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46)화 (46/159)

46

커다란 고함 소리가 뒤통수에 와서 꽂혔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있는 힘껏 달렸다.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달려온다. 순식간에 가까이 쫓아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빨리…….

숨이 턱에 차올랐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거의 문 앞에 왔을 때, 캘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눈이 커졌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검은 늑대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캘리는 더 힘껏 달렸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뒤까지 쫓아온 그가 말에서 떨어질 것처럼 몸을 옆으로 기울이며 낮추는 게 보였다.

안 돼!

휙, 강하고 단단한 팔이 그녀의 몸을 낚아채 올리는 순간, 비명을 질렀다.

너무나 순식간이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말 위에 앉아 있었다.

라이칸이 그녀를 품속으로 당겨 꽉 끌어안았다.

세차게 말 허리를 걷어차자 화살처럼 튀어 나간 말이 쏜살같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벌써 앞에 가 있던 오웬이 말에서 뛰어내려 문을 열고 있었다. 그녀가 나가려던 그 동쪽 문이었다.

라이칸은 그대로 문을 통과해,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

눈물이 났다.

증오와 배신감으로 얼룩진 그의 눈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함께 흘러내리는 눈물도 뒤로 날아간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나를 보는 그 검은 눈을 보고 싶지 않았다.

백작의 제안을 거절했어야 했다.

소르테로 올 다른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

여행자든, 음유시인이든, 유랑 악단이든, 그들의 틈에 끼어서 올 수도 있었는데……. 너무나 쉽게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인 대가가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은 몰랐다.

쉼 없이 흐르는 눈물에서 짠맛이 느껴졌다. 뺨에 와 닿는 공기조차 서늘한 물기가 가득했다.

바닷길이었다. 오른쪽에 드넓게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짙은 청색 끝에서 해가 뜨고 있었다.

캘리는 고개를 틀어 뒤를 보았다. 와이엇과 오웬이 바로 뒤에서 호위하며 달리고 있었다. 그 뒤에는 여왕의 기사단이 쫓아오고 있었다.

수십, 아니…… 백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캘리는 고개를 들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눈과 굳게 다문 입술.

검은 늑대는 전방을 응시한 채, 더 힘껏 속력을 높이고 있었다.

***

“밤새웠어?”

모닥불이 타는 걸 지켜보고 있는 시타의 옆으로 테드가 와서 앉았다. 시타가 아무 대꾸도 없자 테드가 인상을 썼다.

“벨만 백작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혹시, 부인에 대한 일인가?”

시타가 고개를 돌려 테드를 보았다.

“부인은 어때?”

테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처음엔 좀 그랬는데……. 너도 봤겠지만, 너무 약하게 생겼잖아. 우리 모두, 베아투름에서 못 견딜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아니더라고. 용감해. 단검도 쓸 줄 알고.”

시타가 미간을 슬쩍 찌푸리자 테드가 쿡쿡, 웃었다.

“미친 들개의 이마에 단검을 꽂는 걸 네가 봤어야 했는데. 먼 거리에서도 정확하게 던져서 맞히더라고. 우리 모두 깜짝 놀랐지. 요리도 잘해.”

“…….”

“무엇보다 칸이 푹 빠졌어.”

시타의 눈이 굳었다.

“빠졌다고?”

테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들 중 누구도 그 사실을 반박할 수가 없을 정도로. 부인을 보는 눈빛이 완전히 굶주린 늑대야. 부인 때문에 화를 내고, 부인 때문에 웃어. 그 정도면 심각한 중증이지.”

“얼마나 봤다고…….”

“기간이 짧아도 정은 깊어질 수 있지. 우리 칸도 늑대처럼 일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만난 건지도 모르고.”

“헛소리.”

시타가 이죽거리자 테드가 인상을 썼다.

“뭐?”

“일생을 함께할 반려자는 무슨.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베아투름의 추위는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남부 여자는 못 견딜 거야.”

“너 왜 이렇게 비관적이야?”

“사실을 말하는 거야.”

“어쨌든, 칸은 절대 부인을 포기하지 않을……!”

갑자기 시타가 한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테드도 긴장했다.

시타가 이럴 때는 뭔가가 있는 거였다. 눈과 귀가 산짐승처럼 발달한 하울족의 특징이었다.

갑자기 시타가 땅에 납작 엎드리더니 귀를 댄다.

“말발굽 소리야. 그것도 아주 많이.”

황급히 말한 시타가 벌떡 일어서더니 가까운 나무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어찌나 빠른지, 다람쥐가 따로 없었다. 눈 깜짝할 새에, 꼭대기까지 올라간 시타가 갑자기 아래를 보며 소리쳤다.

“칸이야! 젠장. 엘프들에게 쫓기고 있어!”

놀란 테드는 천막에 잠들어 있는 기사들을 깨우기 위해 고함을 질렀다.

“기상! 전투 준비!”

동시에 시타는 허리에 차고 있던 뿔피리를 꺼내서 동트는 하늘을 향해 길게 불었다.

뿌우우우우우우.

늑대의 울음소리처럼 길게 이어지는 소리가 광야를 넘어 산등성이까지 울려 퍼졌다.

***

캘리는 라이칸이 속도를 늦춘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고개를 들고 앞을 보는 순간, 그가 왜 속도를 늦추는지 깨달았다.

그들이 오고 있었다.

검은 늑대의 기사들.

맨 앞에는 주인을 향해 달려오는 종마, 벤투스가 있었다.

기사단은 순식간에 합류해, 라이칸을 감싸듯 원을 이루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전속력으로 쫓아오던 엘프족 전사들이 갑자기 늘어난 이쪽 전열을 보고 당황해서 급히 말을 세웠다. 그때였다. 그들의 놀란 시선이 언덕 위로 향했다. 캘리도 고개를 들었다.

아.

푸른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수십 명은 족히 되고도 남아 보였다. 검은 바탕에 은빛의 늑대가 수놓아진 깃발이 바람에 펄럭인다.

토르 기사단이었다.

대체 어떻게?

벨만 백작의 영지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기사들 수가 줄었다가 늘었다가 하는 건 알고 있었다. 함께 움직이는 기사들 수가 줄었을 때, 나머지 기사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따라오고 있다는 것도.

‘만약에 있을 적이 우리의 전력을 파악할 수 없게 하려는, 일종의 전략입니다.’

제프리가 해주던 말이 떠오른다.

그때는 어렴풋이 십여 명의 기사들이 더 있을 거라고 짐작했었다. 이렇게 많은 수가 뒤따르고 있는 줄은…….

그래. 워렌 공작이었지.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나라, 디콘스의 아르 왕이 가장 신임하는 검은 늑대. 비록, 베아투름의 척박한 땅이긴 하지만, 그 땅의 영역이 디콘스의 반을 차지하고 있고, 거기서 나오는 광물과 보물들로 풍족한 땅의 영주.

그래서 아르 왕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힘과 권력을 가진 귀족.

그런 그가 움직였다면, 수십이 아니라 수백의 기사가 함께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데.

갑자기 나타난 기사들과 검은 늑대의 깃발을 본 엘프족 전사들이 당황하며 우왕좌왕하자 라이칸은 그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상대가 라이칸을 보며 거칠게 물었다.

“설마, 검은 늑대인가?”

옆에 선 와이엇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디콘스의 워렌 공작님이시다! 예를 갖춰라!”

커다랗게 울리는 목소리에 상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린 몰랐소. 여왕께서…….”

“여왕에게 전하라.”

라이칸의 묵직한 목소리가 상대의 말을 자르고 이어졌다.

“워렌 공작부인에게 볼일이 있으면 나를 먼저 거치라고.”

“그, 그게 무슨…….”

상대의 눈이 라이칸에게서 캘리에게로 옮겨졌다. 저 여자가 공작부인이라고? 하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라이칸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공기를 가른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았으니 여기서 더 쫓아온다면 어떤 의미인지 알겠지.”

상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라이칸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지금부터 우리를 따르는 엘프족 전사들은 모조리 처단할 것이고, 토르 기사단에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겠다.”

엘프족 전사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토르 기사단에 대한 선전포고는 곧 디콘스에 대한 선전포고와 같았다.

포르엘티움이 아무리 부강한 엘프 왕국이긴 하나, 디콘스에 비하면 대도시 하나쯤과 다름없었다. 거기에, 전투력으로는 사자 앞의 새끼 강아지에 지나지 않는다.

힘 있는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는 엘프족이 적의 침략을 받지 않는 이유는 국방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영악한 장사꾼이었고 외교에 능했을 뿐이다.

엘프족 기사단의 수장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여왕께 전하겠습니다.”

그들은 상황을 이해했고 빠르게 판단했다.

말 머리를 돌려 왔던 길을 다시 달려가는 그들이 점처럼 작아졌다.

그제야 라이칸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캘리는 그가 내미는 손을 의지해 말에서 내렸다.

곧이어 검은 종마, 벤투스가 주인에게 다가왔다.

라이칸은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태우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순간, 그가 인상을 쓴다.

캘리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험악한 표정으로 한 발을 내딛는다.

그녀는 다시 두 걸음 물러섰다.

라이칸의 눈이 사납게 번뜩인다 싶더니 이내 눈 깜짝할 새에 다가왔다.

그녀를 홱, 낚아채더니 벤투스 위로 올렸다. 그녀가 반항하듯 거친 숨을 들이켰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훌쩍, 뒤에 올라탔다.

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간다.

“하.”

그가 말을 걷어찼다. 벤투스가 달려 나가자 기사들이 그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쫓아오는 엘프족이 없어도, 캘리의 두려움은 그대로였다.

그는 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남은 소망은, 그가 오래 고문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덜 고통스럽게, 자비를 베풀어서 빨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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