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25)화 (25/159)

25

캘리는 갑자기 던져진 줄을 잡아야 했다.

이건 생명줄이었다!

공작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캘리는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면…… 의심할 것이다.

칸.

갑자기 문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라이칸이 재빨리 활과 화살을 나무 탁자 뒤에 숨기는 게 보였다. 캘리의 표정이 멍해졌다.

왜……?

노크 소리 한 번과 함께 벌컥, 문이 열리고 와이엇이 나타났다. 그 뒤에 제프리도.

“괜찮으십니까?”

라이칸이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아.”

“부인도 다친 곳은 없습니까?”

캘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다행입니다.”

그리고 와이엇이 라이칸을 향했다.

“활을 쏜 사람은 찾았습니까?”

캘리는 마주 잡은 손을 비틀었다.

“제프리야.”

라이칸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캘리는 그대로 굳었다.

와이엇의 뒤에 서 있던 제프리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와이엇이 쳐다보자 제프리는 얼른 놀란 표정을 풀고 앞을 응시했다.

“네가 활을 쐈다고?”

정면을 곧게 응시하고 있던 제프리는 라이칸과 캘리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예. 제가…….”

“네가 그렇게 활을 잘 쏜다고?”

와이엇이 다시 묻자 제프리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예…… 제가 좀 쏘죠.”

“아니, 언제 그렇게 활 연습을 했어? 난 네가 활을 쏘는 연습 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몰래 연습했습니다.”

“왜?”

“그야…… 그냥요. 대수롭지 않은 솜씨를 남에게 보이는 것도 민망해서…….”

“대수롭지 않아? 아까 그 화살은 날아오는 족족 명중했고, 들개의 숨통을 끊었어. 내가 볼 땐,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고. 내 뒤로 달려드는 놈들도 몇 번이나 맞혀 쓰러트렸는데……. 뭐야? 그럼, 네가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란 말이냐?”

제프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뭐, 은인까지야…….”

“은인이지. 하, 기가 막히네. 진짜 놀라워.”

와이엇은 진짜 믿는 것 같았다. 제프리가 캘리를 슬쩍 보더니 와이엇에게 얼른 말했다.

“그만 내려가시죠. 부인도 쉬셔야죠.”

“어? 그래. 그러자. 근데, 이놈, 이거 물건일세. 너, 언제부터 그렇게 활 연습을 했는지 말해봐.”

“예, 예. 알겠습니다. 다 말씀드릴 테니 우선 나가자고요.”

제프리가 와이엇을 거의 끌다시피 하며 데리고 나갔다.

캘리는 아직 안도할 수 없었다. 심호흡을 한 후,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활을 왜…….”

숨겼어요?

그가 그녀를 말없이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저…….”

“부인이 활 쏘는 것에 대해서 기사들이 굳이 알 필요는 없지.”

뭐?

“괜히 이상한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무슨 생각?

“그만 쉬어.”

툭, 내뱉은 그가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간다. 캘리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라이칸.”

우뚝, 멈춰 선 그가 돌아본다. 캘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였다. 그러다가.

“미안해요.”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그냥…… 거짓말해서…….”

“활을 쏠 줄 안다고 미리 말을 안 한 건, 거짓말이 아니지.”

“그……렇죠.”

“도리어 내가 고마워해야겠지.”

건조한 목소리가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모르겠다. 정말. 이 남자의 생각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

성에서 며칠을 더 묵어야 했다.

라이칸은 근처 성으로 전령을 보내서 들개의 습격을 알렸고, 치료사와 병사들을 요청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남작이 호의를 베풀어 마을의 재건을 약속해 주었고 부상 입은 기사들도 치료해 주었다.

그동안 마차의 바퀴는 새것으로 갈고 음식도 챙겼다.

말들에게 건초를 먹이고 충분하게 쉴 수 있게 하고 검과 무기도 재정비했다. 기사들은 일사불란했고 그 모두를 지휘하는 라이칸도 바빴다.

그래서 캘리는 그를 거의 보지 못했다. 밤에도 그는 방을 찾지 않았다.

캘리는 불안했지만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았다.

봐도, 못 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건 같았으니까.

캘리는 제프리로부터 공작이 아르 왕에게도 전령을 보냈다는 소리를 들었다. 불쑥불쑥 사람들을 위협하는 들개 떼들의 조사를 청한 것이다.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고 나서야, 그들은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일정이 늦어진 만큼 더 빨리 달려야 한다며 아침 일찍 출발을 서둘러서 말을 달리던 토르 기사단이 다시 멈춘 건, 해가 지기 직전의 늦은 오후였다.

“제프리. 불 피워.”

테드 경의 커다란 목소리가 계곡을 쩌렁 울리자 캘리는 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캠프를 만들고 있는 게 보였다. 몇몇은 계곡 안으로 들어가 창을 들고 물속을 신중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좋아. 오늘 식사는 물고기겠군.”

그녀의 뒤에서 밖을 내다보던 쉴라가 침을 꿀꺽, 삼키며 흥분한 목소리를 냈다.

캘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네 입맛에 맞는 음식이네.”

“저 둔한 작자들이 물고기를 낚을 순 있겠지?”

쉴라가 불안한 듯 중얼거리자 캘리는 물건들을 챙기며 대꾸했다.

“토르 기사단은 둔하지 않아.”

쉴라가 콧방귀를 뀌었다.

“체인메일(사슬 갑옷)을 입고 설치는 작자들은 다 둔해.”

“둔하다면 그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을 리가 없잖아.”

“상대도 둔하니까 그렇지. 둔한 인간들끼리 싸우니까. 거기에 갑옷 안 입고 몸을 더 가볍게 한 군대가 뛰어들면 곧바로 다섯 개의 왕국을 통일해 버릴걸?”

“난 그 의견엔 동의 못 해. 갑옷을 입지 않으면 날아오는 화살과 검을 어떻게 막아?”

“멍청이. 갑옷 입었다고 화살과 검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수없이 죽어나간 병사들은 갑옷을 안 입었었나?”

“내 말은, 다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막아준다는 뜻이야.”

“너, 요즘 내 말에 토를 많이 단다? 변했어.”

할 말 없으니까 엉뚱한 소리를 하는 쉴라를 보며 캘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어. 그만하자.”

“그 타르포르에 물린 후부터인 것 같아. 그 독이 분명히 너한테 어떤 영향을 미친 게 확실해.”

더 이상 대꾸하고 싶지 않은 캘리는 마차 밖으로 나왔다. 계곡의 물소리가 웅장하게 울렸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았다.

다만, 좀 추운 게 문제다.

몸을 살짝 떨던 캘리는 나뭇가지를 쌓고 있는 제프리를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갔다.

불을 붙일 준비가 다 된 제프리가 부싯돌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이 쉽게 붙지가 않는다. 부싯돌을 부딪칠 때마다 불똥이 튀긴 했지만 약했다.

“젖어서 그래요.”

캘리가 말하며 옆에 앉자 제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불을 붙여야 돼요. 지금은 괜찮지만 밤엔 꽤 추울 테니까. 요리도 해야 되고.”

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 마른 가지를 가져와야 하지 않을까요? 물가에서 좀 멀리까지 가서라도.”

“소용없습니다. 바싹 마른 가지를 가져와도 계곡의 습한 공기 때문에 불붙이는 게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러더니 다시 부싯돌을 착착, 부딪쳤다. 역시 소용이 없자, 제프리가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부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더 마른 가지를 가져와서 젖기 전에 빨리 불을 붙이는 게 낫겠어요. 가는 김에 낙엽도 좀 더 가져오고.”

제프리가 돌아서서 걸어가자 캘리는 부싯돌을 들어 올렸다. 제프리가 계속 부딪쳤던 거라 열기가 남아 있었다. 캘리는 순전히 호기심으로 부싯돌을 부딪쳐보았다.

한 번, 두 번.

화르르.

탁, 탁, 두 번쯤 부딪쳤을 뿐인데 불이 화악, 오르자 캘리는 놀라서 부싯돌을 떨어트렸다. 나뭇가지를 주우러 가던 제프리가 놀라서 다시 돌아왔다. 젖은 나뭇가지를 태우며 불길이 솟는 걸 본 제프리가 캘리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캘리는 고개를 저었다.

“한 거, 없어요. 그냥, 부싯돌을 몇 번 부딪쳤더니…….”

“전 그렇게 많이 부딪쳤는데 안 됐는데요?”

제프리의 의아함을 풀어줄 방법이 그녀에게도 없었다. 캘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부싯돌에 열기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제가 다시 부딪치니까 불이 붙었나 봐요.”

그녀의 생각을 말했지만 제프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캘리도 자신이 내놓은 대답이 그리 믿음직스러운 건 아니었다.

“어쨌든 불이 붙었네요.”

제프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캘리도 마주 웃었다.

“네. 그러네요.”

“그럼 됐죠. 뭐.”

그녀의 옆에 앉은 제프리가 나뭇가지를 더 불길 속으로 던져 넣었다. 불은 이제 안정적으로 활활, 타올랐다.

“날 싫어하죠?”

캘리가 문득 묻자 제프리가 놀라서 돌아본다. 캘리는 그런 그를 보며 웃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느꼈어요.”

견습 기사의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지, 지금은 아닙니다.”

당황해서 말을 더듬은 제프리가 목청을 가다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엔 좀 그러긴 했지만…… 사실, 기사들 대부분이 그랬습니다. 얼마 전까지 적이었던 나라의 백작 딸과의 결혼이라니. 우리 영주님께 그런 명을 내린 아르 왕이 미친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죠. 그 명을 받든 공작님도……. 물론, 금으로 충분히 보상받긴 했지만.”

순간, 캘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보상을 받아요?”

제프리가 당연한 거 아니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작님이 직접 아르 왕과 협상을 하셨죠. 칸은 오스피아의 백작 딸과 결혼하는 대신 금을 달라고 했고 폐하는 그러자고 하셨고요. 물론, 칸이 너무 많은 양의 금을 원해서 폐하께서 잠시 진노하셨다고는 하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폐하도 나름 바라는 이익이 있어서 결혼을 하라고 명하신 거니까, 결국 칸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신 거죠. 왕께서 마지막까지 좀 깎아달라고 하셨다지만 칸은 굳건히 버티셨습니다. 결국 완벽한 칸의 승리였죠.”

제프리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하. 그런 거였어?

그러니까 그 남잔, 나와 결혼함으로써 충분한 이득을 본 거네?

캘리는 부글거리는 배신감을 겨우 억누르고 제프리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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