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영웅 아닌 자 없나니>
성층권까지 뻗은 세계수 앞에서는 아비규환이 펼쳐지고 있었다.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한 디제스터들이 하늘 위를 나는 인간을 시시각각 위협한다.
<펜닐. 하울링.>
“방벽!”
<늦습니다. 정신 방벽 처리율 82%.>
늑대 울음소리가 황무지 위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사방에 흩어져있던 인간들을 공포에 질려서 몸을 떨었다. 그렇게 잠시 경직이 걸린 이들을 곧바로 괴물들의 표적이 되었다.
“정신 차려!”
그렇게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을 간신히 구해내 보지만, 모든 이들이 그런 도움의 손길을 받지는 못했다. 상황을 보고하는 염파가 들려왔다.
<인원손실 283명. 공격대 편성에 결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상황 지시를.>
“젠장……!”
지금 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이런 손실이란 말인가? 태원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침투조와 이그네스, 라즈베리가 사라진 이후, 그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사라진 이들의 가치가 너무 높았다.
영천후는 말할 것도 없고, 라즈베리와 이그네스 역시 버스터 팀을 구성하는 핵심 멤버였다. 이들이 없어지자 멸급 디제스터를 견제할 수단이 너무 적어졌다.
저격수 둘이 사라지자, 멸급 디제스터들은 더욱 마음을 놓고 주변의 일리미네이터들에게 공격을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투입된 마법사의 총수는 1만 명이 넘었다. 이건 정말 지구의 모든 전력을 쥐어짜냈다고 할 만한 수였다. 하지만…그래도 부족하다.
지금 여기에서 눈에 보이는 파급 디제스터만 해도 천을 넘어선다. 경급도 수십 마리에, 멸급은 아직 8마리나 남아서 날뛰고 있었다.
멸급 디제스터는 영천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여력이 되면 그 한 마리 잡자고 수백 명이 투입되던 괴물이었던 걸 생각해보면 이것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멸급 디제스터 중 하나가 포효 한 번 내질렀다고 사람이 수백 명씩 죽어 나간다. 태원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목표는 무조건 멸급 디제스터! 그 외에는 최대한 무시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멸급 디제스터는 최초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그놈들 모두 하나씩은 원거리를 공격할 수단쯤은 가지고 있어서…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위협이었지만, 8마리가 전부 한자리에 모여서 공격해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천운이라 칭할만했다.
그러나 그 천운을 살리는 것조차도 힘이 들었다. 여기서 계속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다. 이것이 태원의 판단이었다.
경급 이하의 디제스터는 어차피 이것들이 얼마든지 더 불러낼 수 있는 녀석들이다. 그렇다면…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전멸당하기 전에, 놈들을 죽인다!
“젠장…! 버스터, 발사!”
사람의 피가 시간과 빈틈을 만든다. 그 피로 이루어진 결과물을 놓칠 순 없었다. 태원은 뜯어먹히는 마법사들을 보면서도 구조가 아니라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전체 위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 버스터 팀의 공격이 유그드라실 쪽에서 내리꽂힌다. 다행히도 수백 미터가 넘던 늑대 형상의 멸급 디제스터는 그 일격으로 소멸했다.
그런 놈들이 아직도 일곱이나 더 남아, 다시 제각기 빛을 끌어모으고 있었지만 말이다.
“전원 예상 경로에서 회피!!!!”
명령과 함께 그 빛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
그 광경을 천후는 이를 악물고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공간은 물리적으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야말로 신의 대자가 어머니의 재가를 받아서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싸움을 계속하는 대신 항의할 뿐이었다.
“8체는 너무 많잖아? 저걸 어떻게 극복하란 거지?”
그러나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는 엄중히 선고한다.
“극복하지 못한다면 끝일뿐이다. 어차피 종말을 맞이해야 했다. 인간은. 저들이 저항하는 데 쓰고 있는 힘조차 본래는 인간에게 주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
“원망하려면 랑크 메이거스. 그 남자를 원망해라. 그가 세상에 마법사를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어머니의 진노가 이렇게 크진 않았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인류는 이미 천 년 전에 멸절했겠지.”
“그것이 올바른 방향이었다.”
올바른 방향. 천후는 그 말에 분노했다. 분명 별의 화신이나, 그녀의 적자인 이 남자에게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살고 싶어 발버둥 치는 상대에게 네가 죽어야 옳은 일이라 말하는 것은 듣는 입장에선 얼마나 얄미운 일인가?
천후의 눈빛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읽었는지, 남자는 먼저 입을 열었다.
“물론 인간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시련이란 늘 극복할 수 있는 형태로 오는 것만은 아니지.”
오히려 시련이란 극복할 수 없어 보이기에 시련이다. 바로 지금처럼….
시간이 흐른다. 바닥에 비치는 화면에선 사람들의 시체로 피의 강이 흐르기 시작했다. 디제스터들은 인간의 시체를 먹지조차 않고, 죽인 이후 다시 공격할 대상을 찾는다.
마법사들은 그런 디제스터를 피해가면서 어떻게든 멸급 디제스터에 접근해 싸우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그 모습들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남자는 조용히 말했다.
“오히려 인간의 힘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네가 아니냐?”
“뭐라고?”
“내가 보기엔…어떻게든 해낼 수 있어 보이는군. 너와 함께 온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말과 동시에 이번엔 천후와 함께 이 이공간에 빠져 들어온 다른 이들의 모습이 사방에 비치고 있었다.
이강호는 또 다른 자신의 검을 날려 보내고 그 목을 겨누고 있었다. 둘의 실력엔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었을 텐데도, 그녀는 치고받는 도중에 수세를 연기하여 상대를 방심시킨 이후 단번에 치고 들어가 한 판을 따냈다.
“나는 나의 삶을 살 거다. 후회 따윈 없다. 아마 너도…다시 머리를 길러보게 된다면 알 거다.”
그 말을 마쳤을 때, 그녀는 천후와 신의 대자가 있는 공간에 나타나 있었다.
라즈베리는 텔레포트와 디버프를 반복하여 레졔나에게 부하를 극대화시켰다. 결국 그것을 버텨내지 못한 례제나는 한 수 위의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링크가 무너져 주저앉아버렸다.
라즈베리는 그런 례제나에게 말했다.
“좀 더 좋은 세상이 올 거야. 그렇게 빨리 이루려 안달하지 않아도…사람은 점점 더 발전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갈 거야. 안녕. 과거의 나.”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앞엔 영천후의 등이 보였다.
이그네스는 결국 화염 정령의 힘을 최대까지 끌어내 버렸다. 발아래 대양이 끓어오를 지경이 되어서야 힘의 방출을 멈춘 그녀는 이제 인간으로 돌아와 탈진해버렸다. 그런 그녀를 끌어안은 이그네스는 조용히 읊조렸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세상을 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너 역시 그렇겠지…. 비록 환영이라 한들, 가엽구나. 쉬거라.”
그 말이 끝났을 때, 그녀가 있는 곳은 더는 물의 행성이 아니었다.
“윽…. 여긴….”
암흑에 둘러싸인 곳에 도착한 그녀들은 신의 대자를 발견하고는 싸울 준비를 했다. 하지만 천후는 손을 뻗어서 그들을 멈춰 세웠다.
“그만둬. 지금 여기서 아무리 힘을 빼도 저 녀석을 어쩔 순 없어. 결국 여긴 환상 속과도 같은 곳이니까.”
“그런…! 그렇지만!”
놀란 그녀들의 눈에도 같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게 보였다. 핵심 멤버를 잃은 마법사들이 승리를,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모습들이.
초 단위로 사람이 죽어 나간다. 그럼에도 그들은 멸급 디제스터만 노려서 끝장내기 위해서 아등바등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저기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분명 이동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론 영천후 곁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상태였다. 그제야 그들은 이곳이 인지의 영역을 초월해있는 공간임을 알았다.
결론이 날 때까지는 이곳에 묶여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놀랍군….”
그리고 그 결론이 점점 다가올수록. 신의 적자는 경탄하고 있었다.
멸급 디제스터의 수가…줄어간다. 1만의 생명을 탄환 삼아, 그들은 착실하게 그 수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지금 저 뭄바이 안에는 던전화가 되어있는 것도 아니었다. 도망가려면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는 환경. 그렇지만 그들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고서 덤벼오고 있었다.
그 희생 하나하나가 그의 눈에 박힌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진정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듯이….
“대단하구나. 과연 사지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진정한 전사들이라고 칭할 만하다.”
칭찬의 말을 입에서 낸 신의 대자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렇다면…나도 마지막 준비를 해야겠군. 친구.”
그 순간, 다시 한 번 섬광이 일었다.
*
“저놈이 마지막이다…!”
그들이 마주한 마지막 멸급 디제스터는 몸은 수백 미터의 거대한 거인이었지만, 머리에는 수십 마리의 뱀이 자라있는 괴물이었다. 놈은 모든 입에서 불과 독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때때로 근처의 디제스터를 잡아 던져 일리미네이터의 진형을 뭉개버리고 있었다.
태원의 머릿속으로 염파가 울려 퍼졌다.
<현재 전력 보고. 투입 총원 1만 427명. 사망자 3,154명. 리타이어 1,266명. 중상자 752명. 현 전투 가용인원 5,255명.>
끔찍한 상황이었다. 완전히 디제스터 군세 안에서 싸우다 보니 부상자보다 사망자가 더 많은 처참한 상황. 이중 부상자들이 전선에서 제대로 빠져나올 수 있을지는 태원이나 레이나드 역시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다.
“버스터 마력 상태는?”
<현재 고갈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현장에 투입된 마법사들은 말 그대로…목숨을 총알로 내다 던졌다. 멸급 디제스터를 끝장낸 건 대부분 버스터, 노블레스 클럽과 유그드라실 S 랭크 마법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조차 마력이 다해간다.
그리고 그것은 끝을 의미했다.
“…마무리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트라이, 시작.”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괴물들에게 쫓기던 모든 일리미네이터들이 방향을 바꿔서 거인에게 날아들었다.
놈은 옆에 있던 뱀 형태의 디제스터를 그대로 움켜쥐더니 채찍처럼 휘두르며 그들을 떨궈냈다. 한 번 스칠 때마다 사람의 몸이 퍽퍽 터져나갔다.
아무도 저 괴물 앞에서 버텨낼 수 없다. 주문을 외울 틈도 없었다. 지금 상대하고 있는 건 저것 하나 뿐도 아니고, 마법사들 모두 지속된 전투에 마력을 많이 소모한 상태. 날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태원의 지시에 따라 시선을 끌기 위한 몇몇 팀의 공격이 날아간다. 그 시선을 끈 대가는 죽음이다.
사방이 죽음으로 만연하다. 이제 싸우는 사람들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새어있었다. 모든 감각이 날아가고, 오로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모든 것을 던진다.
그 결과….
푸화아아아악!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빛줄기에 휩쓸린 마지막 멸급 디제스터, ‘티폰’의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미미르의 보고가 들려왔다.
<악시스 문디와 디제스터들에게서 재래식 병기 면역능력이 제거되었음을 확인.>
“해냈다…! 모두 대피! 현장의 모든 인원은 대피! 버스터! 전 마력 전개! 길을 열어요!”
태원이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그의 지령을 이해한 고 랭크 마법사들은 최후의 마력을 짜내서 길을 냈다. 티폰을 상대하느라 완전히 디제스터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일리미네이터들은 그 마력포가 지나가 공백이 생긴 틈을 타고서 현장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엑!”
디제스터들은 잠시 주춤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신들의 본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인간들을 추격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의 추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제 시작이다….”
태원의 시선은 이제 디제스터가 아니라 하늘을 향해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 하늘 저편에서 수많은 꼬리에 연기를 문 것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태원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다 쓸려버려라, 이 빌어먹을 것들아!!!!”
그 일갈과 함께, 악시스 문디의 본체가 있던 곳에―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