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결판>
병기가 쓸고 간 황무지 위에는 디제스터의 시체만이 가득하다. 재생력마저도 우습게 보이게끔 하는 화력의 폭풍이 그들을 살점 조각으로 만들어, 대지에는 피의 강이 흐른다.
그 황무지의 중앙에는 인류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들인 결과 기울어져 버린 세계수가 있다. 그러나 기울어졌다 하더라도 하늘까지 닿은 그 세계수는 백열 하며 지금이 세상이 끝장날 시기라 알리고 있었다.
그 앞에 두 남자가 있다.
하나는 그 종말을 알리는 세계수의 진정한 주인. 저 신이 낳은 피조물조차도 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진정한 대자.
그에게선 아무런 힘의 흔적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그는 현인신. 그 존재 자체가 ‘힘’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이것에 항거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단 말인가? 당해낼 수 없다. 이것은 필연이었다.
허나.
필연에 저항하는 인간은 그 앞에 서서 홍염을 두르고 있었다.
마치 세계수의 거대함에 맞서고자 하늘 끝까지 적홍의 기둥을 세운 그의 눈에선 의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간의 의지. 곧 삶의 의지. 욕망이 체현되어 머문 의지!
그것을 마주 본 신의 대자는 흡족히 웃으며 고한다.
“와라!”
“하아아아아아!”
번…뜩!
비치는 것은 섬광! 일어나는 것은 광풍!
황무지를 뒤덮고 있던 시체 더미들이 순식간에 둘 주변에서 완전히 쓸려나가며, 악시스 문디 앞에서 용권풍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 자리에서 두 남자가 주먹을 겨룬 그 한 동작 때문이었다.
“크…!”
“으윽…!”
둘의 얼굴엔 서로의 주먹이 꽂혀있었다. 신의 대자 쪽은 완전히 머리가 날아갔다. 영천후 쪽 역시 코 아래가 완전히 날아갔다.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둘 다 자세를 다시 잡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가까운 거리. 이미 거리를 벌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똑같은 판단에 서로의 왼 주먹이 숏 어퍼의 궤적으로 그리며 날아온다. 전광석화 같은 동작.
푸확!
다시 한 번 피와 살점이 하늘을 난다. 더는 버티지 못한 둘은 뒤로 물러나면서도 서로에게 옆차기를 날렸다.
“지긋지긋한 놈!”
“내가 할 말이다!”
어느새 머리가 원상 복구된 신의 대자가 외친 일갈에, 턱이 간신히 재생된 영천후 역시 소리쳤다.
별의 적자가 빠져나간 뒤, 영천후에겐 이제 주특기의 의미가 없게 되었다. 덕분에 스펠 세이브 슬롯 운영에도 여유가 생겼는데, 천후는 남는 부분을 전부 다 회복으로 때려 박은 상태였다.
그를 지켜주던 검은 세 자매는 빠져나갔고, 재생력은 남아있었지만, 여전히 한정적이다. 이제 그를 급사로 지켜줄 수단은 거의 다 사라진 것이다.
그 와중에서…이 눈앞의 신의 대자는 매우 어려운 적이었다. 특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똑같이 해낼 수 있단 점에서.
선호하는 방식이 똑같다는 점에서도 말이다.
치지지지직! 천후의 몸에서 백색의 빛이 광륜이 되어서 그의 오른손에 머물렀다. 신의 대자 역시 상대해주겠다는 듯이, 그 손끝에 힘을 집중시켰다.
그리고…충돌!
방금 악시스 문디를 휩쓸어버렸던 버섯구름만큼이나 강렬한 폭발이 황무지에서 다시 한 번 일어났다. 땅이 흔들리고, 기상조차도 폭발에 영향받아 떨린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땅에서부터 하늘 위로.
용권의 형상을 그리며 두 인영이 맞붙는다. 치솟아 오른 흙먼지의 기둥의 벽면을 타고서 꽈리를 틀듯이 오르며 맞부딪히면, 그때마다 폭발음과 함께 빛이 하늘을 수놓는다.
“하하하하! 제법이구나! 영천후! 역시 나와 11년이나 한 몸에서 지낸 사이다워! 그 안에서는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나?”
아래서 그를 붉은 신위의 빛이 그를 쫓아 올라왔다. 어느 때는 몸에 두른 채. 또 어떤 때는 빛기둥을 발출해서!
몸에 두른 빛은 맞받는다. 이 접근속도는 아무리 그라도 떨쳐낼 수 없다. 발출하는 붉은빛은 피해내면 그때마다 하늘을 갈라 지구 밖으로 빠져나갔다.
신의 대자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다. 암흑 공간에서 싸웠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하다.
이것이 그와 싸우는 것에 익숙해져서인지, 아니면 기량을 숨기고 있었던 것인지 몰라도……과연 자신의 마지막 적으로, 인류를 마지막으로 지탱하던 남자로 부족함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나는 지지 않는다!”
남자의 몸에서 광풍이 뿜어져 나온다. 치솟아오르던 버섯구름이 단숨에 흩어지며, 그의 짧게 깎은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나부낀다. 순간, 영천후는 한 가지 예감을 받고는 공격을 거두고 팔을 교차했다.
하늘에 선 하나가 그어졌다. 빛도 없이, 그저 무언가가 대각선으로 내리꽂혔다.
그 선은 신의 대자요, 그것에 격중당한 이는 영천후였다.
“컥…!”
방어를 취하고 있었음에도 두 팔이 부러지고, 보호받고 있던 갈비뼈와 장기들이 파손된다. 즉시 치료마법이 발동되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이미 신의 대자가 이렇게 눈앞에 있지 않은가?
퍽! 퍼퍼퍼퍼퍽! 푸콱!
최초의 일격에 경직된 사이에 그를 가죽 부대처럼 두드린 그는 그대로 다리를 들어 그가 막고 있는 양팔 위를 찍어버렸다. 그것만으로 영천후의 양팔이 팔뚝부터 잘려나가고, 1만 피트 이상 높이에 있던 천후는 벼락처럼 땅으로 쏘아져 버렸다.
지면이 떨리고, 지진파가 퍼진다. 그 충격으로 악시스 문디의 본체마저 흔들릴 정도로 강렬한 흔들림.
그것이 가져온 결과를 신의 대자는 하늘에 서서 고고하게 내려보았다.
“으…아…!”
황무지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 구멍 한가운데에 처박힌 영천후는 이미 사람 꼴이 아니었다. 똑같이 초월적인 힘에 보호받고 있었음에도, 그는 거의 사람이 아니라 고깃덩어리 같은 꼴이 되어서 널브러져 있었다.
지각을 꿰뚫고 맨틀까지 파고들어 가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깊은 구덩이 안에서 천후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빌어먹을…….”
역량을 숨기고 있었던 건 저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서로 모든 걸 드러낸 지금, 누가 더 많이 숨기고 있었느냐가 명백하게 드러났다.
공격력, 방어력, 회복력. 어느 부분에서도 우위를 점하는 구석이 없다. 당장 천후는 힘이 많이 소모되었다.
물론 신의 대자 역시 소모되긴 했다. 영천후가 신위 상태에서 날리는 공격 하나하나가 그의 본질 그 자체를 해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본래 가지고 있는 맷집의 차이가 너무 크다.
누구는 마법을 써서야 회복을 할 수 있는데, 저쪽은 재생력을 가지고 있으니 소모 싸움에서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대로는 그야말로 스스로 말한 대로 1초 만이라도 더 버티려고 발악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걸론 안 돼.’
알고 있었던 사실. 천후는 쓴웃음을 지으며 구덩이에서 쏘아져 나왔다. 그가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신의 대자가 고한다.
“그럼 발버둥은 이걸로 끝이냐?”
“후….”
방금까지만 해도 싸움에 경도되어 웃고 있던 남자는 이제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끝낼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서, 그것을 행할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천후는 착잡해졌다. 차라리 이놈이 비열한 놈이라면 좀 더 분노를 강하게 부딪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놈은 내 몸을 빌어 아버지를 죽였고, 지금 이 자리에서 수많은 일리미네이터를 살해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놈의 사명. 존재 이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선 무엇이든 하는 신의 자식이니, 그것을 탓한들. 논쟁을 한들 의미가 없다. 오히려 자신과 함께 한 덕에 인간의 감정을 어느 정도 가지게 되었기에 놈은 인간을 자기 딴엔 ‘배려’하고 있었다.
지금…이 자리에서 그와 싸워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그렇기에 어떤 비난도 통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저 사명과 사명의 충돌일 뿐. 그렇다면…그 승패를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나는…살고 싶다. 모두가 그래. 그 절실함에서는, 절대 너에게 지지 않아.”
“…….”
휘몰아치던 바람이 잦아들고, 잠시 잔잔히 지나친다. 둘 사이로 흙먼지가 스쳐 지나갔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과연. 그것만은 이길 수 없겠지.”
신의 대자는 인정한다. 삶의 열망을 꺾을 순 없다. 그것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한 죽을 때까지 가져가는 천형. 그 어떤 공포와 위엄을 보여주더라도 벗겨낼 수 없는 칼. 형틀이었다.
그 형틀 진 인간이 말한다.
“그러니…나는 그 절실함으로 너와 싸우겠다. 비록―”
순간. 그가 발하던 홍적의 빛이 점점 줄어들었다.
아니, 줄어드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모여들고 있었다. 점점 모여든 그 빛이 그의 몸에서 수렴된다. 그의 주변을 돌고 있던 빛무리는 그의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휘돌며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신의 대자의 눈이 커졌다.
“아니?”
“비록 그 결과―내가 다시는 인간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된다 할지라도…! 신…위!”
파지지직! 휘돌던 빛무리가 한꺼번에 터지며, 순간적으로 그의 몸에 둘러싼 홍염을 격발시켰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홍염에서 완전히 백열로 변화했다.
완전한 신위.
과거 최완이 인간의 몸으로 한 번 체현한 바 있었던 것과 똑같은 현상이었다. 다만 십 년 이상 신의 대자와 함께 몸을 썼었던 영천후는 사실상 신에 대단히 가까운 존재. 한 번 이 형상을 자의로 발휘하기 시작했다간….
“인간이기를 포기할 생각이냐!”
“아니. 나는 여전히 인간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어떤 모습이 되어도 인간이다!”
“어리석은….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거다. 그 빛이 꺼진 순간 너의 혼은 부서지고, 육체는 완전히 노화하여 그 순간 죽어버릴 거란 말이다. 네 아비의 유언조차 어길 셈이냐?”
그의 말에 천후는 슬프게 웃었다.
“내 행복은…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을 때나 이룰 수 있는 거야. 그러니 나는 그들과 그들이 있을 세상을 구하겠다! 비록 그 결과…그 세상에 내가 남지 못하더라도! 승부다! 신의 대자여!”
순간, 황무지에서 빛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그것은 몇 분 전 악시스 문디가 스스로 발한 빛과도 너무나도 닮은 빛.
우오오오오오….
그것을 마주한 세계수에서…희미한 빛과 함께 울림이 퍼졌다. 그것은 울음소리와도 같았지만…한편으로는 떠는 것과 같은 울림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떠는 것이었다. 자신을 진정으로 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를 마주 보았을 때, 누구나 한 번씩은 느끼는 두려움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것을 세상에 낳은 자 역시 그 모습을 앞에 두고서는 떨고 있었다.
“그런가…. 그렇게 마음먹었는가….”
그러나 그 떨림은 세계수와는 다르다. 고개를 숙였던 남자의 눈을 다시 들어 올렸을 때는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순간, 다시 한 번 광풍이 몰아치며 세상이 뒤흔들린다.
“좋다! 나의 오랜 벗이여! 그렇다면 여기서 끝을 보자! 이 승부의 결과가 너희 인간의 존망을 결정지으리라!”
하늘을 가리고 있던 구름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무지 위 하늘에는 이제 대기의 떨림조차 멎었다.
무색무위의 신과
백색신위의 인간이 마주한다.
영원과도 같은 한순간.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의 몸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순간. 찰나라고 불러도 될 시간.
결과가 있고 나서 현상이 뒤에 찾아온다. 하늘 위에 선 하나가 그어지며, 둘이 충돌했을 거라 예측되는 지점에서부터 폭발이 일어났다.
북반구 위를 가득 채우는 섬광! 정면으로 바라보지조차 못할 빛이 하늘 위에 터지며, 대기 조성이 엉망으로 망가진다.
다시금 하늘 위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처음 보인 것은 중심핵 위가 완전히 사라진 악시스 문디가 보였다. 가장 가까이에서 두 신인이 부린 조화에 휩쓸리자, 세계수조차 버티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둘은 위치가 뒤바뀐 채 지상에 내려와 있었다.
“컥……!”
먼저 쓰러진 것은 섬광을 두른 인간 쪽이었다. 그의 몸에서 빛이 위태로이 꺼질 듯 점멸한다. 그렇게 켜고 꺼질 때마다 그의 인간으로서의 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등 돌리고 있던 신이 고했다.
“훌륭…하다. 영천후. 이것이……. 네가 모든 것을 걸어서 이끌어낸 힘…….”
바로 선 그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붉은색. 인간과 같은 색의 피를 흘린 그는 웃음 지으며…그렇게 뒤로 쓰러졌다.
우오오오오오……………….
황무지 위로…악시스 문디의 울음소리만이 처연히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