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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323화 (323/324)

323화

<그리고 미래로>

세계수가 울었다. 자신을 세상에 낸 신의 생명이 끊어져 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빛을 두른 인간이 쓰러진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를 올려본 신의 대자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이 싸움. 너의 승리다. 하지만…통제할 수 없구나. 나를 잃은 악시스 문디가 폭주해서 자체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뭐…라고?”

천후는 놀라서 고개를 들어 올려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이미 줄기의 절반 이상이 날아간 악시스 문디는 과연 백색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내가 너의 몸에 임하여 있을 때도 악시스 문디는 존재했듯, 저것은 내가 사라진다 해도 없어지지 않을 모양이다. 아니…이제 나의 신격이 떨어졌으니, 어머니가 내린 사명은 저것이 이어받은 건가. 인간의 감성 없는 괴물이…내 힘을 집어삼키고서….”

“!”

“어머니…. 인간은 시련을 극복하였거늘, 어째서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것은 인간에겐 너무나 버겁습니다. 너무나도….”

신의 대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움직임을 멎었다. 그리고 바로 그와 동시에…그의 몸이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하더니, 악시스 문디 쪽으로 날아갔다.

“무슨…!”

그의 몸이 날아간 곳은 신의 대자가 임했던 중심핵이 있는 곳의 중앙. 절반이 끊어져 나간 세계수의 꼭대기였다.

악시스 문디는 날아온 그의 몸을 향해 나무줄기들을 내뻗더니 곧 그를 완전히 감싸서 흡수했다. 그렇게 신의 대자는 악시스 문디의 정상에 머리와 상반신만을 내민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아…….”

게다가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천후가 주변을 돌아보니, 사방에 흩뿌려져 있던 디제스터의 사체들. 그것들이 빠르게 분해되기 시작했다. 흩뿌려져 있던 살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뼈마저도 천천히 땅으로 녹아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분해된 사체가 가지고 있던 힘은…고스란히 황무지 중앙의 악시스 문디에게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걸 본 천후는 아연실색했다. 놈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이미 신의 대자에 필적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천후는 그제야 절망을 느꼈다.

정말이지 모든 걸 걸었다. 세계 전역에 흩어져있던 일리미네이터를 한자리에 모아서 쏟아 붓고, 인간이 한날한시에 퍼부을 수 있는 최대 화력을 끌어오고, 자신은 이제 남은 생명까지 모두 점화시켜서 싸웠다.

그런데…그런데도 안 된단 말인가? 그런데도 뒤가 남았단 말인가?

지금 이 형상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숨을 거두리라. 그렇게 되면….

“아무도 저것을 막을 수 없겠지.”

신의 대자와 마찬가지로 저것 역시 신역에 닿은 인간이 아니면 건드릴 수조차 없는 생명체였다. 인간이 저것을 이겨낼 방법은 이제 거의 없었다.

그 절망감에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떨었다. 그러나 놈은 그렇게 힘겨워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우오오오오오오오…………!

신의 대자를 품은 악시스 문디는 마치 분노한 것처럼 울림을 퍼트렸다. 그와 동시에 뭄바이 전역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면에 올라서 있었던 천후는 재빨리 하늘로 날아오른 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

악시스 문디의 몸체가 떨리며, 뿌리가 튀어 올라오고 있었다. 백색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 악시스 문디가 천천히 하늘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원래 가지가 뻗어있던 높이까지 닿으려는 듯, 놈은 ‘비행’을 시작했다. 그 뿌리들은 꿈틀거리면서 자신이 갈취할 생명 있는 존재를 찾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우오오오오오오오…………!

울림소리와 함께 어떤 감각이 스쳐 지나간다. 놈이 발하는 ‘힘’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천후는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넓어지고 있다…!”

놈이 다루는 문명 붕괴의 영역이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진 뭄바이 인근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젠 몇 초 지나지도 않았음에도 아라비아 해를 완전히 집어삼킬 기세다.

이 속도라면 이제 몇 분 지나지도 않아서 세계 전체를 삼켜버리리라. 그리고 그렇게 되면…. 돌도끼 하나 들 수 없게 될 인간에게 남는 것은 멸종뿐이리라.

“빌어먹을…!”

저것을 자신이 끝장낼 수 있을까? 천후는 회의감을 느꼈다. 신의 대자와의 싸움은 그를 크게 소모시켰다. 마지막 힘을 다 끌어낸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포기하지 마세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없는 목소리.

천후는 그 주인을 알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편 테인강 너머. 수km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였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이미 신의 대자와 싸울 때부터 느껴졌던 그 기운의 정체였으니까….

“희주 씨….”

멀리서, 흑발의 여성이 웃고 있었다.

*

영천후의 싸움은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인간이 끼어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닌 싸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도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들에게 할 일을 부여한 것은 홍희주였다.

“지금 이곳에 있는 분들은 모두 마법사…. 그렇다면 해낼 수 있을 겁니다. 부디 의식을 집중하고…생각해주세요. 살고 싶다고.”

“무슨…뜻입니까?”

태원이 물었지만, 희주는 그에게 답변하는 대신 라즈베리에게 말했다.

“라즈베리. 당신은 ‘중계’를 해주세요. 지금 레졔나 시리즈 링크는 저를 중심으로 이미 활성화되어있으니까, 당신이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네? 아…. 정말이다. 이게 무슨….”

되묻던 라즈베리는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다. 바로 그녀에게 연결되어있는 ‘인간’의 총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아…. 이, 이건…. 희주 언니!”

활성화된 레졔나 시리즈 링크에 접속한 라즈베리는 눈을 치켜떴다. 그녀의 몸에서…온갖 상념이 느껴졌다. 그저 근접하는 것만으로도 의식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거대한 의지의 소용돌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영역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네. 라즈베리.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저는 이제 ‘인류’ 그 자체가 되어 신을 치는 검이 될 겁니다. 도와주세요.”

그 말에 라즈베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라즈베리도 들었다. 홍희주가 어떤 존재인지.

신인. 현인신인 영천후를 살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날 때부터 신역에 닿도록 창조된 인간.

말하자면 그것은 레졔나 링크, 인류 통합 사념체의 완성본이었다. 최대 출력으로 따지자면, 인간 전체의 의식. 아카식 스트림을 완전히 이끌어와 이 세상에 영적으로 현신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걸 현신시키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몸, 홍희주의 몸이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안돼요, 언니. 그랬다간…언니는 죽어요! 반드시! 영혼이 사라질 거라고요!”

육체는 남으리라. 하지만 그뿐이다. 뇌는 있지만, 전기적으로 반응하는 생체기관만 남고, 그 뇌에 임해야 할 영혼은 거대한 인간의식의 집약을 이겨내지 못하고 쓸려나가리라. 그것을 홍희주는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희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라즈베리. 그리고…이미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이미 그녀의 몸에는 수억 인구의 정신 그 자체라 할 만한 것들이 깃들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악시스 문디가 날아오른 순간부터…. 여기서 그만둔다고 해도 희주가 무사할 수는 없었다.

“이미 프리니를 비롯해서 세계 각지의 네츄럴 소스 분들의 중계를 받고 있어요. 하지만 라즈베리, 당신이 가장 확실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마법사분들의 의식을 토대로 증폭을 하기에는.”

“…….”

그 말에 라즈베리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그 서슬에 강호와 다른 이들이 다가와 사정을 물었다. 그리고 설명을 들은 그들은 아연했다.

마법사는 보통 사람들보다 신에 접한 정도가 높은 이들. 그들의 집단의식이 통제된다면 좀 더 많은 사람의 의식을 수월하게 홍희주에게 집중시킬 수 있다. 이론적으론 맞지만, 그건 그녀를 좀 더 확실하게 세상에서 없애버리는 방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망설이는 동안에도…악시스 문디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문명 붕괴의 영역은 확장된다. 인류의 멸망은 이제 분초를 다퉜다.

“제길…. 제길…!”

그들은 모두 울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유도에 따랐다.

의식을 가라앉히고 집단 무의식의 영역에 들어가자 살고 싶다. 멸망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역시 그 일부가 된다. 그때마다 그녀의 몸에서 영적인 힘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그런 그녀의 앞에, 빛이 된 천후가 내려앉았다.

“희주 씨!”

“…….”

그녀는 빛이 된 천후에게 스스럼없이 안겼다. 위험해야 옳았지만, 이미 신을 치는 검에 가까워진 그녀는 신위에 닿아도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끌어안으며 서로를 원한다. 입을 맞추고, 서로를 끌어안으며 갈구했다. 천후가 말했다.

“미안해…. 결국 지켜내지 못했어.”

“아닙니다. 당신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어요. 이렇게…지금도 제 옆에 와계신걸요.”

“너까지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

“세상 모든 사람이 맞이한 재앙입니다. 저라고 예외가 될 순 없었어요.”

빛 사이로 눈물이 흐른다. 그것은 금세 증발했지만, 그래도 여자가 흘리는 눈물은 남는다.

둘은 누구랄 것 없이 서로의 손을 깍지 끼고는 하늘 위로 솟아오르고 있는 악시스 문디를 향해 겨눴다.

여자가 묻는다.

“해낼 수 있을까요?”

“그럴 거야.”

“불안해요. 무섭습니다. 이겨내지 못할 것이. 이겨낸 후…. 당신을 만나지 못할 것이.”

“만날 수 있어. 분명. 그곳이 여기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의 의미를 안다. 이렇게 모든 힘을 쏟아내고 죽어버린다면, 둘의 영혼은 이제 파편조각이 되어서 가이아의 품으로 돌아가리라. 그렇다면 언젠가 다시 세상에 나리라. 그것이 다시 영혼이 되어 생명이 되는데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네. 그때가 되면…저는 당신을 다시 사랑할 거예요, 천후 씨.”

“나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너를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희주야.”

그녀의 왼손 약지에 반지가 빛났다. 그 손을 움켜쥔 천후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마지막으로 그녀와 의식을 동화시켰다.

세상에 임한 마지막 현인신이 인간과 섞인다. 신인융합! 그것이 방아쇠가 되어 그녀의 몸에서도 백열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모든 유그드라실 마법사에게도! 일리미네이터에게서도!

침몰당한 군함에서 뛰쳐나온 병사들도,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인도 시내의 모든 사람들.

지구 전체의 모든 인간의 몸이 빛난다!

그 빛이 하늘 전체로 치솟아 올라…… 그와 그녀의 몸에 임한다!

빛의 화신, 인간이라는 종의 현신 그 자체가 된 둘은. 그렇게 서로를 안은 채 악시스 문디를 향해 외친다!

“인간을 멸하려 하는 세계수여! 지금 여기서 잠들라!”

인류의 검날이 세계수를 향해 날았다.

지면에서부터 솟아오른 빛이 나무를 향해 날아간다. 신의 나무는 그것을 보고서 포효한다. 같은 빛을 흘리며 그것을 이겨내려 애쓴다.

검은 그 발버둥을 뚫지 못했다. 검날이 중심핵 코앞에서 멈춰서 더 전진하지 못한다. 아주 약간의 힘이 부족했다. 정말 미세한…아주 약간의 물리력, 영력. 어느 쪽만 있더라도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이!

그것을 채워준 것은…인간이 아니었다.

<천후. 작별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인간을 흉내 내었지만 인간 아닌 것의 염이 들려왔다. 모든 문명이기가 틀어 막힌 이때. 마법사의 텔레파시조차 인류 의식에 동조하느라 쓸 수 없는 그때에. 직접 울려 퍼진 이 염의 주인을 둘은 알 수 있었다.

“미미르?”

<지난 11년간, 당신의 삶을 보아왔습니다. 그건 희생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내 안에서 고통받는 당신을 보는 저는 너무나도 ‘슬펐습니다.’ 이제 그 희생의 마지막 때군요. 함께 하겠습니다. 부디, 이걸로 당신이 바라는 세상이 찾아올 수 있기를.>

그것으로 염파는 끊어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성층권에서…구체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반경 300m의 거대 구조물이, 악시스 문디 바로 위에!

모든 힘을 인류의 검에 쏟고 있던 악시스 문디는 그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인류의 마지막 힘이 터져나온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빛이 있었다.

환한 빛 너머.

한 명의 소년이 보였다.

검은 머리를 길게, 길게 기른 소년. 여자아이라고 생각할 만했지만, 어째선지 천후는 그가 소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게….

어릴 적 자신을 똑 닮았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소년

11년 전. 눈앞에서 양친의 죽음에 눈물 흘렸던 소년은 오늘 웃고 있었다.

웃으며.

“잘 있어, 친구. 지금까지 미안했어. 말하는 게 늦었지만, 행복하게 살아라.”

마지막 말을 건넸다.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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