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오래전, 죽은 워렌 공작과 아르 왕은 절친한 친구이자 함께 전장을 누비던 전사였지. 지금의 디콘스가 있는 것도, 아르가 왕좌에 앉아 강력한 왕권을 장악한 것도 모두 내 동생, 워렌 공작의 공이 컸어. 그 시절의 아르 왕은 내 동생에게 약속을 하나 했다.”
“…….”
“나중에, 시간이 흘러 때가 되면 베아투름을 독립시켜 주겠다고.”
조용히 듣고 앉아 있던 캘리는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독립……이요?”
“그래. 하나의 나라로 떼어내 주겠다고 약속을 하신 거지.”
“그럼…….”
“라이칸은 왕이 되는 거야. 너는 왕비가 되는 거고.”
하.
너무 놀라 숨이 턱, 막혔다. 그러자 백작부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놀랐지? 몰랐을 거야. 그 약속에 대해 아는 사람은 나와 라이칸, 그리고 소수의 몇 사람뿐이니까. 이 일이 알려지면 반대하는 자들이 꽤나 있을 거거든.”
그렇겠지. 정치는 잘 모르지만 그럴 것 같았다.
“아르 왕이 그 약속을 지켜줄 줄은 몰랐어. 내 동생이 죽은 후, 라이칸을 전쟁터로 내보내며 이용만 하기에 그런 약속 따위 다 잊고 사는 줄 알았더니…….”
백작부인이 캘리를 쳐다보았다.
“라이칸에게 왕족과 결혼을 명한 건 그 오래된 약속을 지키기 위한 시작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후에 베아투름이 독립해 하나의 나라가 되었을 때, 든든한 우방국을 만들어주려는 거지. 반대하는 자들이나, 베아투름을 점령하려는 자들이 함부로 욕심을 실행하지 못하도록 오스피아라는 나라의 왕족 핏줄을 맺어준 거야. 오스피아가 비록 디콘스와의 전쟁에서 지긴 했지만, 그래도 남부에서는 가장 강한 나라니까. 라이칸에게 충분한 힘이 될 수 있는 나라야.”
백작부인이 굳어 있는 캘리의 손을 잡았다.
“무사히 베아투름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라이칸의 힘이 돼줘야 해. 라이칸이 무사히 왕이 될 수 있도록.”
캘리는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기가 질렸다.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어마어마해서, 자신이 한 거짓말이 이렇게 큰일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른 새벽, 동이 완전히 트지도 않았는데 네이스 백작가의 앞뜰은 떠날 채비를 이들이 모여 있었다.
마차는 완벽한 정비를 마쳤고 말들도 며칠 동안 잘 쉬고 잘 먹은 덕분에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캘리는 꼿꼿하게 서 있는 네이스 백작부인을 보았다.
“며칠 동안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그대도 고생했네.”
“약초 물 잘 챙겨 드세요.”
“그래…….”
백작부인이 옆에 있는 라이칸을 보았다.
“갈 길이 멀다. 어서 출발하거라.”
라이칸이 고개를 슬쩍 숙인다. 좀 다정해도 좋으련만 그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하지만 백작부인은 그게 거슬리지 않는 듯했다. 조카를 보는 눈빛이 자애로웠다.
라이칸이 캘리를 마차에 태워주려고 손을 잡았다.
돌아서던 캘리는 문득, 무언가가 치솟아서 다시 몸을 돌렸다. 여전히 근엄한 얼굴의 백작부인을 보는데 왠지 눈물이 핑 돈다.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른다. 나이가 있으시고 지병도 있으니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고.
캘리는 왠지 이것이 마지막일 것 같았다.
그래서 충동이 일었다. 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캘리는 와락 백작부인을 껴안았다.
놀란 부인의 몸이 경직되는 걸 느꼈지만 캘리는 포옹을 풀지 않았다.
“건강히 지내세요. 너무 정원 일만 하시지 말고, 걷기도 좀 하시고. 편한 하녀가 있으면 가끔 대화도 나누시고요. 그래야 울증이 안 생겨요.”
백작부인의 손이 캘리의 어깨를 잡았다. 그 동작은 뻣뻣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감정 표현이었다.
“그대는 여전히 위엄이 없군.”
왠지 목소리까지 다정하게 느껴진다.
캘리가 포옹을 풀자 백작부인이 괜히 목청을 가다듬었다.
“길이 멀고 험하니 건강 조심하고.”
백작부인이 다시 라이칸을 보았다.
“아내를 잘 보살펴라. 너만 믿고 고향을 떠난 사람이다. 그건 아주 외롭고 힘든 일이야. 그러니 잘 대해줘라.”
본인 얘기를 하는 거였다.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와야 했던 외로운 생활을 스스로 고백한 꼴이었다.
백작부인이 다시 캘리를 보았다.
“남편만 의지하지 말고 너의 삶을 살아. 그게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야.”
캘리는 미소를 지었다.
“정원은 가꾸는 것처럼요?”
백작부인이 웃었다.
“그래.”
두 사람은 마주 웃었다. 기사단이 출발하고 나서도 백작부인은 오랫동안 그들을 보고 있었다. 캘리도 그런 백작부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잘하면 울겠다?”
쉴라가 이죽거린다. 캘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뭐야?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사실, 그 느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살면서 내게 백작부인처럼 정성을 다해 가르쳐주신 분은 없었거든. 아리안 수녀도 내가 따라다니면서 알려달라고 해서 가르쳐준 거지. 수녀원장은 내내 화만 내셔서 옆에 가기도 무서웠고. 그런데 백작부인은 진심으로 내가 잘되길 바라셨어. 가르치는 일이 결코 쉬운 게 아닌데…… 그건 애정이 없으면 못 하는 거야.”
쉴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착각하지 마. 캘리. 백작부인이 정성을 다해 가르친 사람은 네가 아니라 엘리샤 벨만이야.”
캘리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어두운 눈빛이 흔들리고 촉촉해졌다.
“그래, 나도 알아. 그래도…… 며칠 동안 정말 엘리샤가 된 것 같았어.”
쉴라가 인상을 쓴다. 캘리는 잠시 그렇게 말없이 있다가 다시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젠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지.”
캘리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제 곧 소르테에 도착한다. 그럼, 꿈처럼 달콤했던 시간들도 다 끝나는 것이다.
“이제 현실로 돌아올 때야.”
캘리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단호한 목소리는 다른 누가 아닌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
이틀을 더 달려서 엘프의 나라, 포르엘티움의 국경 마을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캘리는 보이는 자들이 온통 엘프족이라는 게 신기했다.
여관 주인도, 하녀도, 하인도, 다들 키가 크고 귀가 뾰족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순수 엘프와 하프 엘프가 딱 구분이 되는 것도 신기했다.
순수 엘프는 키가 크고 뾰족한 귀가 위로 솟아 있었다.
반면, 하프 엘프는 귀가 그다지 뾰족하지 않았고 살짝 아래로 처져 있었다.
“너랑 비슷한 하프 엘프는 보이지 않는데?”
쉴라가 조용히 속삭이자 캘리의 눈빛이 굳었다. 하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하프 엘프의 생김새는 다양해. 여기 있는 자들이 하프 엘프의 다가 아니잖아. 이 마을은 아주 작다고.”
“소르테에 가면 더 많은 하프 엘프가 있을 것이다? 네 머리칼과 같은 색을 가진?”
“당연하지.”
캘리는 자신 있게 대답해 주었다. 앞서가던 하녀가 돌아본다. 누구랑 얘기하는 건지 궁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캘리는 모른 척, 하녀를 재촉했다.
“내가 쓸 방은 어디지?”
“예? 아,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바로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캘리는 새장을 든 채, 하녀를 따라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
오웬은 말을 빗질하고 있는 라이칸 옆으로 다가갔다.
“난쟁이가 백작에게 전령을 또 보냈습니다.”
라이칸의 손길이 멈췄다. 오웬은 물었다.
“전령을 쫓을까요?”
라이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둬.”
오웬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백작에게 딸의 안부를 전하는 거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백작이 이상합니다. 딸이 걱정이 됐던 거라면 호위병을 딸려 보낼 것이지, 왜 하필 저런 난쟁이를 보냈는지. 딸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감시하는 목적인 것처럼.”
“…….”
라이칸이 아무 대꾸를 하지 않자 오웬도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다시 말했다.
“시타가 도착할 때가 됐는데,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요?”
오웬은 말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시타를 걱정하다니, 본인이 들으면 굉장히 불쾌해할 것이 뻔했다.
‘난 하울의 전사다.’
여느 때처럼, 그 한마디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는 듯, 툭 쏘아붙이겠지.
시타는 혼자 활동할 때, 본 실력을 발휘하는 하울족 전사였다.
한창 젊은 시기에는 전사로 살고, 이후에는 일선에서 물러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전사로 키우는 하울족은, 부족생활을 하긴 하지만, 각개 전투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인다.
덕분에, 전투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정찰병으로 투입되거나 적진에 깊숙이 침투해, 적의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했다.
시타는 하울족 전사 중 가장 뛰어난 전사였다. 여러 개로 나누어진 부족 간에 내전이 일어났고 결국, 시타도 살던 터전을 잃고 세상을 헤매다가 토르 기사단에 들어온 것이 5년 전이다.
“그럴 리가.”
갑자기 와이엇이 걸어오더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웬의 옆에 선 와이엇이 씨익, 웃더니 육포 조각을 씹으며 말했다.
“그 족제비 같은 놈한테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없잖아. 그놈은 다람쥐보다도 빠르다고. 내 장담하는데, 그놈을 죽일 수 있는 검은 이 세상에 없어. 아, 칸의 검은 빼고.”
“나도 못 죽여.”
칸이 무뚝뚝하게 대꾸하자 와이엇이 쿡, 웃었다. 그러자 오웬도 웃으며 말했다.
“죽일 일이 없다는 거겠죠.”
와이엇이 껄껄, 웃었다.
“그렇지, 그렇지. 칸에 대한 시타의 충성심은 나처럼 단단하니까.”
오웬이 ‘네가?’ 하는 표정을 짓자 와이엇이 ‘뭐?’ 하는 듯 눈을 부라렸다.
“오웬.”
갑자기 라이칸이 부르자 오웬이 재빨리 와이엇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예, 칸.”
“소르테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한 후엔 전원, 말로 움직인다.”
“예?”
“전원?”
오웬과 와이엇이 동시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성질 급한 와이엇이 먼저 물었다.
“부인은 어쩌려고요? 말을 못 타시는데.”
하지만 라이칸은 더 이상의 설명도 없이, 벤투스를 끌고 마구간으로 걸어가 버렸다.
와이엇이 오웬을 쳐다보았다.
“뭐야? 왜 저래?”
“곧 겨울이 오니까.”
“너무 지체돼서?”
“그렇지.”
“그렇다고 말도 못 타는 부인을 어떻게 데려가려고? 이제부터라도 말 타는 법을 가르치기라도 하려고?”
“글쎄.”
오웬이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와이엇이 인상을 썼다.
“넌 자칭, 칸의 지략가라는 자가 그것도 몰라?”
“내가 지략가지, 독심술사냐? 칸의 마음을 어떻게 읽어?”
“아, 뭐냐고. 베아투름까지 자기 앞에 태우고 가기라도 할 셈인가?”
와이엇이 뜻 없이 내뱉은 중얼거림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동시에 하나의 장면을 떠올렸다.
벤투스 위에 앉아서 둘이 끌어안고 초원을 달리는 장면을.
사실, 요즘 둘 사이가 꽤나 가까운 걸로 볼 때, 전혀 실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