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23)화 (23/159)

23

“다행히 물은 넉넉한데 식량이 별로 없습니다. 마을이 성했으면 음식을 구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말린 고기만 드셔야겠습니다.”

“알았다. 놔두고 나가.”

“예.”

제프리가 다시 나가고 라이칸이 구석에 놓여 있는 테이블을 가지고 왔다. 그 위에 음식과 물을 놓고 그녀를 보았다.

“먹어.”

캘리는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아요. 생각 없어요.”

“생각 없어도 먹어. 내일은 일찍부터 계속 달려야 할 테니까.”

“알았어요. 하지만 좀 있다가 먹을게요.”

캘리는 가만히 그를 보았다. 그 눈빛의 의미는 뻔했다. 라이칸이 미간을 찌푸린다.

“내가 나가길 바라는군.”

캘리는 시선을 깔며 마주 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저는 좀 쉬고 싶어요. 기사들과 달리 여행에 익숙한 몸이 아니라서 몹시 피곤합니다.”

“내가 있으면 못 쉬나?”

캘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인상을 쓰고 있는 그를 보았다. 다시 결심이 굳어진다.

“지난번, 마을에서 말한 것처럼, 여행 동안엔…….”

“만지지 마라?”

그녀가 망설이자 그가 대신 말했다. 눈빛이 차가웠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가 한 발 다가섰다. 캘리는 흠칫, 놀라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보폭은 그녀의 보폭보다 훨씬 넓었다. 단박에 코앞으로 다가온 그가 험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난 그대의 남편이고, 남편이 원할 땐 언제든 부인을 만질 수 있어. 그게 부인의 도리이기도 하고.”

캘리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럼, 부인은 싫어도 싫다는 말도 못 해요?”

“그래. 그건 부인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니까.”

“어째서 그게 기본 의무예요? 아무리 부부 사이에 남편이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곤 하지만 그건 부당해요. 부인도 엄연히 싫고 좋음이 있는데, 무조건 잠자리를 강요하는 건…….”

“강요?”

그가 입술을 비틀며 툭, 내뱉었다. 험악한 얼굴에 서늘한 눈빛까지 더해서 살벌한 기운까지 내뿜고 있었다. 캘리는 지고 싶지 않았다.

이건 내가 그를 속인 문제를 떠나서, 여자로서의 자존심 문제였다.

“그래요. 싫다는데 억지로 취하면 강요죠. 못난 사내들이 싫다는 여자를 강제로 취하는 것과 뭐가 달라요?”

“내가 지금껏 널 강제로 취했다고?”

“처음엔 그랬잖아요. 싫다는 날 올라타고…….”

말하다 보니, 너무 나갔다 싶었다. 첫날밤의 의무를 다한 그를 탓할 순 없는 건데……. 만약, 진짜 백작의 딸과 결혼을 했다면, 지금 이런 신경전도 없었을 거고.

캘리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난 쉬고 싶어요.”

“이봐.”

캘리는 고집스럽게 눈을 내리깐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머리 위에서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게 느껴졌다. 슬슬 겁이 난다.

정말로 그가 홧김에라도 날 안으려고 하면 어쩌지? 그럼 난 끝까지 거부할 수 있을까?

자신 없다. 그의 손길에 반응하지 않을 자신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겨우 서 있는데 갑자기 그가 몸을 홱 돌려서 걸어간다.

캘리는 고개를 들고 라이칸이 거친 발걸음으로 방을 나가는 것을 보았다.

휘청. 그가 사라지자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간신히 탁자를 짚고 중심을 잡은 캘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나, 정말 못됐다. 죄는 내가 지어놓고 애먼 사람한테 화풀이나 하고.

그렇다고 다른 수도 없고. 제발 빨리, 소르테에 도착하면 좋겠어.

***

쿵쾅, 쿵쾅.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홀을 가득 울렸다. 밑에서 잠자리를 만들고 있던 기사들이 전부 계단을 내려오는 칸을 흘깃거린다. 와이엇도 눕다가 벌떡 일어나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전쟁 났어?”

“전쟁은 전쟁이죠.”

지나가던 제프리가 중얼거리자 와이엇이 고개를 돌렸다.

“왜?”

“모르십니까? 두 분이 전쟁 중인 거.”

“두 분? 아, 칸과 부인?”

“예.”

와이엇은 입을 쩝, 다셨다.

“거참. 오래 가시네. 벌써 며칠째야.”

“그러게 말입니다. 사이가 좋으셨다가 갑자기 왜 저러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다 그런 법이야. 결혼 초에는 기선을 서로 먼저 잡으려다가 싸우는 일이 다반사지.”

“기선을 제압해요?”

“그래.”

“하지만, 원래 남편들이 기선을 잡고 시작하는 게 결혼 아닌가요?”

“뭐, 대부분은 그런데, 또 안 그런 경우도 많아. 부부 사이의 일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거든.”

“복잡하네요.”

돌아서던 제프리는 홀을 가로지르는 칸을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와이엇!”

라이칸의 목소리가 홀을 쩌렁 울렸다.

“예!”

와이엇이 재빨리 뛰어갔다.

“마을을 둘러봐야겠어. 오웬은 여길 지켜.”

차갑게 명령한 라이칸이 밖으로 나가버리자 와이엇도 내려놓았던 검을 낚아채서 얼른 뒤쫓아 갔다.

오웬은 홀에 잠자리를 만들고 있던 기사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한가하게 잠이나 잘 땐가? 1조는 밖으로 나가 탑 주변을 경계하고, 2조는 탑 내부를 살펴. 서둘러!”

***

우당탕.

갑자기 탑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리고 보초를 서던 기사가 뛰어들었다.

“공격입니다!”

벌떡 일어선 오웬이 황급히 물었다.

“어떤 놈이야?”

“들개처럼 보이는데 몸집이 더 큽니다. 떼로 몰려오는데, 그 수가 어마어마합니다!”

밖에서 비명 소리가 울리더니 기사 하나가 피를 흘리며 뛰어 들어와 쓰러졌다. 오웬은 검을 빼 들며 소리쳤다.

“탑 안으로 들어오게 해선 안 된다! 모두 나가서 놈들을 죽여라!”

기사들이 뛰쳐나가자 오웬도 검을 빼 들고 제프리를 항해 명령했다.

“넌, 안에서 부인을 지켜!”

“넌 공작이 안 무서워?”

쉴라가 묻자 캘리는 이불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무서워.”

“근데 왜 그렇게 막 나가? 죄는 지가 지었으면서.”

캘리는 인상을 팍, 쓰며 쉴라를 돌아보았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물러서 줘야지.”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이…….”

꽃을 줬어. 나를 걱정해 주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봐. 그 눈빛이 점점 깊어지는 것 같아.

그건 부부가 의무적으로 하는 잠자리와는 다른 문제야.

캘리는 쉴라에게 그 모든 걸 설명할 수가 없었다.

공작이 내게 마음을 줄까 봐 무섭다고 하면 쉴라는 분명히 비웃을 것이다.

쉴라는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그러니까 이런 건 의논할 수가 없어.

캘리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너무 정이 드는 건 안 좋은 것 같아. 거리를 두면…….”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캘리는 재빨리 창문을 향해 뛰었다.

“맙소사. 저게 뭐야?”

뒤따라온 쉴라가 어두운 성안을 가득 메운 짐승들을 보고 겁먹은 소리를 낸다.

캘리도 마찬가지였다.

“들갠가?”

이렇게 많은 수의 들개는 처음 봤다. 전에 마을에 나타나 습격했던 들개도 많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들개는 두 배, 아니 세 배는 돼 보였다.

그에 비해서 기사들은 겨우 스무 명 안쪽.

파앗, 팟!

기사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캘리는 뒤로 돌아 방문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밑에서 제프리가 소리를 질렀다.

“부인. 내려오지 마십시오!”

창문에 들개들이 대가리를 들이밀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창문을 깨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캘리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창밖을 보았다.

“수가 너무 많아.”

기사들이 밀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놈들에게 물려 쓰러지는 기사도 있었다.

와이엇이 괴성을 지르며 놈들을 베어내고 있었다. 그래도…… 끊임없이 달려드는 들개들을 다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캘리는 다시 방을 뛰쳐나갔다.

아까 다른 방을 지나올 때, 봤던 활. 그게 필요하다. 지금 당장.

캘리는 활을 잡고 창가로 갔다.

“활 쏘려고? 백작의 딸이 활을 쏜다고 하면 의심받을 거야.”

쉴라가 말했지만 캘리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일단 살고 봐야지. 다 같이 죽으면 속고 속이는 게 무슨 소용이야?”

소르테에도 갈 수 없는데.

캘리는 목표물을 향해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피잉,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가 들개의 목을 명중했다.

다시 활을 꺼내서 당겼다. 몇 번이고, 계속해서 쏘았다. 들개들이 푹푹,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헉,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문 앞에서 놀란 얼굴을 한 제프리가 보였다.

캘리는 곧바로 소리쳤다.

“제프리. 화살을 더 찾아와요. 빨리요!”

오웬은 또다시 화살이 날아와 들개의 몸에 꽂히는 것을 보았다. 화살은 단 한 번도 빗맞지 않았다. 날아오는 족족, 들개를 맞히고 쓰러트렸다.

보통 솜씨가 아니다.

오웬은 머리 위로 덮쳐오는 들개를 베어내고 고개를 올렸다.

이 층. 창문 안쪽에서 이쪽을 향하고 있는 화살.

저 방엔 단 한 명밖에 없다.

“젠장. 수가 너무 많아!”

와이엇이 소리를 질렀다. 오웬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놈들이 끊임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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