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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예, 전하.”
“저자에게 목숨을 잃은 내 기사가 몇이라고?”
“둘입니다. 셋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그래, 저자 혼자서 내 기사 다섯을 해하였군.”
장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용병 하나에게 기사 다섯이 당했다는 걸 제 입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여왕이 그런 장군을 노려보았다가 이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저자를 지하 감옥으로 데려가라.”
“폐하! 안 됩니다!”
캘리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여왕이 인상을 쓰며 쳐다보았다. 캘리는 절박한 마음으로 다시 말했다.
“제발, 저 남자를 보내주십시오. 전 저 사람에게 여러 번 목숨을 빚졌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여왕이 피식, 웃었다. 절박한 그녀의 눈빛을 알아본 여왕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먼 길을 오는 동안 용병에게 마음을 주었구나. 가엾은 것.”
“…….”
천천히 그녀 앞으로 걸어온 여왕이 갑자기 손을 홱, 쳐들어 캘리의 뺨을 후려쳤다.
쫙!
매서운 손찌검에 그녀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멈춰!”
눈 끝에 라이칸이 거칠게 발악하며 앞으로 튀어나오려 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굵은 쇠사슬이 그의 손과 발을 옭아매고 있었다. 병사들이 몽둥이로 그를 때렸다.
캘리가 쫓아가려 하자 장군이 붙잡았다.
“놔요! 제발 때리지 말아요!”
발악하며 울부짖었다.
라이칸은 무섭게 날아드는 매질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거칠게 고함을 질렀다.
“그 여자를 다시 한번 건드리며 맹세코 죽여버리겠어!”
핏발이 선 라이칸의 눈을 보고 여왕이 코웃음을 쳤다.
“아주, 네놈이 죽여 달라고 발악을 하는구나.”
캘리는 이성을 찾아야 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렇게 여왕을 흥분시켜서는 안 된다.
“폐하.”
캘리는 절박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세요. 시키는 건 뭐든 하겠습니다.”
그제야 여왕이 라이칸이 아닌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키는 건 뭐든지?”
“예.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니…….”
“저 사내를 놓아 달라.”
“시녀가 되라면 시녀가 되고, 인질이 되라면 인질이 되겠습니다. 수녀원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발…… 저 남자는 보내주십시오.”
캘리는 가만히 눈길을 돌려 라이칸을 보았다.
제발, 가만히 있어요. 제발.
그가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잔인한 검은 늑대의 그것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저 사내를 향한 절박함이 대단하구나. 두 눈 뜨고 봐주기 힘든 연정이야. 그래도 내 기사들을 해한 자를 무사히 돌려보낼 수는 없다.”
여왕이 비릿하게 웃더니 장군을 향해 말했다.
“뭐 하는 것이오? 저자를 당장 지하 감옥에 보내지 않고.”
장군이 눈짓을 하자 병사들이 그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캘리는 다시 여왕을 보았다.
“폐하. 제발…….”
“죽이지는 않으마. 네가 내 말만 잘 들으면.”
그때였다. 끌려가던 라이칸이 다시 발악을 했다.
커다란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잡고 있던 병사들을 어깨로 밀어서 쓰러트렸다.
라이칸이 쇠사슬을 손으로 잡고 병사의 목에 감더니 순식간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병사의 허리에 꽂혀 있던 검을 빼앗았다.
장군이 고함을 치자 밖에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밀려들어 왔다.
그들이 쇠사슬을 잡고 당기자 라이칸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다리를 자신 쪽으로 당기자 쇠사슬을 잡고 있던 병사가 도리어 딸려왔다.
라이칸은 병사들을 향해 검을 치켜올렸다.
“먼저 죽을 놈은 먼저 나와라. 기꺼이 죽여주마.”
병사들이 섣불리 나서지 못하자 마렌 장군이 검을 빼 들고 달려들었다.
채앵.
마렌 장군의 검에 라이칸이 들고 있던 검의 반이 잘려서 날아가 버렸다.
장군의 검은 은빛으로 빛나고 그에 반해 병사에게서 뺏은 검은 녹이 슬어 있는 싸구려 철검이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장군이 검을 찔러오자 라이칸은 휙, 몸을 피하며 도리어 검을 빼앗고 장군을 발로 밀어 차버렸다.
황당한 표정을 짓던 여왕이 병사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놈을 잡아!”
병사들이 쇠사슬을 들고 라이칸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굵은 쇠사슬이 라이칸의 몸을 칭칭 감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순식간에 몸을 틀어 몸에 감긴 사슬을 풀어냄과 동시에 줄을 잡고 크게 흔들자 병사들이 와르르 넘어졌다.
“당장 멈추지 않으면 이 아일 죽일 것이다!”
서슬 퍼런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엘프 여왕의 차가운 검이 캘리의 턱 밑에서 번뜩이는 것을 본 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장군이 달려가 검 자루로 라이칸의 어깨를 후려쳤다.
라이칸이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안 돼!”
캘리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를 보는 그의 눈은 타오르는 불처럼 붉었다.
“다시 한번 미친개처럼 날뛰어 봐. 내 이 아이의 팔과 다리부터 잘라버릴 테니.”
라이칸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본 엘프 여왕이 혀를 찼다.
“넌 한 번 쓰다 버리는 용병으로 쓰기에는 아깝구나. 하나, 내 것이 될 수 없으면 다 소용없는 것이지. 이 아이도 마찬가지야. 네가 이 아일 구하겠다고 용을 쓰면 쓸수록 난 이 아이를 상처 낼 수밖에 없어. 흠이 생기면 값어치가 떨어지겠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러니 내 성정을 건드리지 마라. 둘 다 이 자리에서 죽이고 끝내버릴지도 모르니까.”
엘프 여왕이 부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당장 끌고 가!”
병사들이 라이칸을 양쪽으로 잡고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캘리는 절망했다.
엘프 여왕이 칼을 치웠다.
“네가 무엇이냐고 물었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대체 네가 무엇이기에 사방에서 너를 찾느냔 말이다.”
여왕의 말에 캘리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에 핏발이 섰다.
“폐하는 이럴 자격이 없습니다.”
“뭐?”
“저를 숨겨두는 대가로 은을 받으셨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저를 이렇게 대해서도 안 됩니다!”
“감히 네가…….”
“저를 놔주세요. 저 남자를 풀어주세요!”
“하.”
기가 막힌 여왕은 잠시 캘리를 보다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를 놔줄 수는 없지. 너를 찾는 이들이 있는 한은.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 난, 그들 중 내게 가장 도움이 될 자에게 너를 넘길 것이다. 이 아이를 서쪽 탑으로 데려가 가둬라!”
***
서쪽 탑으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하고 고요했다.
이미 날이 저물어 하늘은 흑청색이었고 달은 구름에 가려 희미했다.
낡은 돌벽에 꽂혀 있는 횃불에 드러난 그림자가 괴물이라도 되는 듯 기이하게 움직였고, 찌르르,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하프 소리와 묘하게 어울려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커다란 참나무를 두 개 지나치자 마침내 탑의 입구가 나타났다.
위쪽이 둥근 나무 문은 너무 낡아서 기둥 하나가 쾅, 부딪치면 단숨에 구멍이 뚫릴 것 같았다. 얼기설기, 벽을 타고 자라난 덩굴이 탑 전체를 휘둘러, 마치 마녀가 사는 곳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입구를 지키는 병사조차 없었다.
캘리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 돌계단을 밟고 3층까지 올라갔다. 드디어 방문 앞에 섰을 때, 그녀는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려웠다.
“들어가.”
삐이이익, 문이 열리고 병사 하나가 그녀를 밀쳤다. 캘리는 휘청거리며, 넘어질 것처럼 안으로 들어섰다.
이어서 문이 쿵, 닫혔다.
사방이 어두웠다. 더듬더듬, 차가운 벽을 짚고 걸어갔다.
겨우 창문이 있는 곳까지 가서 덧문을 열자 옅은 달빛이 밀려든다.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낡은 침대 하나와 더러운 판자로 만든 상자 하나. 그 상자 위에 있는 기름등잔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캘리는 재빨리 걸어가서 작은 부싯돌을 부딪쳐 기름등잔에 불을 붙였다.
불그스름한 빛이지만 훨씬 나았다. 발밑에 뭔가가 휙,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에 얼른 고개를 내렸다.
쥐가 달려가 벽이 갈라진 틈으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캘리는 등잔을 내려놓고 재빨리 창가로 걸어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입구를 지키는 병사 둘이 보였다. 조금 전, 그녀를 여기에 처박은 그 병사들일 것이다.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심호흡을 한 후, 허공에 대고 속삭였다.
“쉴라.”
그 애가 따라왔을 것이라는 믿음은 거의 신앙에 가까웠다. 그 애가 늘 말해 왔듯, 내가 곧 주인이고, 내 목숨이 곧 그 애의 목숨이라는 말을 믿었다.
그러니까, 제발.
“쉴라.”
순간, 어디선가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푸드덕, 푸드덕,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아까 봤던 참나무 쪽에서 뭔가가 곧장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미소를 지은 캘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빈 창틀에 쉴라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번처럼 쉴라가 반가운 적이 없었다.
창문 안으로 들어온 쉴라가 혀부터 찼다.
“쯧쯧, 내가 그랬지? 여왕을 너무 믿지 말라고.”
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았어.”
난 어리석었고.
가만히 보던 캘리는 달려가 쉴라를 껴안았다.
“윽. 뭐 하는 거야?”
격렬히 저항하는 쉴라를 품에 꼭 끌어안고 절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가 살아 있다고 말해 줘. 그가 어디 있는지 안다고 말해줘.”
“이걸 놔야 말해 줄 거, 아니야!”
숨이 막히는 듯, 캑캑거리며 저항하는 쉴라를 황급히 풀어주었다.
캘리는 희망에 들뜬 얼굴로 물었다.
“아는 거야? 어디로 끌고 가는지 봤어?”
“그래, 봤다. 아이고, 목이야.”
쉴라가 날개로 자기 목을 쓰다듬더니 캘리를 노려보았다.
“넌 여왕한테 안 죽으면 검은 늑대한테 죽을 거야. 그러니까, 그가 그냥 죽게 놔두는 건 어때?”
“아니. 차라리 그의 손에 죽는 게 나아. 그가 나 때문에 죽는 건…… 견딜 수 없어.”
“뭐야? 그 표정은.”
“…….”
“야. 불안하게 만들지 마. 정말 검은 늑대를 좋아하게 되기라도 한 거야?”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캘리를 보며 쉴라가 대답을 재촉한다.
“어이. 캘리.”
툭,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쉴라가 부리를 쩍 벌렸다. 한번 터진 눈물은 봇물이 터지듯 자꾸만 흘러내렸다.
쉴라가 인상을 쓰며 날개로 제 가슴을 퍽퍽, 쳤다.
“아이고. 내가 못살아.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좋아하는 척하는 거라며? 자신 있다며? 큰소리 빵빵 치더니……. 남녀가 그렇게 붙어 있는데 사달이 안 나는 게 이상하지. 밤마다 뭐가 좋은지 웃음이 떠나질 않더니…… 결국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