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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찰을 도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 왕궁 안뜰까지 들어온 와이엇과 오웬은 오늘, 달빛이 흐린 걸 감사했다.
비가 내려 축축한 바닥을 디딜 때마다 발자국이 나긴 했지만 여러 발자국과 뒤섞여서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도 다행이었다.
벽과 벽 사이, 어두운 공간에 몸을 숨긴 두 기사는 바깥을 살피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푸드덕, 날갯소리가 났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쳐들었다. 순간, 못생긴 새가 홰를 꽂아두는 고리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걸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젠장. 저 새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와이엇이 중얼거리자 오웬도 동의했다.
“제프리가 새를 놓쳤군.”
오웬이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아니. 내가 나온 거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두 남자는 입을 쩍 벌렸다.
쉴라가 둘을 내려다보며 쯧쯧, 혀를 찼다.
“멍청이들.”
와이엇이 눈을 끔뻑거리더니 중얼거린다.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건가?”
“그렇다면, 나도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거겠지.”
오웬도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보들.”
쉴라가 다시 쏘아붙였다. 와이엇이 자기 뺨을 철썩, 치더니 멍하게 중얼거렸다.
“새가 말을 해.”
“그래. 말하는 새야.”
오웬도 멍하게 대꾸했다. 쉴라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이럴 시간 없어. 멍청이들아. 날 따라와. 검은 늑대를 구하고 싶으면.”
새가 날아오르자 와이엇이 오웬을 보며 물었다.
“방금 저게, 우리 칸을 말하는 거지?”
오웬이 먼저 튀어 나가며 말했다.
“그래. 저 새가 칸이 있는 곳을 알아!”
쏜살같이 달려가는 오웬의 뒤로 와이엇도 뛰기 시작했다.
***
뜰로 나온 마렌은 황금빛 머리칼을 가진 소녀가 갇혀 있는 탑을 올려다보았다.
‘장군. 잘 감시하시오. 그 애가 우리에게 큰 보물을 안겨줄 것 같으니.’
이래인 여왕은 여자의 몸값만을 탐내고 있지만 마렌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뭔가 있는 것 같았다.
세상에. 그런 머리색은 처음 본다. 태양이 사람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것 같았다. 어릴 때 봤을 때도 특이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지금은 상상 이상이었다.
어쨌든, 디콘스의 길스 경이 찾아다닐 정도니, 분명 중요한 존재는 맞다. 소녀를 잡고 있으면 결국 그에 얽혀 있는 비밀도 알게 되겠지.
돌아서던 마렌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홱, 다시 고개를 쳐들고 불이 켜져 있는 탑 방을 유심히 보았다.
없다.
움직이는 그림자가 없었다.
벌써 자는 건가?
그럴 수도 있지만…….
잠시 창문을 노려보던 마렌은 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확인을 해봐야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라이칸은 두려움을 느꼈다.
이런 감정은 아주 오래전, 어머니가 상처를 입고 쓰러졌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소중한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건 피를 솟구치게 만들었고 머릿속을 지옥 불길 속으로 밀어 넣는 것과 같았다.
선뜩한 칼날이 살갗을 저미고, 뾰족한 창끝이 눈알에 꽂히는 고통.
그녀가 떠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력감은 그의 분노를 극한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철창 안에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은 피를 뜨겁게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다.
빠른 발소리가 지하의 어두운 벽을 울리자 라이칸의 눈이 번뜩였다. 횃불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누구건, 상관없다.
반드시 이곳을 빠져나갈 것이다.
그녀를 쫓을 것이다. 세상 끝까지 가는 한이 있어도.
“칸!”
행운의 여신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와이엇과 오웬을 보는 순간, 라이칸은 황금빛 머리칼을 가진 그 여자를 다시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
동쪽 문을 향해 날아가던 쉴라는 갑자기 달려오는 말들을 피해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빌어먹을. 여왕의 기마대다.
쉴라의 눈이 궁 쪽으로 향했다. 수십 개의 횃불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들켰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사방으로 흩어지는 횃불과 말발굽 소리. 여왕이 어마어마한 수의 병사들을 푼 게 틀림없다. 횃불이 대낮처럼 사방을 밝히고 있으니, 동문이든 서문이든 경계가 강화되는 건 말할 것도 없지.
캘리의 계획은 이번에도 실패할 것이 분명했다. 동문 근처에 가기도 전에 잡힐 것이다. 아니, 벌써 잡혔는지도.
자, 그럼. 어느 쪽이 나을까?
뭐 하는 놈인지도 모를 누군가에게 캘리를 팔려는 여왕? 아니면, 속았다는 배신감에 이를 갈고 있을 검은 늑대?
젠장.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다니.
쉴라는 동쪽 문이 있는 방향을 노려보다가 욕설을 뱉으며 다시 왔던 길을 날아가기 시작했다.
여왕보다는 검은 늑대가 낫지.
검은 늑대는 그동안 캘리와 쌓은 정이 있는데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캘리는 내가 다시 검은 늑대에게 간 걸 알면 죽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 살 확률이 높은 쪽에 걸어야 한다.
쉴라는 힘차게 바람을 가르고 날기 시작했다.
철창이 열리자마자 라이칸은 감옥의 계단을 빠르게 내달렸다. 입구로 나와 병사의 허리춤에서 검 하나를 주워 들던 그 순간 사방에서 횃불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조용한 밤을 헤집는 추적자들.
캘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라이칸은 바닥을 보았다. 비가 내려 축축한 바닥은 여러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다.
작은 발자국은 딱 하나였다.
동쪽이다.
홱, 몸을 틀던 그때였다.
“검은 늑대. 이쪽이야.”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뒤에서 와이엇이 경외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인의 샙니다. 말하는 샙니다.”
라이칸은 새를 흘깃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따위 새가 말을 하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지금 그에겐 오직 하나의 목표뿐이었다.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새가 그를 앞질러서 날아간다. 캘리가 있는 곳으로 안내라도 하듯이.
라이칸은 전속력으로 달렸다.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늑대처럼 자세를 낮추고 최대한 공기의 저항을 줄이면서 화살처럼 빠르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달렸다.
수풀을 사이에 두고 기마대 한 무리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라이칸은 방향을 틀었다. 속도를 전혀 늦추지 않으면서 수풀을 가로질러 기마대를 향해 돌진했다. 힘차게 달리는 말 무리의 끄트머리쯤에 달리고 있는 기사 하나를 목표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라이칸은 기사를 덮쳐서 함께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어깨로 땅에 부딪치는 충격을 흡수하며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은 그는 들고 있던 검의 손잡이로 놈의 명치를 찍었다.
놈이 축 처지자 벌떡 일어나 불안하게 서성이는 말 등 위로 올라탔다.
흥분한 말의 고삐를 잡고 제어하자마자 말 허리를 힘껏 찼다.
하!
말이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간다. 잠시 후, 똑같은 형식으로 말을 빼앗은 와이엇과 오웬도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저기다!”
기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젠장. 들켰다!
캘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말을 탄 기사들이 일제히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동쪽 성문이 저 앞에 있는데……. 나무 사이로 방향을 틀었지만 거기엔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다시 나무 밖으로 나와 더 빨리 뛰었다.
당연히 말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앞을 가로막고 선 말 한 마리에 이어서 뒤쪽에도 말을 탄 기사가 있었고 곧이어 나무 틈에서 달려 나온 병사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캘리는 단검을 빼 들었다.
승산 없는 싸움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이대로 잡혀가서 어디로 팔려갈지 모르는 노예 신세가 되느니, 할 수 있는 데까지 버텨 보리라.
어쩌면, 행운의 여신이 나를 향해 웃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말에서 내려 다가오는 기사에게 단검을 던지고 문 쪽으로 뛸 수도 있다. 어린아이 하나 통과할 개구멍으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아, 젠장. 이건, 말이 안 돼.
개구멍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
캘리는 절망했다. 기사가 다가온다.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캘리는 이를 악물었다.
내 탓이다. 나의 무지와 고집이 결국 이런 지경을 만들어낸 거였다.
왜, 그토록 엘프 여왕을 믿었을까? 쉴라가 그토록 경고했는데, 난 귀를 막았다.
목이 멘다.
라이칸…… 그는 빠져나갔겠지? 그래, 그 사람만 무사하면 돼. 난 지금 잡히더라도 다시 도망칠 기회가 있을 테니까.
캘리는 눈에 독기를 품었다.
“날 해하면 여왕이 가만있지 않을걸? 날 살려서 데려오라고 했을 텐데?”
병사들이 주춤한다. 캘리는 회심을 미소를 지었다.
잘하면, 여왕이 날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나를 살려줄 수 있을 것 같다.
캘리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천둥처럼 가까워지는 소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기사들과 병사들도 속도가 줄지 않는 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횃불을 든 이곳만 밝았고 그 너머에는 짙은 어둠뿐이었다.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는 더 거칠고 사납게 울렸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 속에서 말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치켜올렸다.
캘리는 말 위에 탄 남자를 보았다. 검은 어둠에 완벽하게 스며든 남자는, 달려드는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검을 사정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사나운 검이 공기를 스치며 적들을 무자비하게 가를 때마다 붉은 피가 비처럼 흩뿌려졌다.
라이칸.
그는 검은 악마였다. 뒤늦게 달려온 수십 명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였어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무자비한 지옥의 사자.
그를 지칭하던 수많은 말들이 이제야 실감이 되었다.
와이엇과 오웬까지 가세하자 엘프족 전사들이 초겨울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쓰러졌다.
캘리는 뒷걸음질 쳤다.
나는 검은 늑대를 속였다.
이제 그는 모든 걸 안다.
지옥의 사자는 나를…… 죽일 것이다.
캘리는 홱, 뒤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