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혹시 결혼을 유지 못 하는 상황이 오면요? 그럼, 받은 금을 토해내야 하나요?”
“예?”
제프리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마주 본다. 캘리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럴 수도 있잖아요. 가령, 내가 죽을 수도 있고…….”
“아이고, 그런 소릴 왜 하십니까?”
“만약에요. 만약에. 베아투름까진 아직 먼 길을 가야 하고 그 안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왕의 명을 이행하긴 했지만 그 후에 결혼이 잘못되면 어떻게 되나 해서…….”
“그래도 금은 안 돌려줘도 되죠. 일이 어떻게 되건, 칸은 왕명을 받들었으니까요. 하라는 결혼을 했는데, 그 후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왕께서 참견할 일이 아니니까요. 왕은 저희 칸이 오스피아의 백작 딸과 결혼한 것만으로도 이미 이루고 싶은 목적을 이뤘거든요. 패잔국을 보듬어주는 아량 넓은 왕이라는 칭송을 얻었으니 그걸로 금값은 충분히 한 거라고 봅니다.”
“그렇죠?”
그녀가 너무 환하게 웃어서인지 제프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캘리는 얼른 미소를 지우며 변명했다.
“어쨌든 제가 칸에게 그렇게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니, 기쁘네요.”
그러자 제프리가 다시 웃었다.
“예. 부인은 베아투름이 조금 더 부유해지는 것에 일조한 겁니다.”
캘리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거였어. 난 그에게 이득을 주면 줬지, 해를 끼친 게 아니야. 나중에 이 결혼이 가짜였다는 게 밝혀지더라도 라이칸은 손해 볼 게 하나도 없다는 거지.
어쩌면, 내가 사라지면 더 좋을 수도 있겠네.
부인이야 다시 얻으면 되는 거잖아. 커다란 영지의 영주고, 잘나가는 기사고, 부유한 공작이니, 여자들이 수없이 들러붙겠지. 그럼, 지참금 많이 주는 여자를 아내로 또 맞이하면 되고.
그가 왕을 상대로 금을 왕창 뜯어냈다는 걸 보면, 다음 결혼에서도 더 많은 이득을 볼지도 모르고.
융통성 없고 고지식할 것 같던 그가 결혼도 잇속을 차려 계산하는 사내였다니.
하.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난 그것도 모르고, 나중에 속은 걸 알았을 때, 공작이 배신감에 상처받을까 봐 걱정한 거였어.
캘리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받아낸 금이 어마어마하겠어요.”
“예. 왕을 상대로 하는 협상이었으니까요.”
그래, 상대는 왕이니까. 그것도 대륙에서 가장 강하고 부유한 디콘스의 왕이 아닌가.
캘리는 억지로 웃었다.
“그렇군요.”
“공작님은 우리 베아투름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하신 겁니다. 왕에게 받은 금으로 베아투름을 풍족하고 안전하게 만드는 데 쓰려고요.”
“베아투름이 그렇게 가난한가요?”
영주인 공작이 결혼하는 조건으로 그렇게 많은 금을 뜯어내야 할 만큼?
“아니, 아닙니다. 오히려 베아투름은 아주 풍족한 곳입니다. 각종 광물이 많이 나거든요. 근데 또 부족한 자원이 많은 곳이기도 하죠. 워낙 추운 곳이라 비옥한 땅에 비해 재배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고요. 마물지역이 인접해서 경계도 강화해야 하고, 뭐 여기저기 쓸 데가 많죠. 게다가 금은 어떤 광물보다 값어치가 더 높으니까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던 캘리는 갑자기 웃으며 물었다.
“금도 많이 받았는데 내가 왜 싫었어요?”
제프리가 다시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북부와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가씨니까요. 워렌 공작부인은 그냥 한 남자의 부인이 아니라 베아투름의 백성들을 아우르고 보듬어줄 강한 여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난 전혀 아니죠.”
캘리가 동의한다는 듯 중얼거리자 제프리가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 생각이 틀렸어요.”
캘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프리 생각이 맞아요. 난 그런 강한 여자가 아니니까요.”
“강한 분, 맞던데요?”
진지한 대꾸에 캘리의 미소가 흔들렸다.
단검에 활 쏘는 것까지 본 제프리다.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그건, 그냥 연습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몇 가지 기술을 좀 가지고 있다고 해서 커다란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 부인의 조건을 갖춘 건 아니니까…….”
“그것도 배우시면 되죠.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힘을 가지고 계세요, 부인은.”
“전 그런 거, 없어요.”
제프리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가지고 계십니다. 확실합니다. 기사들도 다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내가 단검 던지는 모습을 봐서 그런 거겠죠.”
“아뇨. 단검은 누구나 쓸 수 있어요. 하지만 위험한 순간에 그걸 사용할 용기는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니니까요. 부인은 그런 용기가 있고요…….”
제프리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캘리는 결혼 첫날밤, 자신이 라이칸에게 칼을 휘둘렀던 걸 떠올렸다.
“기사들이 많이 놀랐겠죠?”
“예. 말도 마세요. 칸의 팔에 난 상처를 보고 다들 기함을 했으니까요. 그게 다른 누구도 아닌 부인이 한 짓……. 흠. 어쨌든, 모두들,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놀랐었죠. 거기다가 활…….”
제프리가 말끝을 흐린다.
그래, 단검을 휘두르는 걸 보고 그렇게 놀랐는데, 활을 쏘는 것까지 봤으면…….
‘베아투름의 여자들 중에는 검과 활을 다루는 여자가 있지.
그런데 남부에도 그런 여자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기사들은 라이칸처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볼 사람도 있을 게 뻔했다. 그래서 라이칸도 그녀의 비밀을 지켜준 거겠지.
그래도, 좀 이상하긴 하다. 그가 왜 활을 숨겨주고 제프리가 쏜 거라고 거짓말까지 한 걸까?
제프리가 불을 뒤적이며 미소를 지었다.
“와이엇 님은 그 밤 내내 웃으셨어요. 와이엇 님은 칸을 놀려먹는 재미로 사는 분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지난 몇 주간 겪어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어쨌든, 칸은 부인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자길 찌른 부인을 그냥 두지 않았을 테니까요. 결혼을 무효화시키고 부인을 비롯한 백작의 가솔을 몰살시켜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래, 그랬겠지. 아니면, 받은 금을 토해내야 할 상황이 몹시 불쾌해서라도 더 화를 냈겠지.
어쩌면,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근데 의심하면 밝혀야 하고, 그럼 금도 돌려줘야 하니까…….
캘리는 인상을 썼다.
정말, 그가 그 정도로 계산을 하면서 잇속을 챙기고 있는 걸까?
그래서 내가 활 쏘는 것도 비밀로 해준 걸까?
내가 의심받아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아, 모르겠다. 진짜.
알수록, 모를 남자다. 라이칸 워렌 공작은.
그래, 어차피 내가 이렇게 머리가 깨지도록 생각을 해봤자 알 수 있는 건 없다.
그가 그의 잇속을 챙겼듯, 나는 내 목적을 이루면 되는 거지. 그러려면 나도 영악해져야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한다.
캘리는 제프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제프리가 뭐가요? 하는 얼굴로 쳐다본다.
“디콘스에선 기사들이 영주의 이름을 줄여서 부르는 일이 흔한가 봐요.”
“예?”
말을 못 알아들은 듯 끔뻑거리던 제프리가 갑자기 ‘아.’ 하더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해하신 겁니다.”
“하지만, 다들 칸이라고…….”
“예. 공작님의 이름이 라이칸이고, 저희가 부르는 호칭이 칸이라서 모르는 사람은 오해를 하긴 하죠. 근데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칸이라는 호칭은 지도자, 우두머리. 뭐, 그런 뜻으로 불리는 겁니다. 바다 건너 서역의 어느 부족에서 쓰이던 호칭인데, 그 부족인이 어떤 경유로 베아투름으로 넘어와서 그 호칭이 알려지게 된 거라고 들었습니다. 베아투름의 주인이자, 토르 기사단의 단장이 되는 사람이 그 호칭의 주인이 되는 거고요. 즉, 저희 베아투름에서만 통하는 호칭이죠.”
“몰랐어요. 난 라이칸의 이름을 줄여서 부르는 건 줄 알고…….”
“에이, 그럴 리가요. 와이엇 님을 제외하고 다들 공작님의 가신일 뿐인데요. 와이엇 님은 어릴 때부터 칸과 같이 자라다시피 했어요. 거의 형제처럼요. 그래서 허물이 없습니다.”
“그렇군요. 이름에 그 호칭이 들어 있어서 오해를 많이 받겠어요.”
“디콘스에선 다들 아는 거라 오해는 없는데, 다른 나라 백성들은 모르겠죠.”
“그렇군요.”
“근데, 혹시 칸의 이름이 어떻게 지어진 건지, 아십니까?”
제프리가 묻자 캘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라이칸이라는 이름은 신족에서 쓰는 늑대라는 뜻의 ‘lykos’와 인간이라는 뜻의 ‘anthropos’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겁니다.”
“늑대……인간?”
“예. 맞습니다. 이름에 사연이 좀 있는데……. 오래전에, 베아투름 서쪽의 야만인들이 저희 영지로 침입해서 돌아가신 워렌 공작부인을 납치해 갔었죠. 하필이면 마물들이 사는 북쪽으로 데려갔고, 부인은 그때 임신 중이었습니다. 칸의 아버님이신, 전 워렌 공작님이 부인을 찾으려고 군대를 동원해서 쫓아갔습니다. 하지만 야만인들은 그 어둠의 땅에서 전부 죽은 채 발견됐죠. 근데, 부인은 없었습니다. 몇 달을 마물들과 싸우면서 부인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못 찾았답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는데…… 어느 날, 보초를 서는 병사가 눈보라가 휘날리는 밤을 뚫고 걸어오는 소년을 본 겁니다.”
“설마…….”
“예. 그 소년이 바로 저희 칸이었죠.”
“어떻게 그런 일이…….”
“보고도 못 믿을 일이 실제로 벌어진 거죠. 근데, 저희 조부님도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하셨어요.”
캘리의 눈이 커졌다.
“직접 봤다고요?”
“제 조부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그때의 장면을 잊지 못하셔서 가끔 반복해서 말씀하셨어요. 그 소년을 에워싸듯 대형을 갖춘 늑대들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소년을 보호하는 것 같았답니다.”
“믿어지지가 않네요.”
“예. 그렇죠. 베아투름으로 가시면 그 얘길 많이 듣게 되실 겁니다.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다 압니다. 워렌 부인이 납치되던 순간부터, 부인을 찾는 수색대, 칸이 성으로 돌아오는 것까지 다 직접 본 사람들이 많거든요.”
“…….”
“저희는 부인이 잘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전에 베아투름의 겨울을 견뎌내는 것이 먼저겠지만요.”
“베아투름의 겨울이 그렇게 혹독한가요?”
“감히 상상도 못 할 만큼요. 디콘스의 왕궁이 있는 펠리키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열다섯 살 때 베아투름으로 온 저도 베아투름의 겨울을 처음 겪었을 땐, 정말 죽는 줄 알았으니까요. 근데, 부인은 다른 이들처럼 바깥 생활을 거의 할 일이 없으니까 괜찮습니다. 문제는, 베아투름으로 가는 여정이죠. 거기로 가는 길은 늪지대와 언데드 지역, 와일더니스(황야)와 협곡까지, 다 지나가야 하는데, 마차로는…….”
“언데드요?”
캘리는 겁에 질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 마물의 이름을 듣는 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자 제프리가 웃었다.
“언데드는 별거 아닙니다. 놈들은 밤에만 활동하니까, 저흰 낮에 그 지역을 통과하면 되거든요. 그리고 그 지역에 저희가 만들어놓은 벙커가 있습니다. 여차하면 거기서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면 되죠. 혹시 밤에 맞닥트려도 목을 잘라버리거나 불로 태우면 되고요. 물론, 떼로 덤비면 당할 재간이 없지만…… 그렇지 않게 잘 피해 갈 겁니다. 여러 번 피해왔고요. 요즘은 상인들과 여행자들도 요령껏 잘 통과하면서 다닙니다.”
그래도 무섭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지역이라니. 그런 곳을 지나간다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 물론 난 거길 지나갈 일이 없지만.
제프리가 다시 말을 잇는다.
“와일더니스(황야)를 통과해야 되는데, 거긴 늑대가 살지만 우리 칸이 있으니까 문제없습니다.”
캘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상관이 없죠? 라이칸도 사람인데, 당연히 늑대가 공격할 수도…….”
“아뇨. 늑대가 우릴 공격할 일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