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3)화 (3/159)

3

“뭐라고요?”

캘리는 얼어붙었다. 하지만 마가렛 부인은 시간이 없다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곧 내려가야 돼. 어서 옷을 갈아입어.”

“하지만, 결혼식은 내일이잖아요.”

캘리는 거의 공포에 질렸다.

“공작이 지금 당장 결혼식을 치르겠다고 했대. 백작님도 허락하셨고.”

마가렛 부인이 캘리의 머리색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색을 바꿔놨으니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어. 어서 드레스를 입어. 당장!”

마가렛이 가버리자 방문을 닫은 캘리는 황당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역시, 그렇지.”

상자 뒤에 숨어 있던 쉴라가 걸어 나오며 혀를 찬다.

“네 계획은 언제나 이 모양이야. 이제 어쩔 거야?”

캘리는 인상을 썼다. 하지만 빠르게 긍정적으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난 이미 필요한 것들을 다 준비해 놨어.”

“이봐. 캘리. 진짜 그 엉성한 계획을 실행할 생각이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냥 도망치자.”

“안 돼. 병사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어서 도망칠 수도 없지만, 설사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잡히는 건 시간문제야. 게다가 우리 둘이선 소르테까지 가는 그 멀고 험한 길을 갈 수가 없다고.”

“검은 늑대한테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보단 그 편이 낫지. 우선 내일 아침까지 살아남아야 할 것 아냐. 그 후의 일은 그 후에 생각하자고.”

“하루쯤 더 산다고 뭐가 달라져? 어차피 죽을 거라면 확률이 더 높은 쪽에 기대를 거는 게 나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검은 늑대를 속이는 게 확률이 더 높다고?”

“그래. 난 치밀한 계획을 세웠어.”

“오, 맙소사. 캘리. 네 계획은 한 번도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잖아.”

“그건 운이 나빴을 뿐이야.”

“지금도 네 운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은데? 상대는 워렌 공작이야. 네가 속이려는 상대는 검은 늑대라고. 디콘스 제일의 전쟁광이고 포악한 늑대인간, 지옥의 사자라고 불리는 워렌 공작이라고!”

“그건 사람들의 공포심이 만들어낸 명칭들일 뿐이야. 워렌 공작도 결국 사람이라고.”

“아니, 공작은 일반적인 사람과 달라. 거의 오우거만큼이나 거대하고 잔인하대. 포악하고 끔찍해. 너처럼 작은 인간 따윈 한주먹 거리도 안 될 거야. 그런 남자의 밑에 깔린다고 생각해 봐.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해?”

캘리의 눈이 커졌다.

“내가 그 남자의 밑에 왜 깔리는데?”

“멍청이. 당연히 결혼을 했으니까 초야를 치를 테고, 남자가 여자의 몸 위로 올라가는 게 순리지.”

“남자가 여자의 몸 위로 올라간다고?”

“그래. 결혼식을 완성하는 마지막 의식이야. 나도 하녀들이 하는 소릴 들었어. 그 이상한 하녀들은 남자가 위에서 누르면 누를수록 즐거워하고, 깔린 여자도 좋아한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어쨌든, 너도 그렇게 깔린다는 건 확실해.”

캘리는 뜻밖의 충격적인 정보에 몸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하녀들은 백작 딸이 검은 늑대의 밑에 깔린다면 끔찍하게 눌려서 죽을 거라고 하더라. 비명 소리도 낼 수 없을 만큼 눌려서 숨이 막히고 내장이 터져서 죽을 거래.”

“왜…… 왜? 갓 결혼한 신부를 왜 위에서 누르는데?”

“나도 모르지. 그런 걸, 새한테 물으면 어떡해?”

캘리는 거대한 남자에게 깔려 죽는 자신을 떠올려 보았다. 세상에. 그보다 더 비참한 죽음은 없으리라.

그녀는 고개를 돌려 침대 옆에 있는 상자를 보았다. 그 안에는 계획했던 일들을 실현시킬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차가운 단검.

최후의 수단으로 준비해 둔 그것을 쓸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내가 깔려 죽는다면?

그때는 그거라도 써야 하리라. 아니,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도 만약 일이 잘못되면…….

“쉴라.”

캘리는 음산한 목소리로 친구를 불렀다.

“왜?”

새가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대기하고 있어.”

“뭐?”

“일이 잘못되면, 우린 오늘 밤에 이곳을 떠날 거야.”

살아 있다면 말이다.

***

결혼식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식이 치러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캘리는 리넨이 겹겹이 둘러져서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베일을 쓴 채 얼굴 한번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옆에 서 있는 거대한 남자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는 공포, 그 자체였다. 차라리 그를 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

엄청난 몸집만큼이나 사납게 생겼을 게 뻔한 얼굴을 봤다가 쓰러지기라도 했다면……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캘리는 자신의 방에 있는 것보다 훨씬 크고 깨끗한 거울을 보았다. 얇은 리넨 잠옷 위로 달빛을 받은 몸의 실루엣이 드러나 있었다.

‘슈미즈는요?’

‘그런 건 필요 없어.’

‘잠옷만 입고 있으라고요?’

‘그것도 예의상 입고 있는 것뿐이야. 공작이 오면 그것도 벗어야 할 테니까.’

마가렛의 말을 들었을 때, 너무 끔찍했다. 잠옷을 벗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그 커다란 남자의 아래에 깔려 죽을 걸 생각하니…….

캘리는 황급히 테이블로 걸어갔다. 미리 준비해 뒀던 주머니를 열고 안에 있는 가루를 술병 안에 탈탈, 남김없이 털어 넣었다.

“이걸로 될까?”

걱정이 된다. 마을 끝자락에 사는 약초꾼의 말에 의하면 성인 남자 둘을 재울 수 있는 양이라고 했다. 하지만 공작은 키도 크고 덩치도 크다.

약효가 즉시 나와야 하는데.

아, 이럴 땐 쉴라한테 물어봐야 되는데. 그 이기적인 새는 결혼식이 시작할 때부터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캘리는 혹시 몰라서 하나 더 사온 주머니를 다시 술병 안에 털어 넣고 열심히 흔들었다.

이 정도면 오우거도 잠재울 수 있을 양일 거야.

“됐어. 그럼 이제…….”

캘리의 시선이 커다란 침대로 향했다.

백작의 딸이 사용하던 침대.

저기까지 가면…… 난 죽는다. 절대 저기로 눕혀지는 일만은 막아야 해.

쿵!

캘리는 화들짝 놀라서 소리가 난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벌컥, 문이 열렸다.

캘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문을 가득 채운 남자가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캘리는 얼어붙었다. 커다란 방을 단숨에 좁은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남자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빌어먹을.

검은 늑대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거대했다.

*

정보가 틀렸다.

라이칸은 창가에 서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오웬이 처음으로 잘못된 정보를 전했다는 걸 깨달았다.

‘꼬챙이처럼 마른 몸매에 예쁘진 않은 얼굴이라고 합니다.’

오웬의 말과 달리 여자는 꽤 예뻤다. 몸도 전혀 마른 축에 속하지 않았다.

아니, 마른 건가? 전체적으로는 말랐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얇은 드레스 위로 솟은 가슴살과 동그란 엉덩이는 결코 꼬챙이라고 할 수 없었다.

방 안에 켜져 있는 어스름한 촛불 탓일지도 모른다. 어른거리는 불빛 탓에 실체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건지도…….

그때였다. 갑자기 창문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구름이 걷히고 온전히 드러난 달이 환하게 보였다.

순간, 라이칸의 짙은 눈썹이 움찔했다.

잘못 본 게 아니다. 달빛이 작정하고 비추고 있는 여자는…… 확실히 아름다웠다.

하얀 피부, 작지만 오뚝한 콧날. 붉은 입술.

그리고 눈은…… 끝이 살짝 위로 올려진 고양이 눈을 연상케 했다.

가느다란 목선과 둥근 어깨. 풍만해 보이는 가슴과 날씬한 허리. 그리고 동그란 엉덩이와 늘씬한 다리까지.

여자는 자신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 모르는 듯했다. 몸을 가린 얇은 잠옷을 달빛이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는 걸.

여자는 그를 보고 겁에 질려 있었다.

뭐, 상관없다. 여자들뿐만 아니라 웬만한 사람들은 다 저런 반응이니까.

라이칸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서 벽에 세웠다. 그리고 여자를 보았다.

꼼짝도 않고 서 있는 여자를 다시 훑었다. 순간, 단전 아래에서 불끈, 뭔가가 솟구친다.

피가 중심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어 억누르기 힘든 불꽃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미적거릴 이유 따윈 없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먹음직스러운 만찬을 즐기면 된다.

라이칸은 튜닉을 벗어서 휙, 의자 위로 던졌다. 입고 있던 셔츠도 단숨에 벗어버리고 바지 끈을 잡고 당기던 그때였다.

“술!”

갑자기 터져 나온 목소리에 라이칸은 고개를 들었다.

핏기 하나 없이 서 있던 여자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억지로 침을 삼키는지, 하얀 목이 살짝 움직인다.

라이칸은 여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심호흡을 한 여자가 한 걸음 다가오는 게 보였다.

한 걸음 더. 마치, 죽을 각오를 한 듯 의연한 모습이다.

“술을…… 시드르(과일주)를 준비했습니다.”

여자의 시선이 탁자로 향했다. 라이칸의 눈도 그쪽으로 따라갔다. 길쭉한 주전자와 잔 두 개, 탐스럽게 보이는 포도가 놓여 있었다.

여자가 빠르게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주전자를 들어서 쪼르르, 술을 잔에 따르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여자가 다시 심호흡을 하더니 잔을 가지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라이칸은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은색 잔을 내려다보았다.

“드세요.”

슬쩍 눈을 내리깐 여자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람이 상대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가 있다. 상대를 두려워하거나, 뭔가를 숨기고 있거나.

‘백작 딸에게 정혼자가 있었답니다. 이웃 영지에 사는 남작의 아들인데, 엘리샤 아가씨가 어릴 때,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답니다. 물론, 집안끼리 구두로 약속한 거였죠. 게다가 남작의 아들은 아직 견습 기사 신분이라 멀리 떨어진 친척 집에 머무는 중이고요. 그런데 제가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백작 딸의 결혼 소식을 듣고 이쪽으로 오고 있답니다. 아마, 내일쯤 도착할 것 같은데…… 젊은 혈기에 결혼식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니면, 둘이 손을 잡고 도망을 칠 수도 있지.

오웬이 알아온 정보가 모두 틀린 게 아니라면 이 여자는 지금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다.

라이칸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잔을 든 손도 목소리만큼이나 떨고 있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굳어 있고, 눈은……

그래. 이 커다랗고 아름다운 고양이 눈은 간절해 보였다.

내게 술을 먹이는 게 아주 중요한 일인 거지.

라이칸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 잔을 잡았다. 여자의 얼굴에 안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설핏,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보란 듯이 잔을 가지고 입으로 가져가자 여자의 눈이 초롱초롱 빛이 난다.

거짓말이 서툴다.

너무 훤히 드러나는 여자의 얼굴을 보자 엉뚱하게도 다시 열기가 오른다.

정복욕은 사내의 타고난 본성이라더니.

다른 남자를 원하는 이 여자를 짓밟고 소유하고픈 욕구가 강력하게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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