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318화 (318/324)

318화

<대치>

“크르르르….”

“케에에에에엑….”

땅이 흔들리고, 대기가 떨린다.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 세계수가 깨어나자, 지금까지 일리미네이터들을 공격하던 모든 디제스터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것은 일리미네이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은은한 빛을 하늘 저 끝까지 내뿜는 신이 직접 빗어낸 생명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고정되고 말았다.

그건 침투조로서 악시스 문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던 천후 일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그는 그 누구보다도 이변을 민감하게 포착하고서 소리치고 있었다.

“안 돼! 이건…. 패트릭! 지금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서 후방에 합류해요! 그리고 진형을 새로 짜야 합니다! 이대로는!”

“응? 갑자기 무슨 소린가?”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어서…!”

그의 말이 다하기도 전에, 악시스 문디 줄기 한가운데에서 태양처럼 타오르는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백열. 신역의 빛. 신의 힘을 상징하는 그 빛을 바라보며 천후는 소리치며 일리미네이터들을 물렸다. 갑작스런 그의 태도에 공격대장들은 당황했지만, 지금 이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건 결국 영천후다.

그의 판단을 믿은 그들은 일리미네이터의 진형을 재편성했다. 그리고 그것이 끝날 즈음에.

빛에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너무나 밝은 빛 안에 몸을 두고 있어,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선글라스를 쓴 레이나드마저.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모를 리 없었다.

신의 대자. 이 별의 진정한 적자이자, 인류를 멸하고 그 자리를 유일하게 홀로 대신 차지할 세상에 난 현인신!

그런 그의 음성이. 세상을 뒤덮었다.

“인간들이여. 시험받으라.”

나지막함에도 뭄바이 전체에 울려 퍼진 그의 목소리와 함께.

그를 감싸고 있던 빛이 시야를 감쌌다.

“헉!”

“으아아아악!”

저것이 공격이라면 피할 길이 없다! 온갖 괴물들 앞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했던 두 공격대장조차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그것은 그저 섬광이었을 뿐, 그들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무엇이 바뀌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정태원 공격대장. 천후와 강호양이 사라졌네. Type-A와 함께 사라져버렸어!”

“뭐라고요?”

“그들뿐만이 아닙니다! 라, 라즈베리와 이그네스까지 사라졌어요!”

그 말에 태원은 눈을 치켜떴다. 갑자기 사라진 그들이 생사여부만 해도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벌어질 더 큰 문제가 눈앞에 있었다.

쿵. 쿵.

지면을 울리며, 지금껏 굳어있던 디제스터들이 다시금 일리미네이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파, 경급 디제스터와 8체의 멸급 디제스터 전부가….

“돌아버리겠군.”

지옥이 이곳에 있었다.

*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녀, 이강호가 본 광경은 자신의 본가 안뜰이었다.

“허.”

바로 직전까지 괴물들 틈바구니에서 끝도 없이 싸우고 있었는데 이런 광경이라니? 그녀는 곧장 이것이 가짜로 만들어진 광경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알 뿐이다.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알 수가 없었다. 혀를 찬 그녀는 그러다 주변을 좀 더 자세히 돌아보았다.

안뜰에는 언제나처럼 그녀의 조부가 고용한 잡부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청소를 하는 이들도 있었고, 창고를 정리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강호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무시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몸이 환상이라도 되는 양, 부딪혀도 통과할 뿐이다.

정겨운 광경. 하지만 그녀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런 곳에서 낭비할 시간이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어른. 나오셨습니까?”

“그래.”

주인어른. 하인들이 그녀의 조부를 부를 때 쓰는 말이었다. 이전 일 이후 그를 만나본 적은 없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안채에서 나오고 있는 것은 그녀의 조부가 아니었다.

키는 170 후반에, 푸른 색의 도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얼굴은 계란처럼 갸르스름해 곱상인 그는 양 허리춤에 두 자루의 검을 차고 있었다.

그를 본 강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나?”

상대는 이강호를 완전히 빼다 박아 있었다. 남성 한복으로도 다 숨길 수 없는 굴곡 있는 몸매부터, 그 몸에서 느껴지는 기도까지.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그녀의 머리칼이 짧게 잘려있다는 점이었다.

단발머리를 한 그녀는 무심한 눈으로 하인들을 지시하고 있었다. 강호는 무심코 그 광경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하인 중 한 명이 그에게 말을 붙였다.

“전 주인어른이 돌아가셨을 땐 어떻게 되나 했는데. 도련님께서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네. 가문의 뒤를 잇는 것은 내 꿈이었으니까.”

그가 내놓은 말에 강호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조부가 돌아가셨다고?”

놀랐던 그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출가외인이 되었다지만, 조부가 실제로 세상을 떴다면 연락 한 번 정도는 왔으리라. 이것은 환각. 만약을 가정한 환각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이 환각이 무엇을 보이고자 하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조부의 뜻에 맞게 자란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는 이 가문을 조부가 운영하던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잘 통솔하고 있었다. 내팽개치고 나온 자신과는 달리, 그의 기대에 완전히 응해 자기 몸에 체화하고 있었다.

과거 자신도 바랬던 모습.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그의 모습에 눈이 갔다. 그리고….

“출가외인이 어인 일이지?”

“…!”

그 환각이 말을 걸어왔다. 짧은 머리의 그녀는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 눈엔 경멸이 가득했다.

“처연할 정도군. 완전히 여자가 다 되었구나, 이강호. 그 어릴 적부터 지켜왔던 모습은 터럭도 남지 않았어.”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그녀를 인식하지 못했던 하인들이 갑자기 주변을 둘러싸더니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어른의 기대를 배신하고서 떠나다니.’

‘이제 후계 하나 없으니 가문은 끝이구나.’

‘어찌 살아야 할꼬.’

그 소리에 강호는 저항했다.

“그게 어떻다는 거냐? 썩 물러가라, 환각아!”

이런 것에 사로잡힐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곧장 난정을 뽑아들고는 힘을 집중했다. 여느 때처럼 자신의 특성이 이런 삿된 기운을 흩어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환각…아니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똑같은 검. 난정을 뽑으며 마주 섰다.

“어리석은 것. 조부께서 정말로 너에게서 모든 것을 베게 하려 하셨겠느냐? 네 사랑만 포기하였다면. 그 마지막 일만 성공했다면 너는 그분의 기대에 응할 수 있었을 텐데. 너는 그저 제사랑 찾아서 모든 걸 헌신짝처럼 버렸지. 조부와 가문과 지금까지 노력해왔던 것 전부를!”

“아, 아니야! 나는!”

“닥쳐라!”

번뜩! 검이 사전 동작 없이 그녀에게 덮쳐왔다. 흠칫 놀란 강호는 그것을 간신히 피해냈지만, 완전치 못해 볼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보통이 아니다.’

검을 들고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이런 상대는 평생 만나본 적이 없다. 긴장감을 드높인 그녀는 난정을 바로 쥐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것을 본 상대는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너에겐 벌을 내릴 사람이 없었지. 이제 내가 그 역할을 하겠다. 이강호. 너 자신인 바로 이 내가.”

뒤따른 것은 은빛의 섬광이었다.

*

라즈베리는 끔찍한 광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시체의 산이었다. ‘그녀’라고 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지금까지 폐기한 아이들의 시체가 쌓인 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 이 산이 더 높아질 일은 없었다.

이미. 희생할 만큼 했기 때문이다.

결과가 나왔다.

“어때. 라즈베리. 대단하지?”

녹색의 오오라에 둘러싸인 소녀였다. 그녀는 사람조차 아닌 기계 인형을 끌어안은 채 그 볼에 입을 맞추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라즈베리가 눈을 둔 곳은 그쪽이 아니었다.

“아…….”

시체 산 사방에는 수십, 수백 대의 모니터가 떠 있었는데, 거기에는 온 세상의 사람들이 비치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 ‘결과’를 통해 만들어진 아이들이 그들을 위해 마법을 쓰는 모습이었다.

그 모든 통제는 이 눈앞의 소녀. 레졔나가 하고 있었다.

자신이 사부를 만나지 못했다면, 엘모세와트의 계획이 분쇄되지 않았다면 일어났을 일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걸로 모든 사람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어. 파파의 뜻을 이뤘다고, 라즈베리.”

“…….”

라즈베리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 웃음은 낯설기 짝이 없다.

또 다른 자신. 융합하기 전의 레졔나조차 이렇게 희생당하는 아이들을 보고서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냉정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결국엔 그걸 이겨내지 못하고 라즈베리와 융합한 게 아닌가?

그녀는 결코 타인의 불행을 보고서 즐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눈앞의 레졔나는 달랐다.

그녀는 말하자면 ‘기계 인격 루스트 그윈들링이 바랬던 레졔나’였다. 인간 아닌 그의 염원처럼, 인간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나아갈 수 있는 존재.

눈앞의 레졔나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난…그런 것. 단 한 번도 바란 적 없어.”

“꺄하하하하!”

라즈베리의 말에 레졔나는 기계 인형을 끌어안고 한참을 웃다가 말했다.

“하지만 너는 방관했어. 눈앞에서 아이들이 통조림 하나 먹지 못해서 죽어가더라도 눈을 감았지. 그래 놓고서 너와 내가 다른 존재라고 말할 셈?”

“…….”

라즈베리의 어깨가 떨렸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에, 자신의 무력함에 짓눌려 이 범죄를 방조하던 때가 그녀에게도 있었다. 그렇지만 바로 그렇기에.

“더는…그러고 싶지 않았어.”

“흐응. 비겁하긴.”

혀를 찬 레졔나는 기계 인형에게서 떨어졌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초록색 오오라가 크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파파의 뜻도 배신하고, 그동안 이뤄낸 모든 성과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고서 자기는 말짱하게 잘 살겠다니. 너무 치사한 거 아냐? 그러고서 잘도 히어로를 바라네.”

“아….”

“나는 널 용서할 수 없어. 파파를 배신한 죗값을 치러, 라즈베리. 마침…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들이 저쪽에 누워 있잖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줄게.”

“!”

녹색의 거검이 그녀의 손끝에서 치솟아 올랐다.

*

모든 것이 물에 잠겨있었다. 인간이 이뤄낸 문명의 흔적은 이제 고층 건물 일부만이 잔해처럼 남아있을 뿐이었다.

사람이 살아있기나 할까? 만약 살아있다면, 이후 얼마나 더 살아갈 수 있을까?

지구의 주인이 더는 인간이 아니게 된 세상에 이그네스가 있었다.

“…….”

그 원인은 쉽사리 찾아볼 수 있었다. 하늘 위에…태양이 두 개 떠 있었다.

하나는 본래의 태양. 그것은 저 우주 저편에서 빛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것보다 크다. 아니, 실제 크기는 태양보다 클 리가 없었다. 크기 자체는 훨씬 작지만, 지표면에 훨씬 가까이 떠 있는 또 하나의 화염이 하늘 위에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보는 순간 저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건….”

화염의 정령이 아름다운 아리아를 자아내고 있었다. 모든 인간이 사멸한 이 세상을 애도하는 것처럼.

그 노래에 이끌려 이그네스는 정령에게 접근했다. 그것은 그녀보다도 훨씬 큰 성인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불꽃에 휩싸여있지만, 기본 신장차이는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녀는 다가온 그녀에게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아리아를 자아내며, 양팔을 벌려 세상을 가리킬 뿐이다.

마치 이것이 그녀가 가져왔어야 했을 말로라는 것처럼. 혹은….

“언제 이렇게 될지 모른다는 거냐?”

영천후에게서 신의 대자가 빠져나가며, 리미터는 신의 대자에게로 옮겨가 있었다.

상대가 세계의 멸망을 바라는 존재이니, 마음만 먹는다면 그 제한을 얼마든지 풀어버릴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되면…그녀가 불러일으킬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이그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는 그런 모습이 되지 않을 거다. 평생을 어린아이의 몸으로 지내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깔끔하게 죽어버리리라. 이 광경을 보았으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염정은 순간 빙그레…비웃음을 지었다.

“아―――――――”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이, 아리아를 내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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