하는 아무리 잡아봐야 악시스 문디가 약간만 힘을 쓰면 다시 나타날 건 명약관화하기도 하고.

그러니 그들이 건 것은 속도전이었다.

어떻게든 방해되는 멸급 디제스터부터 끝장을 낸다. 그걸 위해선 극강의 화력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노블레스와 S 랭크 디버퍼 라즈베리 미키스트리. 그리고…S랭크 방출 마법사 이그네스를 따로 팀에 편성하여 원거리에서 멸급 디제스터만 저격한다.

처음 이 계획에 천후는 반대의견을 표했다. 영천후, 아니 이제 신의 대자를 리미터로 쓰고 있는 지금. 그녀는 이전 완전한 염정炎精의 형상만 취하지 않는다면 안정성 문제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남극 사태 이후로 마법을 사용하는 걸 꺼리고 있었는데 이런 일에 투입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그네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지금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할 때다. 내가 잠깐 겁나는 것만 참아서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하겠다.”

그녀는 단순 화력만으론 지금 현존하는 마법사 중에 최강. 결국 천후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유그드라실에 남은 S 랭크 마법사 간부들의 동원.

방출 주특기는 아니지만, 이들의 화력 역시 어지간한 A 랭크 급. 과거 대참사 때 별의 적자와 직접 겨뤘던 경험까지 있는 그들은 천후 척살 의견을 지속적으로 펼치던 이들이었지만, 이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는 협조를 약속했다.

그렇게 그들을 세 팀으로 나눠서 멸급 디제스터를 저격하고, 나머지 일리미네이터들은 이들이 공격받지 않도록 시선을 끈다. 거기에 더해서…

“5, 6 팀! 침투조의 뒤를 지켜주세요!”

침투조. 버스터 팀 말고도 멸급 디제스터를 직접 상대해 쓰러뜨리기 위해 이 지옥을 일자로 관통해 들어가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영천후와 이강호, 그리고 패트릭이었다. 그들이 움직이는 곳에 디제스터는 남아나지 않는다. 허공에 선이 질주하면 그 뒤로는 피보라만이 남을 뿐이다. 그렇게 그들은 멸급 디제스터에게 직접 찾아가 결판을 보려 하고 있었다.

다만 그래도 부족하다. 이들의 무위는 가히 신적이었지만, 그렇게 정리하고 지나가면, 그 뒤에 남은 괴물들이 다시 그들의 발목을 잡으려 들었다.

그렇게 놔둘 순 없었다. 이들의 돌진이 막혔을 때는 오로지 멸급 디제스터와 교전할 때뿐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둘러싸여 잡것들을 처리하느라 시간을 써야 할 테니까….

“휴. 만나는 놈들마다 끝내주는군.”

패트릭은 눈앞에는 200m가 넘는 거대한 지네 같은 생물체가 있었다. 지네 ‘같다’라고 한 이유는 멀리서 볼 땐 지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가까이 가서 보면 전혀 다른 외형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지네를 닮은 기다란 몸통에는 3m 크기의 절규하는 얼굴들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빈틈없이 붙어있었고, 발로 보이던 그것들은 얼굴 옆에 튀어나와있는 팔이 쥐고 있는 검이었다. 그것들의 수는 한눈에 봐도 수백, 수천 개는 되어 보인다.

그런 놈이 땅이고 하늘이고를 가리지 않고 꿈틀거리면서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오기 전 그 어떤 산해진미를 먹었더라도 바로 게워낼 수밖에 없을 정도다.

물론…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흉측한 괴물을 너무 많이 본 강철 멘탈들이라 인상만 찌푸리고 말았을 뿐이지만 말이다.

“버스터에게 정리하게 하는 게 낫지 않나?”

패트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표면에서 푸른색 광선 하나가 하늘을 갈랐다. 저쪽에 떨어져 있는 멸급 디제스터 하나가 하늘을 향해서 공격한 것이다. 그걸 보며 천후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유그드라실과 버스터 쪽으론 공중 공격이 가능한 놈은 죄다 한 번씩 공격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조금 잠잠해질 때까진 다시 공격하기 힘들 겁니다.”

“어쩔 수 없구만.”

<해당 개체를 해카톤케일로 명명. 근접에 특화된 디제스터로 보입니다. 주의를 요망합니다.>

그런 건보면 누구라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쓴웃음을 지은 천후는 숨을 들이켜며 힘을 모았다.

신의 대자가 빠져나가면서 그의 능력은 오히려 안정되었지만, 반대급부로 말하자면 한계가 생겼다. 이제 이전같이 자기 안에 있는 미지의 가능성 같은 것에 은연중에 의지할 수 없었다.

흑색 화염과 함께 빛무리가 그와 함께한다. 그는 그대로 헤카톤케일에게 날아들어서 그 머리 중 하나에 주먹을 꽃아 넣었다.

그러자 빛무리가 그의 팔 쪽으로 자연스레 모여들더니, 나선으로 회전하며 타격과 동시에 함께 터진다.

푸칵! 그 위력은 경천동지! 명중한 머리 하나가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내부 폭발이 일어나며 놈의 몸에 수 미터 반경의 구멍이 뚫린다.

그러나 놈의 몸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상처도 아니다. 게다가 놈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놈은 대신 몸에 달린 수백의 얼굴에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우어어어어어어어어….”

우우우웅…. 음파가 사방으로 퍼지며 몸이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천후는 자기 몸에 두른 검은 화염이 흩어지려는 것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디버픈가?”

라즈베리 때 한 번 겪어본 적이 있었다. 이게 계속 유지되면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하아아아아아압!”

채채채채채챙! 놈의 지상을 향해있는 꼬리 쪽에서부터 머리 위쪽으로 달려올라오는 푸른 선이 보였다. 그것이 한 번 은색 선을 터트릴 때마다, 놈의 몸에 다리처럼 돋아있는 검들이 죄다 잘리거나, 부러지거나, 손에서 튕겨 나간다.

그렇게 놈의 등에 칼 한 자루 없는 무주공산을 만들어낸 그녀, 이강호는 그대로 맨 위까지 올라온 이후 발로 차 뛰어오르며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러자…놀랍게도 그녀가 뛰어 올라왔던 헤카톤케일의 등이 쩍 갈라져 버렸다. 완전히 헤카톤케일을 반 동강 내버린 건 아니지만, 그대로 좌우로 잡고 찢으면 그대로 찢길 것 같은 정도가 된 것이다.

“패트릭!”

“오케이, 버디! 흐압!”

그 광경을 지켜보던 패트릭은 그대로 풀 캐스팅을 쏟아부었다. 이미 커다란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날아온 A 랭크의 풀 캐스팅에 놈은 그대로 지상에 내다 꽂히며 수많은 얼굴에서 비명을 내질렀다.

그 순간 그들의 뒤를 따랐던 보호조의 공격이 지상에 때려 박힌다. 그와 동시에 미미르의 보고가 마법사의 텔레파시를 거쳐서 들어왔다.

<해카톤케일 소멸 확인. 다음 대상은 북북서 방면 3.2km 거리에 있습니다.>

“좋아! 순조롭군!”

이 지옥에서도 일리미네이터들은 활약하고 있었다. 멸급 디제스터는 10체나 있었지만 모두 함께 힘을 합치지 않고 위치를 사수하고 있어 상대하기 더욱 편했다. 미미르는 이들이 위치를 이탈하면 악시스 문디의 재래식 공격 무시가 풀려버릴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건 인간 측에게는 대단한 희소식이었다. 지금 이 그림은 그들이 예상하고 있던 최상의 상황에 가까웠다. 이대로 조금만 더 밀어붙일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했지만, 패트릭은 곧 일이 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쿠우우우우우우…….

낮은 저음의 공명음과 함께, 악시스 문디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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