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40)화 (40/159)

40

두두두두.

이쪽으로 오는 급한 말발굽 소리에 제프리는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야영 준비를 마치고 쉬고 있던 기사들도, 식사 준비를 하고 있던 테드도 긴장한 채 빠르게 다가오는 말 한 마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말 위에 탄 익숙한 얼굴을 알아본 테드가 황급히 소리쳤다.

“시타!”

순식간에 야영장 안으로 들어온 말은 기나긴 길을 얼마나 빠르게 달려왔는지 보여주는 듯, 거친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말을 세우자마자 훌쩍 뛰어내린 시타의 몰골도 남루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아이고, 어지간히도 급하게 왔나 보네. 왜? 우리가 너만 남겨놓고 갔을까 봐?”

테드의 농담에 제프리와 다른 기사들이 왁자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시타는 웃지 않았다.

“공작님은? 칸은 어딨습니까?”

“칸? 성안에 들어갔지. 넌 어떻게 된 거야? 뭐 하다가 이제야 와?”

질문에 대답은 안 하고 시타가 심각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 여자…… 그러니까 그, 부인도 같이 갔습니까?”

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부인이 소르테를 구경하고 싶다고 하셔서. 근데,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칸에게 직접 보고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 있습니다.”

“내일 해. 내일 오전에 성문이 열리는 대로 바로 나오실 거야.”

“급합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지금은 성문이 닫혀서 들어갈 수도 없거든. 목숨이 위험한 건이 아니라면 기다려야 돼.”

“젠장.”

욕설을 씹어뱉는 시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

한 방울, 두 방울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점점 굵어져, 순식간에 장대비가 되었다.

하나, 둘…… 여덟.

라이칸은 회색 망토를 입은 전사들의 수를 정확하고 빠르게 헤아렸다.

빗물이 눈을 찌르고 흙바닥 위로 세차게 내리꽂히고 있었다.

가죽 방어복에 은빛 사슬 갑옷까지 받쳐 입고 그 위에 망토까지 입은 전사들이 빠르게 움직이기엔 빗줄기가 너무 강했다.

망토는 이미 전사들의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는 저들의 움직임을 무겁고 느리게 만들 것이다.

여덟이 아니라 스물이라도 빠르게 움직이면 승산이 있었다. 그런데…….

라이칸은 뒤에 서 있는 존재를 떠올렸다.

그녀를 지키면서 여덟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 불안하다.

단 한 놈이라도 그녀를 잡는다면…….

라이칸의 얼굴이 굳었다.

오웬이 와야 했다. 그때까지 버티기만 한다면.

“누구냐?”

라이칸은 상대를 향해 물었다. 그러나 놈들은 그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여덟이 거의 동시에 말에서 내려 반원을 그리듯 둘러서더니 거리를 좁혀온다.

라이칸은 단검을 빼 들었다. 한 놈의 장검 하나를 뺏을 계획이었다. 그리고 가까이 오는 놈들을 차례로.

아내의 옆을 지키면서 놈들을 상대해야 한다. 멀리 떨어져서도 안 되고, 검이 가까이 오게 해서도 안 된다.

가볍게, 빠르게, 정확히 급소를.

한 놈이 먼저 달려들었다. 훅, 찔러오는 검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놈의 손목을 내리쳤다. 손에서 떨어지는 검을 획, 낚아채서 머리 위로 날아오는 검을 막았다.

채앵, 검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발로 놈의 배를 찼다.

바닥에 쓰러지는 놈의 허벅지에 검을 꽂고 돌아서는 순간, 또다시 달려드는 회색 망토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으악.”

놈들의 칼날은 예리해서 단 한 번 스치기만 해도 갑옷이 갈라졌다.

라이칸은 그녀를 등 뒤로 잡고 나무쪽으로 밀었다.

커다란 나무 앞에 서 있는 아내를 온몸으로 막으면서 다시 달려드는 놈을 향해 검을 쳐들었다. 검이 빗속을 가를 때마다 붉은 빗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제 남은 건, 둘. 아니…… 셋.

차가운 빗물에 젖은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지만 라이칸의 사나운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서서히 다가오는 한 놈을 향해 검을 세우던 그때였다.

“여자를 살리고 싶으면 멈춰라!”

고개를 홱, 돌린 라이칸의 눈이 얼어붙었다. 나무 옆에 선 놈이 그녀를 잡고 있었다. 칼날이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그을 듯 턱 아래에 받쳐져 있는 걸 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검을 던져.”

놈이 낮게 윽박질렀다. 라이칸은 그녀를 보았다. 잠깐 구름을 벗어난 달빛이 공포가 가득 찬 그녀의 눈을 비췄다.

라이칸은 검을 바닥에 던졌다.

“안 돼…….”

그녀의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와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라이칸은 그녀의 젖은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놈을 보며 이를 갈았다.

“여자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상하게 했다가는 네놈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불길이 타오르는 지하 소굴로 던져버릴 것이다.”

놈이 비릿하게 웃더니 턱짓을 했다. 순간, 무언가가 뒤통수를 세차게 내리쳤다.

“안 돼!”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라이칸은 놈에게 붙잡혀 발버둥 치는 그녀를 보며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아주 잠깐, 비에 젖은 그녀의 머리칼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달빛이 빚은 착각이리라.

***

전사들이 축 처진 그를 양쪽으로 잡고 끌고 가는 걸 본 캘리는 자신을 잡고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그를 놔줘요. 제발. 저 사람은 아무 상관도 없다고요!”

처음엔 이들이 누군지 몰랐다. 그저 뭔가를 뺏으려는 강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들이 있는 곳으로 끌려가는 순간, 유니콘이 수놓아진 하얀 깃발을 보자마자 여왕의 기사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캘리는 당당하게 그들과 맞섰다.

“여왕님께서 날 데려오라고 한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놔주라고요!”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기사들은 그녀를 막무가내로 말에 태운 채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말 위에서 캘리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정신을 잃고 말 등에 아슬아슬하게 엎어져 있는 라이칸을 볼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 때문이다. 나 때문에 그가 위험해졌어.

빌어먹을.

그를 살려야 해.

캘리는 이를 악물었다.

여왕을 만나면, 제일 먼저 그를 풀어달라고 요청할 것이다.

여왕은 내 청을 들어줄 거야. 반드시 그래야 해!

***

“어이. 난쟁이.”

와이엇은 묶여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난쟁이를 꼬챙이로 찔렀다.

그러자 난쟁이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든다. 얼마나 맞았는지 눈두덩은 퉁퉁 부어 있고 얼굴의 살갗은 온통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프냐?”

와이엇이 씨익, 웃으며 묻자 난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게 왜 그런 짓을 했어. 그런 나쁜 짓을 하니까 맞잖아. 하긴, 맞은 건 그냥 시작이지. 너 말이야. 넌 목숨이 여러 개냐? 어떻게 검은 늑대를 독살할 생각을 했어?”

“전 그냥…… 살려고…….”

“어, 그래. 살려고 그랬겠지. 이해해. 근데, 넌 못 살아. 칸이 돌아오면 네 목숨은 끝이야. 알지?”

“살려주십시오.”

“응, 못 산다니까.”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제가 다 한 일도 아닙니다. 그 계집도…….”

와이엇이 인상을 쓰자 난쟁이가 입을 다물었다.

“너 혼자 한 일이지. 그분은 우리 칸을 살리려고 네가 독을 묻힌 잔을 쳐냈어.”

“그게 다 공작에게 잘 보이려고 한 짓이라고요! 계획이 들킬 것 같으니까 저만 살려고…….”

“그래? 알았어. 그것도 칸이 돌아오면 알게 되겠지. 네놈이 그분 앞에서 설마 거짓말을 하진 못할 거야. 그분은 거짓말을 하는 놈의 혀를 뽑고 눈을 뽑아서…….”

쾅!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꼬챙이로 난쟁이 코를 간지럽히고 있던 와이엇은 문이 세차게 열리자 벌떡, 일어섰다. 열린 문 안으로 들어오는 오웬을 보자 인상을 썼다.

“뭐야? 깜짝 놀랐잖아. 칸은?”

오웬의 눈빛이 검었다.

“납치된 것 같아.”

“뭐?”

화들짝 놀라는 와이엇을 지나친 오웬은 곧장 검을 꺼내 난쟁이의 턱 아래에 가져다 댔다. 놀란 난쟁이가 벌벌 떨기 시작했다.

“말해.”

“뭐, 뭘 말하라는 겁니까?”

“칸과 부인을 데려간 놈들이 누군지.”

“제가 어찌 압니까?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거짓말 마!”

“진짭니다. 전 모릅니다. 믿어주세요!”

난쟁이가 억울하다는 듯 절규했다. 보다 못한 와이엇이 재빨리 오웬에게 다가섰다.

“무슨 소리야? 대체 칸을 누가 데리고 갔다는 거야?”

난쟁이를 노려보던 오웬이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칸과 부인이 있던 자리에 엘프 전사들이 쓰러져 있었어. 칸이 가지고 있던 단검도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빌어먹을. 습격이 있었던 거야.”

“흔적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와이엇이 서늘하게 묻자 오웬이 고개를 저었다.

“주변을 샅샅이 훑었지만 비가 너무 세차게 내려서 흔적을 다 지워버렸어. 남아 있는 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몇 마리의 말이 서 있었던 흔적이 전부야. 그 말들이 어디로 갔는지, 몇 마리였는지도 알 수 없어.”

일그러진 와이엇의 얼굴이 난쟁이를 향했다. 난쟁이의 얼굴이 다시 흙빛으로 변했다.

“저는 모릅니다. 진짜, 저는 몰라요!”

와이엇이 검을 집어 들고 오웬을 향해 말했다.

“현장으로 다시 가보자. 뭔가를 본 사람이 반드시 있을 거야.”

“소용없어. 비가 와서 시장에 있던 상인들도 다 흩어졌어.”

“그래도 가봐야지! 아니면, 성문을 열어서 밖에 있는 기사들이라도 불러들이든지.”

“망할. 그랬다가, 여왕이 알기라도 하면? 우리가 토르 기사단이라는 걸 알면 여왕이 가만있을 것 같은가?”

“가만 안 있으면? 감히 어쩔 건데? 토르 기사단과 전면전이라도 할까 봐? 그건 디콘스를 향한 전쟁을 선포하는 거야. 여왕이 과연 그런 배짱이 있다고 생각해?”

“진심이야? 와이엇. 자네는, 여왕이 우리를 공격한다고 해서 아르 국왕이 전쟁까지 불사할 거라고 생각해?”

와이엇이 으르렁거리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그동안 칸과 우리가 왕을 위해 한 일이 얼만데!”

성난 곰처럼 씩씩거리는 와이엇을 보며 오웬이 고개를 저었다.

“난 모르겠다. 과연, 아르 왕에게 우리가 그렇게 중요한 존재인지는. 하지만 가자. 가서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져보자고. 어쨌든, 칸과 부인을 구하긴 해야 되니까. 그래도 못 찾으면…… 성문이 열리는 대로 밖에 있는 기사들을 모조리 불러들여서 여왕을 찾아가야지. 빌어먹을.”

“이놈은 어쩔까? 칸이 직접 심문한다고 살려두라 하셨는데.”

오웬이 난쟁이를 보았다.

“살려주십시오!”

난쟁이가 엎드려 울먹이자 오웬이 중얼거렸다.

“우선 묶어두고 가자. 여기서 시신이 나오면 상황만 더 복잡해지니까.”

두 기사는 난쟁이의 입에 다시 재갈을 물리고 빠르게 방을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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